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첫 자락, 길어진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 김환기의 그림을 만난 강원도 강릉은 사방이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푸른색 바탕에 푸근한 자국들이 점점이 내려앉는다. 둥글게 번져 나가는 점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달 밝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마당에서 올려다본 하늘같이 무언가 아득히 그리워지는 이미지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는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없다. 현재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김환기의 작품일 만큼 그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전시는 물론 신문, 교과서에서도 자주 본 김환기의 푸른 그림. 볼 적마다 그 아름다움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강릉에서는 김환기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이하 솔올) 개관 특별 전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뉴욕시대>는 작가의 화풍을 대표하는 점화(點畵)를 중심으로 100점의 회화와 드로잉을 선보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의 무궁함에 새삼 감탄하게 되는 것처럼, 여름의 첫 자락에서 만나는 김환기의 작품 세계는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동해 물과 ‘환기 블루’
김환기의 표현에 따르면 동해는 “지독히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다. 1957년 프랑스 니스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그곳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했던 말이다. 강원도 강릉역에서 차로 7분 남짓, 김환기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솔올은 동해의 안목해변, 경포대와도 가깝다. ‘소나무가 많은 고을’이라는 뜻의 ‘솔골’로 불리던 지역의 옛 이름을 딴 이 신상 미술관은 교동 언덕에 위치해 강릉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백색 건축’으로 유명한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팀, 마이어 파트너스가 설계를 맡아 2024년 개관 직후부터 강릉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솔올은 강릉시립미술관으로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지난 4월 2일 재개관했다. 외부의 빛과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커다란 유리창이 인상적인 건물은 갓 꺼낸 캔버스처럼 새하얗다. 로비에는 1950년대 전후 공간주의(spatialism) 예술운동을 이끈 루치오 폰타나의 백색 네온 작품이 천장 조명 대신 걸려 있다. 폰타나가 캔버스를 뚫거나 베어 내는 식으로 회화가 지닌 평면성의 한계를 물리적으로 극복해 나갔다면, 김환기는 정반대의 전략으로 회화의 공간 개념을 확장시킨 작가다. 기존의 사각 틀 안에 만경창파와 우주를 집어넣은 그 무한의 세계는 놀랍게도 작은 점 하나에서 시작된다.
전시실은 총 세 곳으로 김환기의 전시는 1·2층 전관에서 진행된다. 전시의 부제는 ‘김환기의 뉴욕시대’다. 흔히 김환기의 작품은 그가 머물렀던 장소로 구분되곤 한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서구 미술의 신경향을 수학한 동경 시기(1933~1937), 한국의 자연과 달항아리 등을 주요 소재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 서울 시기(1937~1956), 20세기 추상미술의 최전선인 유럽에서 한국적 추상을 실험한 파리 시기(1956~1959), 귀국 후 두 번째 서울 시기(1959~1963), 그리고 별세하기 전까지 11년간의 뉴욕 시기(1963~1974)다. 뉴욕 시기에 이르러 그의 작품에서 구체적인 형체는 완전히 사라진다. 1층 1관에서는 드로잉과 스케치북 작업을 통해 점화에 도달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2층의 2관과 3관에서는 ‘환기 블루’로 알려진 푸른 점화 작품과 작가의 유작이 전시된다.


2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를 연필로 적고 색연필과 마커로 색을 채웠다 .
한 점 한 점 그리움을 찍다
그의 일기에서 ‘점화’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65년이다. “아침부터 백설(白雪)이 분분(紛紛) ⋯ 종일 그림 그리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1965. 1. 2.) 눈송이가 쌓이듯 화폭에는 물기를 머금은 점들이 찍혔고, 그 송아리 얼룩 옆엔 하얀 오솔길 같은 여백의 선이 생겼다. 또 다른 일기에서 그는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 가는 점”(1970. 1. 8.)이라 말하기도 한다. 산마루 한옥집 감나무와 대추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열매, 그리운 하늘과 바람, 다정한 보름달, 보고 싶은 얼굴, 점경(點景)처럼 까마득히 멀지만 선명하게 남은 풍경들. 여러 나라와 도시를 떠돌아도 그의 마음이 머문 장소는 늘 이곳이었던 셈이다. 작가의 그림에 점점이 찍힌 그리움의 정체는 1962년 3월 5일 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 고향 우리 집 문간에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목포항에서 백마역 똑딱선을 타면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 섬이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 순하디순한 마을 안산에는 아름드리 청송이 숨 막히도록 총총히 들어차 있고 ⋯ 낙락장송이 울창하게 들어찬 산을 바라보며 또 그 산속에서 자란 나에게는 고향 생각이란 곧 안산 생각뿐.”
