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21세기 정년이, 황지영

2026년 03월 01일

  • WRITER 이미선(문화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황필주

한때 대한민국 대중 예술의 꽃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여성국극. 과거의 찬란한 광휘를 현재로 잇고자 하는 이가 있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이수자이자 여성국극 창작자인 황지영은 여성국극의 멋과 흥은 살리되 동시대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등장인물과 서사로 창작극을 선보인다.

‘두산아트랩 공연 2026’에서 보여 줄 여성국극 <자네는 왜 그리 굉장히 기다란 담뱃대로 담배를 피이나>를 연습 중인 연극배우 한지구와 여성국극 배우 황지영.

여성이 주축이 된 대중 예술
풍문으로 전해 들은 전성기 여성국극의 인기는 지금의 K-팝 아이돌 공연 못지않았다. 티켓을 사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는 것은 예삿일. 몰려든 관객 때문에 공연장 일대 교통이 마비돼 기마경찰이 나서 교통정리를 했고, ‘인생네컷’처럼 여성국극 배우들의 의상과 소품을 갖춘 사진관에서 분장하고 사진 찍는 것이 유행했으며, 인기 배우에게 혈서를 보내거나 가상 결혼식을 올린 팬도 있었다. 여성국극이 뭐길래 그토록 인기를 끌었을까, 그리고 왜 한순간에 사라졌을까.
여성국극은 판소리, 연극, 무용이 한데 어우러진 공연으로 모든 역할을 여성 배우가 맡는다. 창극(국극)의 한 갈래로 보는데, 창을 하는 소리꾼과 북을 치는 고수가 무대를 꾸미는 판소리와 달리 창극은 여러 명의 배우가 배역에 맞는 의상을 입고 무대를 채워 볼거리가 많다. 그러나 1940년대 한국 사회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 여성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국악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뛰어난 여자 소리꾼이 많았지만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1948년 여성 국악인 30여 명이 여성국악동호회를 창립해 여성만으로 이뤄진 국극을 만든 것이 여성국극의 시작이다. 여성국악동호회는 1948년 10월 창립 공연 <옥중화>를 무대에 올렸다. 단원이 모두 여성이었기에 여성 국악인들이 남장을 하고 공연했다. 그리고 이듬해 <햇님과 달님>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던 시대에 여성이 주축이 된 새로운 예술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창작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전쟁의 아픔과 가난의 설움을 위로하는 무대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1950년대다. 6·25전쟁 당시 피란을 다니면서도 공연을 이어 갈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비결은 간단하다. 당시 창극이 판소리 다섯 마당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여성국극은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로 극적인 요소를 더해 볼거리가 풍부했다.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설화나 역사에 뿌리를 둔 창작극부터 해외 문학을 각색한 <청실홍실>(<로미오와 줄리엣> 번안극), <흑진주>(<오셀로> 번안극), <햇님과 달님>(<투란도트> 번안극) 등을 녹여 냈다. 내용은 주로 멜로 드라마로 결말은 해피 엔딩이었다. 그러나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60년대에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영화나 드라마를 집에서 볼 수 있게 되자 공연장을 찾는 이가 줄었다. 정부 지원 아래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1962년 국립창극단이 설립됐지만, 여성국극은 전통문화로 지정되지 못했고 문화 예술계에서도 소외되었다. 여성국극단 내부 분쟁과 함께 우후죽순 극단이 생겨나면서 수준 미달의 공연을 하게 되어 인기가 식었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결혼과 출산으로 무대를 떠나야 했던 배우들의 사정도 있었다. 무대를 만드는 인력은 국립창극단으로 옮겨 갔고, 일부에서는 여성국극을 창극사의 수치로 취급하며 흔적 지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여성국극의 맥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전성기를 이끈 1세대 배우들은 꺼져 가는 불씨를 되살리려 노력했고, 그들의 공연을 보며 자란 2세대 배우들을 키워 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90세가 넘은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 조영숙 명인.

