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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릉의 낭만

2025년 12월 01일

  • WRITER 박진명(여행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전재호
  • 제작 지원 강릉시청

눈 쌓인 안반데기와 추억의 정동진역, 운치 있는 명주동 거리와 강릉시립미술관. 여기에 속을 뜨끈하게 데워 주는 초당 순두부와 감자 옹심이까지, 낭만 가득한 강원도 강릉으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

1. 강릉이 그려 낸 예술의 궤적
강릉시립미술관

건축물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연출된 수변 공간이 안뜰까지 이어진다.
현재 진행 중인 캐서린 번하드의 특별전 <인사이드 더 스튜디오>는 작가의 작업 공간을 전시관에 옮겨 놓고 작가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도록 기획했다.

2006년에 개관한 강릉미술관이 2013년 강원도 유일의 시립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강릉 시내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500여 제곱미터 규모의 2층 건물이다. 2024년에는 소나무가 많아 ‘솔올’이라 불리던 옛 교동 일대에 솔올미술관이 들어섰다. 2025년 강릉시가 이곳을 직접 운영하면서 ‘강릉시립미술관 솔올’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현재 강릉시립미술관은 교동관과 솔올관으로 나뉘어 다양한 전시와 행사를 선보인다. 교동관은 지역 작가를 발굴해 대중에게 소개하고, 지역민을 대상으로 문화 교육과 행사를 진행하며 예술이 지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이끌고 있다. 예스러운 건물과 구시가지 풍경이 매력적인 교동관과 달리, 솔올관은 백색의 미니멀한 건축물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계적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설계 철학이 깃든 건물로, 빛과 유리를 주 소재로 사용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유기적으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에서 창밖의 주변 숲이나 공원 풍경이 액자처럼 보이도록 구성한 것도 재미있다.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건축 공간 자체가 작품이자 새로운 경험인 것이다. 솔올관에서는 내년 1월 18일까지 미국 팝아트 작가 캐서린 번하드의 특별전 <인사이드 더 스튜디오>가 방문객을 맞는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화부산로40번길 46(교동관), 원대로 45(솔올관)
문의 033-640-4271(교동관), 033-660-2446(솔올관)

2. 강릉의 맛을 책임지는
초당 순두부와 감자 옹심이

병산마을 감자옹심이골목에는 감자 옹심이부터 감자전, 장칼국수, 메밀 전병까지 강릉의 다양한 토속 음식을 내는 식당들이 모여 있다.

강릉 도심을 여행하다 보면 조선 시대 문인 허균과 허난설헌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초당순두부마을 역시 이들 남매와 인연이 깊다. 강릉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허엽이 집 앞 샘물로 콩물을 끓이고 바닷물로 간을 맞춰 두부를 만든 것이 초당 순두부의 시작이었다. 그의 호를 따 순두부에 ‘초당’이 붙었고 오늘날까지 강릉의 별미로 사랑받고 있다. 이 마을의 식당 대부분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저마다 전통 방식을 지켜 오고 있다는 뜻. 강릉의 초당 순두부는 염화마그네슘이 풍부한 해수를 간수로 사용해 일반 두부보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콩물이 끓는 동안 주걱으로 계속 젓고, 끓는 물을 식힌 뒤 간수를 조금씩 부어 만드는 것도 부드러운 맛의 비결이다. 가마솥 앞에서의 오랜 기다림은 깊은 맛으로 이어진다. 강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별미는 감자 옹심이다. 강릉의 서늘한 기후와 배수가 잘되는 토양은 감자가 생육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특히 안목해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병산마을은 질 좋은 감자 산지로 유명하다. 덕분에 이 일대에는 담백하고 쫄깃한 감자 요리 전문 식당이 성업을 이룬다. 감자 옹심이는 쌀이 귀하던 시절, 강원도 정선과 영월 지역에서 감자 반죽을 새알처럼 빚어 끓여 먹기 시작한 데에서 유래했다. 곱게 간 감자를 반죽해 동그랗게 빚고 멸치 육수에 갖은 채소와 함께 넣고 끓여서 김 가루, 깨소금 등의 고명을 얹으면 뼛속까지 뜨끈해지는 감자 옹심이가 완성된다. 갓 부쳐 낸 쫀득하고 담백한 감자전을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20-1(초당순두부마을), 성덕로 168(병산마을 감자옹심이골목)

3. 강릉의 운치와 멋을 선도하는
명주동 거리

카페 파인파인 내부. 이 오래된 적산가옥은 1910년대에 카바레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후문이 있다.
오래된 목조 주택과 적산가옥 등 강릉의 옛 모습이 잘 보존된 명주동 거리.

