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날기를 포기한 도도새는 포식자가 나타나자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회가 정한 틀에 갇혀 자유롭지 못했던 김선우 작가는 멸종된 도도새를 찾아 날개를 달아 줬다. 이제 작가의 그림 안에서 되살아난 도도새가 김선우 작가를 자유롭게 한다.

먼저 말을 건넨 건 김선우 작가였다. 서점을 서성이다 낯익은 그림이 그려진 책을 한 권 발견했다. ‘도도새 작가’라 불리는 김선우의 에세이 <랑데부>였다. 작가 앞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무명’이란 수식을 떼어 내고, 도도새를 만나 전업 작가가 되는 과정을 여행에 빗대어 표현한 글로 시작되는 에세이였다. 조심스럽게 그가 건네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소개서 같기도 하고 작품 해설집 같기도 한 에세이에서 작가는 자신이 가진 모서리(예민함)를 모나지 않게 지키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그가 학창 시절부터 새를 그렸고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새 인간과 도도새의 운명적 만남
김선우 작가는 지금 대한민국 미술 시장에서 가장 ‘폼’이 좋은 젊은 작가 중 하나다. 젊은 컬렉터들이 줄 서서 구매한다는 도도새 연작은 2019년 경매에서 540만 원에 거래됐지만, 2년 새 20배 가까이 올라 2021년 경매에서 1억 1500만 원에 낙찰된 바 있다. 작가가 도도새를 만난 과정은 성장 소설의 서두 같다. 2014년 겨울, 김선우 작가는 졸업 전시를 마치고 냉기가 감도는 실습실에 앉아 조급한 마음으로 공모전에 낼 지원서를 작성했다. 작가가 계획한 여행을 실현해 준다는 파격적인 부상이 걸려 있었다. 그때까지 작가는 새를 그리고 있었다. 인간의 몸통에 새의 머리를 가진 ‘새 인간’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사회가 정해 놓은 틀에 갇혀 살아야 하는 갑갑한 현실을 자유로운 새가 날개를 잃고 인간의 몸속에 갇힌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첫 개인전 제목 역시 <새鳥상>이었다.
작가는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도도새에 대해 알게 됐다.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에 살던 도도새는 천적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에서 날아다닐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스스로 날기를 포기했다. 날지 못하는 새로 퇴화한 도도새는 결국 인간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17세기 말에 멸종했다. 스스로 날기를 포기한 도도새는 김선우 작가가 그려 온 ‘새 인간’과 닮았다. 도도새의 운명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한 작가는 도도새가 아직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한 달 동안 도도새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는 여행 계획을 제출했고, 이것이 당선되어 2015년 모리셔스로 떠났다. 이 경험은 작가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김선우 작가는 그림에 도도새와 함께 자유와 가능성,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한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횃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거나 배를 타고 표류하고, 평화롭게 누워 풍류를 즐기거나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작가의 그림 안에서 도도새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몸에 갇혀 있던 작가도 도도새를 만나 그림 안에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탐험가로 살고 있다.

아트 컬래버레이션 굿즈.