이번 전시 타이틀이 된 작업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눈물방울 같은 그리움이 빼곡하다. 뉴욕에서 시인 김광섭의 부고를 듣고 슬픔 속에서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김광섭은 그와는 성북동 이웃사촌이자 가까운 친구였다. 다행히 그 소식은 오보였고, 작품은 서울로 보내져 같은 해 열린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쉽게도 해당 작품을 볼 수 없다. 다만 그와 유사한 초기 점화의 화면 구성을 보여 주는 ‘17-IV-71 #201’과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적은 메모지 크기의 색연필 데생이 공개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을 쳐다본다. (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정작 먼저 세상을 떠난 건 김환기였다. 1974년
7월 25일, 그는 고층 빌딩이 밀집한 포트체스터의 한 병원에서 뇌일혈로 눈을 감았다. 3관에 전시된 ‘7-VII-74’는 수술을 받으러 병원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손을 보았다는 마지막 작품이다. 자세히 보면 밑그림의 흔적이 희미한 연필 선으로 남아 있다. 참고로 수수께끼 같은 이 숫자들은 뒤에서부터 작품을 제작한 연도(1974년)와 월일(7월 7일)을 뜻한다.

점점이 찍힌 선율, 여름밤의 소리
김환기의 호는 ‘수화(樹話)’다. 좋아하는 글자를 모아 작가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나무와 초목을 뜻하는 한자 ‘수’는 근본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사물의 본질이 하는 말, 자연의 속삭임,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이야기. 184센티미터, 마르고 껑충한 키의 예술가는 태생적 고독 속에서 아득한 고향의 산과 들, 물과 바람의 음파를 화폭에 새겼다. 무수히 많은 점이 색의 공간을 채우면 낮고 희미했던 가락이 점차 뚜렷해진다. 넘실대는 파도의 흥겨운 선율, 굽이굽이 산을 넘는 바람의 울림, 맑고 명랑한 여름밤의 두런거림. 소리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그가 주목한 주제이기도 하다. 신안 섬마을 풍경을 경쾌한 리듬의 추상 화면으로 구성한 ‘론도’(1938)부터 물결처럼 새파란 화면의 상·하단에 작은 오색 점들이 군집한 ‘여름밤의 소리 7-IIII-70 #163’(1970), 동심원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산울림 19-II-73-73 #307’(1973) 등 제목에서부터 이를 알 수 있는 작품이 여럿 있다. 2관 전시장 중심에 놓인 ‘Air and Sound I 2-X-73 #321’(1973)은 이번 전시의 포스터이기도 하다. 공기의 움직임, 마음의 파동과 같은 비가시적 대상을 무수한 점으로 옮긴 그의 그림은 시공간을 잇는 마법의 포털처럼 경이롭다.
미술관을 나와 바다로 향하는데 문득 악동뮤지션의 ‘뱃노래’가 떠올랐다. “귓가에 넘치는 바다/ 눈을 감고 느낀다/ 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항해하는 법을 알아”. 만약 김환기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이들의 노래를 좋아했을까? 그림만큼이나 시를 사랑했던 그는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한다.(<현대문학>, 1957년 1월호, ‘파리 통신’)” 고 말했다.
그가 부르던 노래는 지금도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멀리 파도 소리에 더욱 피치를 올리는 푸르른 노래.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드는 지금, 수화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한 걸음 더
강릉시립미술관 솔올은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 마이어 파트너스가 강릉 씨마크 호텔에 이어 선보인 기하학적 형태의 이 백색 건축물은 방문자에게 건축적 산책을 제안한다. 미술관은 교동 7공원의 산책로와 연결되며, 경사로를 오르면 마주하는 탁 트인 전망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배롱나무가 자라는 안뜰 예술마당에는 얕고 넓은 연못이 있어 휴식을 취하기도 좋다. 가운데 중정이 자리하고, 한옥처럼 세 개의 파빌리온으로 둘러싸인 구조로, 주 출입구와 카페가 위치한 중앙의 투명 파빌리온은 내·외부가 모두 훤히 드러난다. 본래 있던 자연 속에 건물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구조다. 김환기 특별 전시는 오는 6월 29일까지 열린다. 하반기에는 ‘핑크 팬더’ 시리즈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팝아트 작가 캐서린 번하드의 전시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