고려·조선 시대에는 관아가, 현대에 와서는 시청이 자리해 강릉의 행정 중심지였던 명주동. 2001년 강릉시청이 현재의 자리인 홍제동으로 이전하고, 안목해변 카페 거리 같은 새로운 번화가가 등장하면서 명주동을 찾는 발걸음이 차츰 줄어들었다. 그렇게 빛바랜 골목이 다시 숨을 고르기 시작한 건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해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면서부터였다. 1958년에 문을 연 작은 공연장 ‘단’을 중심으로 옛 방앗간과 낡은 적산가옥이 멋스러운 카페와 아기자기한 소품 숍으로 탈바꿈했다. 마을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을 이끌며 마을을 소개하는 모습과 오래된 목조 주택과 기와집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소박하면서 정겹다. 명주동 거리에서 찾은 카페는 파인파인. 60년 넘은 적산가옥을 카페로 개조해 강릉을 대표하는 소나무 향을 담은 음료와 디저트를 선보인다. 김성용 대표는 학업을 위해 강릉에 왔다가 이곳의 매력에 이끌려 정착했다. 조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소나무꽃에서 채취한 송홧가루를 이용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커피와 양갱, 꽃빵을 선보인다. 파인파인의 대표 메뉴는 송홧가루의 고소한 향을 담은 송화커피. 솔잎의 상쾌한 향과 부드러운 송화 크림이 어우러진 솔향 꽃빵, 송홧가루를 넣어 은은한 단맛이 도는 송화 양갱도 지나칠 수 없다. 적산가옥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원도심의 운치가 어우러진 파인파인에서 강릉의 맛을 만끽하자.
주소 강원도 강릉시 경강로2046번길 11-2(파인파인)
문의 0507-1334-8889

4. 사람의 땀방울이 이룬 장관
안반데기

배추 수확이 끝나고 잠시 휴식기에 접어든 안반데기의 마을 풍경.

사실 안반데기의 진짜 얼굴은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여름에 만날 수 있다. 해발 1100미터 고랭지 평원에 펼쳐진 배추밭과 감자꽃,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하지만 겨울에 안반데기에 가야 할 이유도 넘치도록 충분하다. 차고 쾌청한 겨울 공기 속으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할 때 안반데기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눈 쌓인 배추밭은 또 어떤가. 안반데기에 흰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으면 초록색 언덕이 막 정비를 끝낸 스키장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안반데기라는 이름은 떡을 칠 때 사용하는 오목하고 넓은 떡판 ‘안반’과 평평한 땅을 뜻하는 ‘데기’를 합쳐 지은 것이다. 안반데기가 지금의 풍광을 이루게 된 건 1960년대 이후다. 정부 주도의 화전민 정리 사업을 시행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강원도 고지대로 모여들었다. 화전민들은 기계농이 어려울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안반데기의 산을 깎아 밭을 일구고 곡괭이와 삽으로 농사를 지었다. 안반데기가 사계절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강릉 대표 관광지가 된 건 이렇듯 힘겨운 시절을 살아 낸 이전 세대의 땀방울 덕분이다. 주차장에서 마을의 가장 높은 곳까지는 도보로 20분 남짓 걸린다. 옛날에는 거친 산길이었을 길을 쉬엄쉬엄 걷다 보면 어느새 아득한 고원 위로 주홍빛 해가 떠오른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길 428

5. 청춘의 한 시절을 간직한
정동진역

강릉에 KTX가 들어서기 전 서울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역까지 약 5시간 걸렸다. 이제는 서울에서 약 2시간이면 강릉에 닿는다.
세월이 흘러 정동진역은 모두에게 추억이 되었지만, 정동진의 아침 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떠오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무슨 이유로든 찾았을 추억의 장소, 정동진역.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자 국내에서 첫손에 꼽히는 일출 명소다. 1962년 탄광 산업 관련 인구가 밀집했을 때만 해도 정동진 인근에는 5000여 명이 거주했으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점차 활기를 잃었다. 이후 정동진역이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한 건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지로 등장하면서였다. 배우 고현정이 승강장에 앉아 바라보던 바다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다. 덕분에 정동진 일대의 관광업이 활성화되었고, 세계 각국의 시계 3000여 점을 전시한 정동진시간박물관, 세계 최대 규모의 모래시계를 설치한 모래시계공원, 배 모양의 썬크루즈 리조트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들어섰다. 강릉 바다를 더욱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다면, 해안 지형이 부채를 펼친 모양과 닮은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걸어 보자. 썬크루즈 리조트부터 심곡항까지 이어지는 약 2.8킬로미터의 해안 산책로는 해안단구와 몽돌해변, 거북바위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며 서로 다른 풍경을 펼쳐 보인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역길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