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흙의 오디세이

2026년 02월 01일

  • WRITER 오유리(문화 예술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서송이

한 사람의 예술가가 오직 하나의 재료로 펼쳐 보일 수 있는 세계는 얼마나 넓고 깊을까.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 신상호가 흙으로 빚어낸 60년의 장대한 여정, <신상호: 무한변주>전에서 그 답을 마주할 수 있다.

한국미의 극치를 보여 주는 분청에 호방한 회화적 표현을 더해 새로운 경지를 드러낸 ‘분청’, 1990~1994, 혼합토, 상감, 귀얄.
2부 ‘도조의 시대’ 섹션에서는 ‘꿈’ ‘아프리카의 꿈’ 연작을 위해 만든 다양한 동물 습작을 볼 수 있다.
새와 말, 소, 돼지뿐 아니라 공룡, 펭귄, 미지의 동물까지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흙으로 빚어 놓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봄에는 벚꽃 대궐, 가을에는 단풍 터널, 눈이 내리면 겨울 왕국이 되는 드라이브 코스가 일품이다. 가는 길목의 놀이공원이나 ‘미술관 옆 동물원’에 들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야 하는 게 고역인데, 도착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의 번잡함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 청계산 자락 허리에서 만나는 이 시대 근현대 미술의 정수! 이곳은 신년에도 다양한 관람객으로 출렁이고 있다. 방학을 맞아 미술관을 찾은 학생들은 30여 년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상징이자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배경으로 SNS용 사진을 찍는 데 열중하고 있고, 전을 통해 최근 공개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앞에는 새해 첫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하지만 올겨울 과천의 주무대는 도예 작가 신상호의 대규모 회고전 <신상호: 무한변주>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역대 최대 규모의 도자 작가 개인전입니다. 도자 작가로는 최초로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모두 사용해요. 무려 3300제곱미터(약 1000평)가 넘는 공간을 감당하려면 작품 수뿐 아니라 내용도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데, 신상호 작가의 독자적인 창작 세계가 그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1년 반의 준비 기간을 거쳐 도자 작품 90여 점과 아카이브 70여 점을 선정했고(개별 작품 수로 따지면 족히 600점이 넘는다!) 작품의 범주와 시대적 전개에 따라 다섯 개의 공간으로 나누었으며, 작품을 배치하는 데 기중기까지 동원하는 ‘특급 작전’을 실행했다. 그렇게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 신상호의 도자, 60년간의 실험과 도전의 여정이 여기 과천에 펼쳐졌다.

3부 ‘불의 회화’ 섹션에서 소개하는 ‘구운 그림’ 도자 타일. 작가는 도자와 건축의 결합 가능성을 실험하는 한편, 구워서 표현할 수 있는 깊고 아름다운 색감으로 흙의 쓰임새를 넓혔다.
어두운 색 안료를 입혀 흙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 ‘꿈’ 연작 중 ‘꿈-머리’, 1991, 혼합토.
4부 ‘사물과의 대화’ 섹션에서는 작가가 아프리카, 중국, 영국 등 세계 곳곳을 방문해 수집한 공예품을 전시한다. 작가에게 수집은 단순한 취미나 장식이 아니라 창작의 원천이고, 작가는 이질적 요소들을 결합해 특유의 조형 언어로 확장했다.