여성국극의 새로운 가능성
공연 예술 분야의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두산아트랩 공연’이 시작됐다. 올해는 신진 예술가 8팀의 실험적인 무대 중 여성국극 <자네는 왜 그리 굉장히 기다란 담뱃대로 담배를 피이나>가 포함됐다. 작품을 만들고 공연할 황지영은 3세대 여성국극 배우이자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이수자다. 여덟 살 때 우연히 판소리를 접하고 아홉 살 때부터 판소리와 창극, 여성국극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의 스승은 1세대 여성국극 배우 조영숙. 이번 공연에서 황지영은 작가, 연출, 작창, 연기를 맡아 올라운더로 활약한다. 1950년대 6·25전쟁을 겪은 세대를 위로했던 여성국극이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공감을 전할 수 있을까. 시대를 풍미한 여성국극의 과거와 현재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미래를 고민하는 황지영 배우를 만났다.

전통과 실험 사이에서 현대 여성국극의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황지영 배우.

두산아트랩에서 여성국극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지원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동시대 관객과의 접점을 찾고 싶었어요. 두산아트랩 공연 사업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2022년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에 출연하면서 더 관심을 갖게 됐어요. 집 안 곳곳에 신이 있다는 제주도 무속 신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판소리 합창이었는데,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과 즐겁게 작업했거든요. 그러면서 막연하게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공연을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여성국극의 여성 역할을 탐색하는 작품을 구상했고, 기왕이면 신진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실험적인 시도에 열려 있는 두산아트랩에서 공개하고 싶었죠.

제목이 재미있어요. <자네는 왜 그리 굉장히 기다란 담뱃대로 담배를 피이나>는 어떤 작품인가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여성국극 배우인 저와 조영숙 선생님, 그리고 춘향, 선화, 평강, 낙랑 등 여성국극 속 여성들이 등장해요. 제가 맡았던 역할이기도 하죠. 여성국극 속 여성을 연기하면서 그들에게 공감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었어요. 예를 들어 전통적인 여성국극은 로맨스 지향적이에요. 남성의 성공을 소망하며 자신을 희생하고, 성공해서 돌아온 남성과 사랑을 완성하는 스토리가 많죠. 동시대 여성과는 차이가 있어요. 따라서 저는 전통성에 갇혀 드러내지 못했던 여성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목의 ‘기다란 담뱃대’는 제가 여성국극을 하면서 보낸 시간을 의미해요. 여성국극을 배우면서 여성국극과 함께 성장해 온 시간, 전통적인 배역을 연기하면서 동시대 여성으로 성장한 저와 캐릭터 사이의 거리감을 아우르는 표현이에요. 이 작품에서는 여성국극 속 여성을 연기하며 제가 그들과 거리를 좁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때로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동일시하는 과정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여성국극이 전통적으로 그려 온 완성된 사랑의 결말을 동시대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에서 “여자가 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 여자는 더 여자스러워야 된다”고 했던 김성예 선생님의 말씀에 대한 답변처럼 느껴지네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에게 ‘여성스러움은 무엇이며 남성스러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여성국극 속 여성의 역할과 실제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고, 의구심도 들었어요. ‘모든 역할을 여성이 연기하는 여성국극 안에서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을 찾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라는 생각도 했고요. 물론 그것이 여성국극의 재미 중 하나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요. 중요한 건 제가 여성국극을 통해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을 정의할 수 없다는 걸 체감했다는 거예요. 젠더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반복되고 학습된 행위라고 생각하니까요. 이러한 방향성이라면 이분법적인 성별을 가지고 노는 것 자체가 여성국극의 매력 아닐까요.

첫 장면에 담배 피우는 춘향이가 등장해요. 우리가 알던 춘향이와 거리가 있어요.
판소리하는 선배님께 지금 전승되는 판소리 <춘향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춘향가> 이본에는 춘향과 이몽룡이 서로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별하는 장면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춘향가>에는 왜 수절하는 춘향이만 있고 담배 피우는 춘향이는 없을까, 반발심이 들었죠. 삭제된 장면을 살려 관념화된 성 역할을 뒤집어 보고 싶었어요.

