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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는 집

2025년 02월 08일

  • EDITOR 김수아
  • photographer 김은주

겨울은 숲이 한 해를 치열하게 버틴 흔적이 드러나는 계절이다. 숲 해설가 이서영이 서울 성미산의 나무가 지나온 시간을 들려주었다.

숲에 들어서면 집에 온 것 같다는 사람이 있다. 숲에서 해설하면 집에 손님을 초대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이가 가방에 짐을 한가득 담아 왔다. 손님이 눈앞 풍경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도록 관찰 도구를 하나씩 꺼낸 뒤 차례대로 나무를 소개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숲 해설가 이서영을 만났다.

숲 해설 프로그램 참여자는 관찰 일지를 쓴다.
나무 이름을 붙이고 발견한 특징을 나열한다.

성미산으로 향하는 마음
숲 해설가는 자연과 사람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숲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는지 설명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생태 관련 책을 좋아한 이서영은 도시 곳곳에서 마주하는 나무를 다룬 책 <서울 사는 나무>를 통해 숲 해설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정갈하게 다듬어 실내에서 기르는 식물보다 야생에서 일관성 없이 자라는 식물에 더 흥미를 느낀 그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2021년 자격증을 취득한 후 경기도 과천의 마타리숲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 숲의 매력을 알렸다. 현재 성인 대상 해설 프로그램을 열어 숲을 온몸으로 느낄 방법을 전하고, 자연 재료를 이용한 체험 활동을 진행한다.
이서영 숲 해설가에게 산을 오른다는 건 정상을 향해 가는 여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몇 걸음 가서 나무를 들여다보고 기록하기를 반복하며 숲과 친해지는 게 목적이다. 그러니 꼭 크고 높은 산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가 집과 가까워 즐겨 찾는다는 단짝 같은 산, 성미산을 함께 오르기로 했다.
성미산은 서울 마포구에 자리한 해발고도 66미터의 작고 낮은 산이다. 원래 이름은 성산인데, 배수지 건설 반대 운동을 할 때 성미산이라 불렀고 이후 지역 행사나 언론 보도에 같은 명칭을 사용하면서 성미산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성미산의 ‘미’는 뫼 산(山)의 ‘뫼’가 변한 발음이라 뜻이 중복된 표현이지만 마을 공동체인 성미산마을이 생겨난 지 벌써 30년이 넘은 데다 성미산학교, 성미산마을극장 등 성미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단체가 많아 마포구 주민에게는 성미산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다.

주목은 매우천천히 자라고 오래 산다
사계절 내내 초록빛을 띠는 침엽수다.

저마다의 생존 방식
길지 않은 계단을 오른 후 화살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자연 상태에서 최대 3미터까지 자라는 이 나무는 가지에 코르크질의 날개가 있다. “화살나무는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에 가지에 떫은맛이 나는 날개를 틔워요. 초식동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거죠.” 자극이 많을수록 날개가 발달한다는 특성을 지녀 도시에 심은 화살나무는 숲에서 자라는 것보다 날개가 더 울퉁불퉁하다. 같은 종이라도 주변 환경에 따라 외형이 달라지는 것이다.
상수리나무와 갈참나무에는 시든 잎이 무성하게 매달려 있다. 만지면 바스러질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빳빳한 질감에 광택까지 난다. 두 나무는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여태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그 옆 초록빛을 띠는 잣나무에서도 이 나무만의 특징이 드러난다. 나무는 낮의 길이로 계절을 구분하고 광합성을 이어 갈지 말지 선택하는데, 잣나무는 겨울에도 광합성을 해 양분을 만들겠다 결정한 것이다. 잣나무를 포함한 침엽수는 햇빛을 독점하기 위해 일정한 화학물질을 내뿜어 다른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타감작용을 한다. 고요해 보이는 숲속에서도 끝없는 성장과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진다.
크리스마스트리와 닮은 향나무는 바늘 같은 잎과 비늘처럼 생긴 잎이 함께 자란다. 어릴 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뾰족한 바늘잎이 먼저 나고 7~8년 정도 지나면 부드러운 비늘잎이 달리기 시작한다. “잃을 게 많을수록 가시가 많아요.” 찔레나무 앞에서 숲 해설가가 한 말이 떠오른다. “어린 나무일수록 가시가 많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줄어들어요.” 이 변화에는 더 이상 공격에 쓰러지지 않을 만큼 스스로 단단해졌다는 믿음이 서려 있다. 상처받더라도 회복할 요령이 생긴 게 아닐까. 사람과 나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터줏대감처럼 이곳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나무예요. 사실 이걸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의 발길이 닿은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일본목련 아래 작은 침엽수의 형체가 나타난다. 마치 큰 나무가 아기 나무를 보호해 주는 듯도 하고, 아기 나무가 큰 나무 아래 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옆에 놓인 돌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산에서 가장 큰 나무, 그 아래 자세히 봐야 보이는 작은 나무, 그 옆에 ‘소원’이라 적힌 돌. 이 세 조합이 누군가 꾸며 놓은 장면 같다. 돌을 놓은 이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 한편에 어린 나무가 오래도록 잘 자라길 바라는 진심 어린 응원이 있었을 테다. “건강한 숲이라면 어린 나무가 있고, 죽은 나무가 있고, 높이와 크기가 다양한 나무가 함께 있어요.” 성미산이 건강한 숲을 품었다는 말이다.