최상급 카카오를 쫓는 도도새의 여정을 담았다.
현대인의 자화상이 된 도도새
현실에 안주하며 꿈과 자유, 개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도도새에 투영하고, 멸종된 도도새를 작품 속에서 다시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그리며 꿈과 희망을 잃지 말자고 전하는 작가의 메시지는 미술 평론가와 컬렉터 그리고 관람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작가는 2016년 젊은나래청년작가상, 2018년 아트인블록 크리에이티브 콘테스트 장려상, 2019년 삼성 BESPOKE랑데뷰 디자인 공모전 우수상 등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불가리, 스타벅스, 테라맥주, 리카솔리 와이너리, 가나초콜릿 등의 브랜드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협업 작품은 출시될 때마다 완판을 기록했다. 그렇게 도도새는 멸종한 새가 아닌 작가 자신이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됐다.
김선우 작가는 매우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매일 오전 5시 작업실에 출근해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예술 공무원’이라고 부를 정도다. 사람들은 창작자의 감각이나 재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인간을 다음 단계로 성장시키는 것은 성실함이다. 성실함의 근원은 불안이라고 말하는 김선우 작가를 서울 이화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에세이 <랑데부>를 읽고 내적 친밀감이 최대치에 달한 상태입니다.
오랫동안 일기를 썼어요. 요즘은 블로그에 비공개로 저만 볼 수 있게 쓰곤 하죠. 에세이도 거기서 발췌한 글을 모아 편집한 거예요. 책을 쓰면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 나를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쓰면서 외려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저는 굉장히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인데, 강한 체하면서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 거죠.
약한 면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글쓰기는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작업을 설명하는 설명서이자 변호 장치예요. 작품 해석과 감상은 관람객의 몫이지만,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변호를 해 주는 수단인 거죠. 작가의 생각을 약속된 언어로 전달하면서 관람객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아요. 동시에 작업 과정이기도 해요. 저에게 글쓰기는 파편처럼 존재하는 생각을 모으고 다듬어 구체화하는 과정이에요. 내가 지금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제 마음을 알아채고 이해하는 거죠. 미술은 형태 없는 생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저에게 문자로 쓴 드로잉이라 할 수 있어요.
별명이 ‘예술 공무원’이라면서요.
부모님은 제가 안정된 직업을 갖길 원하셨어요. 작가의 길을 택했을 때 부침이 많았죠. 학교를 휴학하고 학습지 회사에서 삽화 그리는 일을 했었고, 부모님 권유로 교육학 석사 학위도 취득했어요. 그런데 제 길이 아니더라고요. 작가의 길을 확신한 것도 아니었어요. 성실하게 노력한다고 해서 보상이 따르는 직업이 아니니까요. 이름이 제법 알려진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고 내일의 나를 알 수 없어요. 규칙적인 생활은 불안을 다스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해요.
새와 자유, 모두 오래된 화두였군요.
작가가 오랫동안 작업을 지속하려면 삶을 관통하는 주제를 찾아야 해요. 종종 사람들이 ‘언제까지 도도새만 그릴 거냐’고 물어요. 여러 의도가 있겠지만, 한 가지 작업만 하는 것이 지루하지 않냐는 이야기일 거예요. 누군가는 도도새만 그리는 제 작업이 진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오랫동안 고민했던 주제, 제 삶의 화두와 일치하기 때문일 거예요.
11년째 도도새를 그리고 있는데, 그 안에서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주제는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멸종된 도도새의 운명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했고, 이 상징적인 존재를 통해 꿈과 자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굳이 변화를 찾자면, 작품 주제와 배경에 따라 도도새가 여행한 영토가 넓어졌다는 정도일 거예요. 물리적 장소뿐 아니라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도도새가 다니는 영토 자체가 엄청 넓어졌죠. 저에게도 변화가 있어요. ‘사회는 사람들을 똑같이 제조하는 공장이고, 사람들은 부품 같다’는 생각을 전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니 초기에는 매우 전투적이었어요. 하지만 도도새를 그리면서 저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마음이 뭉툭해졌어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형태로 바뀌는 거죠.
도도새를 찾아 모리셔스를 탐험한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원래 여행을 좋아했나요?
어릴 때 꿈은 여행 칼럼니스트였어요. 초등학생 때는 세계 지도를 보면서 낯선 곳을 상상하곤 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방송국에서 ‘청소년 시베리아 탐험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부모님 몰래 지원했는데 뽑혔어요. 초등학생과 중학생 8명으로 구성된 탐험대가 시베리아 오지를 탐험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게 된 거죠. 일반 여행자가 접근할 수 없는 보호구역에 들어갔고,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배웠어요. 며칠 지나자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아이들이 생겼는데, 저는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어 며칠 더 있고 싶었어요. 대학생 때는 교환학생으로 유럽을 갔고, 틈만 나면 이웃한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어요. 졸업 후에도 시간이 생기면 여행을 했고요. 그래서 여행하는 직업을 갖고 싶었는데, 작가가 되어 여행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여행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해요.
레지던시 작가로 선발되면 그림 도구를 들고 다니며 정말 성실하게 예술 공무원처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려요. 목적 없이 떠난 여행에서는 주로 글을 쓰고요. 가끔은 나에게 왜 여행이 필요한지 생각해 봐요. 저는 예민한 사람이고 작업하면서 굉장히 날카로워지는데, 여행을 하면 너그러워져요. 뾰족하고 날카로웠던 면이 둥글게 다듬어지는 느낌이에요. 내가 겪는 상황이나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 모두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관용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요.
작품은 귀엽고 평화로운 분위기인데, 의외네요.
과정까지 평화로울 순 없으니까요. 거대한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울 때가 있어요. 빈 화면을 채우려면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니까요. 그림 그리는 일은 고통인데, 고통의 원인은 제가 완전히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래서 작업 과정은 정신 수양에 가깝고, 하고 싶은 이야기로 조금씩 캔버스를 채우면서 마음을 보듬어요. 전시를 앞두고는 더 예민해져요. 평가받는 자리니까요. 그래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작업실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집에서는 되도록 느리게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러닝을 하는 이유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숫자로 나오기 때문이고, LP를 듣는 이유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 취향을 훔쳐가 나의 취향이라고 알려 주는 데 대한 반발감 때문이에요.
하반기 전시 스케줄이 빽빽하다고 들었습니다.
7월 29일부터 11월 23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현대미술 기획전 <그리고, 하루(The Days We Draw)>에 참여하고, 8월에는 타이베이의 소카 아트(Soka Art) 갤러리에서 첫 해외 개인전 을 열어요. 9월에는 도쿄 긴자의 쓰타야 서점에서 개인전 를, 10월에는 제주도에서 개인전 <수관기피>를 열 거예요. 각기 다른 주제로 작업한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도도새가 한국을 떠나 낯선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