여성국극과 창극은 어떻게 다른가요?
여성국극과 창극 모두 판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여성국극은 여성 배우만으로 무대를 만든다는 뚜렷한 정체성이 있죠. 그 점을 제외하면 지금의 창극과 여성국극은 비슷한 점이 많아요. 물론 초기에는 완전히 달랐어요. 과거 창극은 판소리 다섯 마당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여성국극은 전통 국악에 현대 연극을 결합해 서사 중심으로 발전했어요. 전통을 따르는 판소리는 가사가 어렵고 독특한 발성 때문에 알아듣기 힘든 반면, 대중 예술을 지향하는 여성국극은 가사에서 한자어를 빼고 현대어를 받아들이는 등 쉬운 언어로 만들었어요. 의상 역시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수입 원단을 사용하는 등 변주를 했고요. 이야기도 해외 유명 소설이나 오페라, 연극을 번안한 작품이 많죠. 그래서 머리가 복잡해요. 과거에는 여성만으로 구성한 무대가 특별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아서, 동시대 관객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여덟 살 때 판소리를 배우면서 여성국극을 접했다고 들었어요. 한눈판 적은 없나요?
저는 판소리와 여성국극을 동시에 접했어요. 두 장르를 구분하지 못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친구들을 통해 판소리와 여성국극이 다르다는 걸 알았죠. 혼란스러웠지만 여성국극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일찍 시작한 덕에 저는 1세대 선배님들의 공연을 보며 자랐으니까요. 그 경험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생경하면서 잊을 수 없는 두근거림,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어요.

여성국극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무거울 텐데, 도망치고 싶은 때는 없었나요?
2019년 대학원에 입학해 문화유산학을 공부했는데, 사실 그게 도망친 거였어요. 더 이상 무대에 설 자신이 없었거든요. 누구도 지적하진 않았지만, 무대 위 저 자신이 더 이상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무대를 떠날 수는 없으니 공부를 핑계로 잠시 거리를 둔 거죠. 문화유산과 전통 연희는 결이 같다고 여겼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연구자들 사이에 있으니 저는 타고난 광대더라고요. 연구자로서 벽을 느꼈지만, 공부는 재미있었어요.

지금은 독립했지만, 박수빈 배우와 여성국극제작소를 설립한 것도 2019년이죠.
당시 저희의 화두는 여성국극의 확장이었어요. 박수빈 선배와 함께 고민했고, 결국 우리가 하고 싶은 공연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해 여성국극제작소를 결성했죠. 그러다 코로나19가 확산됐고, 설 수 있는 무대가 사라졌어요. 이대로 무대에 오를 수 없다면 오랫동안 소망했던 일을 해 보자고 뜻을 맞췄어요. 이전에는 조영숙 선생님 곁에 머물면서 대작이나 전통과 닿아 있는 작품 위주로 공연을 했어요. 모든 공연이 소중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동시대와 닿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어요.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건 자본의 문제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적은 자본으로 작은 공연을 지속적으로 올리면서 여성국극의 다양성을 보여 주고 가능성을 실험해 보자고 생각한 거죠. 여성국극제작소를 통해 창작극을 만들기도 하고, 대작을 무대에 올리기도 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여성국극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여성국극은 자유로워요. 저는 다양한 장르의 무대 예술을 사랑하고, 모두 도전해 보고 싶어요. 그래서 장르를 넘나들며 재미있는 작업을 해 봤는데, 어느 것이든 여성국극이 묻어나더라고요. 이번 작품은 연극하는 한지구 배우와 호흡을 맞춰요. 전통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동료가 필요했어요. 음악적 요소는 제가, 연기 분야는 한지구 배우가 리드하며 극의 완성도를 높여 가고 있어요. 그런데 1950년대에도 연극배우들이 여성국극 무대에 섰다는 기록이 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국극은 유연하고 자유로웠던 거죠.

조영숙 선생님은 여성국극의 무형문화유산 지정을 소망한다고 하셨어요. 여성국극 창작자이자 배우인 황지영의 꿈은 무엇인가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는 것은 여성국극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하지만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보호라는 명목하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기 어려워질까 봐 걱정되기도 해요. 여성국극 실연자로서 문화유산 전승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게 저의 꿈이에요.

<자네는 왜 그리 굉장히 기다란 담뱃대로 담배를 피이나>
9세 때부터 여성국극 무대에 오른 3세대 배우 황지영이 그동안 맡아 온 여성국극 속 여성 역할의 인물을
탐색하는 작품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창작극이다.
기간 3월 19일 ~ 21일
장소 서울 두산아트센터

헤어·메이크업 전성애 촬영 협조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