성미산에서 가장 큰 나무 아래 몸을 숨긴 작은 나무. 그 옆에 ‘소원’이라 적힌 돌이 놓여 있다.

겨울 숲이 전하는 용기
이서영 숲 해설가가 가방에서 작은 확대경 루페를 꺼내 건넨다. “세상에 똑같은 겨울눈은 없더라고요.” 눈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까. 무릎을 굽혀 전날 내린 눈을 살피려는 찰나, 이서영 숲 해설가의 손이 나뭇가지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내리는 흰 얼음 결정이 아니라 잎, 꽃 또는 가지가 될 나무의 조직을 의미했던 거다. 겨울눈은 낙엽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추위를 대비하기 위해 털이나 부드러운 막이 안쪽을 감싸고, 미끈하거나 튼튼한 비늘이 겉면을 덮는다. 잎자루 안에 겨울눈을 숨기기도 한다. 루페에 눈을 갖다 대고 관찰하자 겨울눈이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올봄, 활짝 피어날 겨울눈의 미래를 상상한다.
이서영 숲 해설가의 또 다른 정체성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때론 숲을 노래하는 ‘싱어숲라이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잠시 쉬어 가는 구간이라 생각했던 겨울, 저마다 다른 생을 계획하는 숲의 풍경이 그에게 큰 감동을 준다. 꾸준하게 자신을 가꾸고 각자 자리에서 버티는 존재를 보며 동력을 얻는다. 숲은 쌓아 온 세월을 증명하면서 음악가 이서영에게 더 나아가라고 자극했다. ‘달리는 마음’이라는 곡이 그렇게 탄생했다. “마른 몸 끝에 달린/ 겨울눈이 터지고/ 봄을 맞는 나무에서/ 그대가 보여요”. 음악가 이서영은 곡을 쓰는 중에 자신도 계속 겨울눈을 만들어 왔다는 걸 깨닫는다. 달리는 마음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었다.
눈이 오고 나면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부러져 땅에 떨어진다. 이서영 숲 해설가는 그다음을 기대한다. 나뭇가지가 잘리면 그 각도로 햇빛이 들어오고, 땅 아래 씨앗은 햇빛을 받아 자라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숲은 더욱 건강해질 거예요.”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꺾이고 부러지더라도 예기치 못한 기회의 싹을 틔울지 모른다. 작은 숲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마주한후, 부푼 마음으로 숲을 나선다.

싱어송라이터 이서영의 작곡 노트.

이서영 숲 해설가가 알려 주는 겨울 숲과 친해지는 방법

● 조금씩 흥미를 붙여야 하니 작고 가파르지 않은 산부터 시작하세요. 서울 성미산과 개운산, 그다음 경기도 소리산을 차례대로 올라도 좋아요.
● 루페, 노트와 따뜻한 차를 담은 물병을 챙기세요. 루페 하나만 있어도 숲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가시나 겨울눈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요.
● 나무 이름을 여러 개 듣다 보면 잊어버리기 쉬워요. 나무를 감상하는 동안 떠오른 키워드를 바탕으로 직접 이름을 붙여 보세요.
● 가지에서 나무의 노력을 떠올리는 과정도 재밌어요. 가지가 어떤 이유로 직선 또는 곡선 형태로 변했을지 상상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