흙, 전통과 창조 사이
결론부터 말해 보자. 작가는 폭넓은 스펙트럼과 호방한 기개로 이 압도적인 공간을 거뜬히 장악했다. 돌이켜 보건대 신상호의 일대기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 도예의 역사라 할 만하다. 1965년 홍익대학교 공예학부에 입학한 작가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 경기도 이천의 열다섯 칸 규모 가마를 인수해 ‘도방요’라 이름 짓고 직접 운영했다. ‘도예’라는 말이 있기는커녕 흙을 만지면 모두 ‘옹기장이’나 ‘가마장이’라 부르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는 순수 미술을 공부하는 예술학도로서 현대를 추구하고, 이천에서는 큰 규모의 가마를 운영하며 전통을 배워나갔다. 평생 고려청자의 비색을 연구한 해강 유근형 선생부터 실습하는 대학생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도방요의 가마를 빌려 자기를 구웠다.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면 그 시절, 젊은 신상호가 만든 전통 자기가 관람객을 맞는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에서 한국 전통 도자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늘었던 그때, 유구한 전통에 작가적 미감을 더해 현대성을 추구한 도방요의 청자와 백자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전시장 한편에서 홀연히 기품을 뿜어내는 달항아리, 오동나무 상자와 짝을 이룬 ‘청자상감운학문병’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컬렉터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시장 한복판에 무리 지어 있는 분청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오라를 발산하는 관람객의 혼을 쏙 빼 놓는다. 자세히 보면 새, 물고기, 풀 같은 자연물을 그려 넣었는데, 전통적 분청 기법을 따르면서도 호방한 선과 자유분방한 터치 덕분에 현대미술 회화를 보는 듯 경쾌함을 안겨 준다. 항아리를 캔버스 삼아 흙으로 그린 단색 추상화라고 할까. 한국미의 극치를 보여 주는 분청을 재료로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선보이는 원숙한 균형감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두 번째 방에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1980년대에 이르러 작가는 강렬했던 전통 도자의 환희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용기의 기능을 넘어서 도자를 조각·회화·건축적 요소가 결합된 예술로 확장하려는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흙이라는 재료를 쓰는 것 말고는 표현 방식도, 주제도, 기법도 완전히 다른 도자기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 작업을 ‘도조’라고 이름 붙였다. 사방이 흰 벽이던 이전 전시실과 달리 이 공간에는 레드와 블루의 강렬한 조명 아래 다양한 생명체를 형상화한 도조가 펼쳐진다. 모노드라마 무대를 구성하듯 감상을 극대화하는 조명 덕분에 말과 새, 돼지와 상상 속 동물까지 작품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듯 존재감을 드러낸다.
1990년대 영국 왕립예술대학 초빙교수를 지낸 신상호는 <아프리카: 대륙의 미술>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리카 미술과 한국 토속 미술이 기복 신앙의 맥락에서 닿아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인간의 창조 행위가 문명 이전의 신화적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이 강한 예술적 동기를 부여했다. 작가는 흙이야말로 이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물질이라 확신했다. 이후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마주한 생명력과 원초적 힘, 야생동물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을 표현한 ‘아프리카의 꿈’ 연작을 이어 간다.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구조와 힘-이드’ 앞에서 유독 많은 관람객이 걸음을 멈춘다. 새인지 미지의 생명체인지 단정하기 어려운 비정형의 구조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조각적 리듬을 구현하는 여러 개의 다리가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20여 마리의 새 무리가 석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듯한 설치 작품 또한 절묘하다. 생생하다 못해 공포감마저 안겨 주는 이 생명체들이 오로지 흙으로 만들어져 불구덩이 속에서 구워진 도자라니, 게다가 앞서 목격한 청자와 분청의 시간으로부터 연속된 세계라니!
한 미술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신상호는 ‘전통과 창조 사이의 세계’에 존재했다. 덕분에 언제나 경계인이었다. 순수 미술 쪽에서는 도예가라고 선을 긋고, 도예 쪽에서는 되레 전통을 벗어났다고 타박했으니 두루 억울했을 테지만, 작가의 타고난 기질을 막지는 못했다. 작가 노트를 통해 “나와 새로운 대상이 합일을 이루기를, 아무 데도 없는 것을 세상에 내놓고 나 자신 역시 이전의 나를 탈피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그대로, 신상호는 새로움을 향해 묵묵히 전진해 왔다.

3부 ‘불의 회화’ 섹션에서 소개하는 ‘구운 그림’ 도자 타일. 작가는 도자와 건축의 결합 가능성을 실험하는 한편, 구워서 표현할 수 있는 깊고 아름다운 색감으로 흙의 쓰임새를 넓혔다.

무한 변주, 끝나지 않을
다음 여정은 건축의 세계였다. 2000년대에 이르러 작가는 ‘구운 그림(fired painting)’ 타일로 도자와 건축의 결합을 시도했다. 50×50센티미터 크기의 도자 타일을 색색으로 구워 내 반영구적 건축 외피로서 도자의 응용 가능성을 실험한 것인데, 이를 위해 벽면의 표피를 감싸면서도 분리와 재설치가 가능한 탈착 체계를 직접 설계했다. 지금으로 치면 참으로 ‘인스타그래머블’했을, 센트럴시티 터미널의 ‘밀레니엄 타이드’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금호아시아나 사옥(현 콘코디언 빌딩), 서초 삼성타운 등의 대형 외벽 프로젝트가 그렇게 탄생했다.
미술관에서 직접 마주하는 구운 그림의 백미는 다름 아닌 ‘색’이다. 붓칠이나 실크스크린 같은 회화적 색감을 완벽하게 구현한 도자의 세계는 낯설고도 아름답다. 작가는 “작품을 하며 크기가 자유로워지니 그다음에 색의 중요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봄이 오면 자연 속에서 연둣빛이 드러나니 그 빛깔이 봄의 언어지요. 이런 색을 도자에도 마음껏 구현하고자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안료와 유약의 배합, 소성 온도에 따라 구현되는 색이 달라 하나의 타일을 5회 이상 구워 완성했기에 색마다 질감도 다르다. 그래서 이 전시장에서만큼은 구운 그림을 관람객이 직접 만져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이 또한 도자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확장해 온 ‘신상호다운’ 장면이다.
작가에게 마르지 않는 예술적 영감을 주는 수집품이 가득한 방을 지나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전시실에는 ‘흙의 끝, 흙의 시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2017년부터 이어 오고 있는 도자 회화 연작 ‘생명수’와 ‘묵시록’은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가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저 ‘흙으로 그린 그림’이다. 전통 자기로 시작해 조각과 설치를 거치고, 불과 유약과 도료를 정복한 작가는 이제 평면 앞에 서서 아크릴물감을 들었다. 주인공은 지난 40여 년간 작가의 부곡 스튜디오 입구를 지켜 온 느티나무다. 생명의 순환을 은유하듯 무성한 가지, 가랑잎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 계절이 지나면서 이파리가 떨어지는 모습 등을 작가의 원숙한 시선으로 담아낸 작품들이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인 채 명상적 체험을 선사한다. 60여 년간 탐구해 온 ‘조각과 회화의 통합’이자 흙을 통한 색채 실험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오대양을 항해하듯 다섯 개의 방을 지나 중앙 홀에 이르면 대형 설치 작품 ‘아프리카의 꿈-토템’이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높은 층고와 조형적인 계단, 육중한 기둥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도열한 백색 동물 무리에 압도되어 사색하며 머무르게 되는데, 관람객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듯 신비롭고 매서운 눈빛이 압권이다.
신상호의 무한 변주를 관통하는 것은 오로지 흙이다. 그릇과 항아리, 동물과 사람, 회화와 조각, 단색과 원색,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쉼 없이 변주하는 가운데서도 주인공은 언제나 흙이었다. “흙은 지구상에서 고갈되지 않는 근원적인 물질이에요. 여기에 인간의 아이디어가 결합되면 대단한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믿음으로, 흙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흙 고르기부터 땔감 구하기, 물레를 돌리고 불을 댕겨 구워 내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해냈던 그 옛날 도공의 숙명 그대로, 작가 역시 평생을 쉼 없이 연마했을 터다. 그렇게 만들어진 넓고 깊은 세계에서 관람객은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수련을 보러 왔다가 신상호의 자기에 홀려 몇 시간을 머물다 간다”라는 리뷰가 달리는 이유다.

© 국립현대미술관

신상호
한국 현대 도예를 이끌어 온 대표 작가로 60여 년간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1960년대 경기도 이천에서 장작 가마를 운영하며 도예의 길로 들어선 이후, 시대의 변화와 예술적 탐구심을 따라 도자의 경계를 확장하며 대담한 도전과 예술적 실천을 이어 왔다. 도자 조각, 건축 도자, 타 매체와 결합한 오브제, 도자 회화 등 폭넓은 창작 스펙트럼을 보여 주며 도자의 회화적·조각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더불어 국제 공예 비엔날레 등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한국 도자 예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