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호찌민의 젊은 동네

2025년 07월 23일

  • WRITER 류진(헤이! 트래블 기자)
  • PHOTOGRAPHER 전재호

스물두 개 군으로 나뉘는 베트남 호찌민의 동네들은 도시가 지나온 근현대의 서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중 가장 빠르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변화하는 젊은 동네 1·2·3군을 탐색했다.

Quan 1

젊은이들이 점령한 도심 한복판의 따오단 공원.
감각적인 바와 카페 등이 층마다 들어선 건축물, 똔텃담.
1군은 식민지 시대의 근대건축물과 고층 건물의 루프톱 바가 한 프레임에 담기는 동네다.

MZ세대의 아지트, 1군
호찌민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현지인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요즘 이 도시에서 핫한 동네가 어디예요?” “로컬들만 아는 힙한 장소가 모여 있는 곳이 있나요?” 젊고 새로운 장면을 포착해야 하는데, 온라인 어디에도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동네’ ‘호찌민의 브루클린’ 같은 검색어에 준하는 답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갖은 인맥을 동원해 찾아낸 후 잘로(Zalo, 베트남의 메신저 앱)에서 대화를 나눈 젊은 로컬들, 길거리에서 만난 20대들이 내게 준 답은 1군. 호찌민 중앙 우체국, 사이공 노트르담 대성당, 벤타인 시장 같은 명소가 운집한 관광 1번지다. 애초에 취재지 후보에 올릴 생각도 없었던 곳을 자꾸만 들이대는 호찌민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건 나였다. 호찌민의 명소 중 하나인 벤타인 시장에서 고작 1.8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거리, 틱톡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허름한 건물을 끊임없이 들락이는 모습을 보며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삼합회 아지트 같은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 손에 쥔 주소는 ‘14 똔텃담(14 Ton That Dam)’. 통역을 도와준 대학생에게 “카페, 바, 숍이 들어서 있는 오래된 아파트예요”라는 설명과 함께 받은 이정표다. 칠흑같이 어두운 입구 앞에서 들어가길 주저하자 배달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끽연을 즐기던 아저씨가 턱을 치켜든다. 그의 눈이 “믿기지 않겠지만 네가 찾는 데가 맞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두려움을 뚫고 벽을 더듬으며 계단을 올랐다. 용기를 낸 외국인 앞에 펼쳐진 놀라운 장면. 성수동 뺨치는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와 기발한 스피키지 바, 벽을 가득 채운 그라피티와 각기 다른 상호가 쓰인 십수 개의 간판, 그 안에서 술 또는 커피를 마시거나 노트북 작업을 하는 잘 차려입은 젊은 무리.
호찌민 곳곳에 길게는 100여 년, 짧게는 50~60년 된 오래된 아파트에 젊은 예술가, 바리스타, 셰프, 디자이너들이 둥지를 튼 ‘아파트 카페’가 있다. 미디어에서 종종 ‘젊고 현대적인 호찌민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묘사하는 이 독특한 복합 문화 공간의 상당수가 1군에 몰려 있다. 그래서 호찌민의 MZ세대가 내게 줄곧 1군을 부르짖은 것이다.
관광객이 사이공 노트르담 대성당만큼이나 유명해진 응우옌후에 거리 42번지(42 Nguyen Hue)의 아파트 카페를 배회할 때 로컬, 정보 검색에 능한 외지인은 좀 더 뒷골목에 자리한 아파트 카페를 찾는다. 로컬 패션 브랜드가 몰려 있는 쇼핑센터 뉴 플레이 그라운드(New Play Ground)와 함께 자리한 26 리뚜쫑(26 Ly Tu Trong), 호찌민 기차역을 개조한 9월 23일 공원(Cong Vien 23 Thang 9)에서 가까운 35 응우옌반짱(35 Nguyen Van Trang)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더 많은 아파트 카페가 복잡한 미로 같은 1군 골목 곳곳에 숨어 있지만 베트남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 까닭을 35 응우옌반짱 2층에 자리한 문방구 점원에게 들었다. “이런 아파트들이 너무 유명해지면 건물이 시끌벅적해지고, 그럼 언제든 찾아와 조용히 쉴 수 없기 때문이에요. 특히 이런 아파트엔 상점뿐 아니라 이곳에서 오래 산 주민들의 집도 있거든요. 서로의 사생활과 휴식을 위해 다들 쉬쉬하는 거죠. 나만 알고 싶어서요.”

Quan 2

호찌민의 MZ 인플루언서들이 즐겨 찾는 맛집 짠짠 누들. 베트남의 국민 배우와 스타 셰프 부부가 지난 4월에 문을 연 채식주의자를 위한 누들 바다.
세련된 인테리어, 영문 포스터, 거리에 앉아 햇빛 샤워를 즐기는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곳이 타오디엔이다.

쾌락주의자의 주말 놀이터, 2군
사이공강(Saigon River) 건너편에 자리한 2군의 정체성을 만든 건 이 지역에 모여 사는 2만여 명의 외국인 거주자다. 그들의 취향이 집결된 동네가 바로 2군에 자리한 타오디엔(Tao Dien). 낡은 옛 건물과 매끈한 초고층 빌딩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1군의 다듬어지지 않은 풍경과 달리 타오디엔 거리엔 노랑, 분홍, 연파랑, 연두 같은 고운 색 페인트를 입은 외벽과 온갖 세련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간판으로 행인의 시선을 빼앗는 상점이 즐비하다. 쨍한 주황 타일로 꾸민 외벽, 노란 의자, 그 옆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야자수가 어우러진 풍경이 아이돌 가수의 뮤직비디오 세트 같은 짠짠 누들(ChanChan Noodle)은 그중 가장 눈에 띈다. ‘비건 누들 바’를 콘셉트로 한 이 식당은 요즘 호찌민 인플루언서들이 앞다퉈 찾아오는 명소다. 밀려드는 손님을 응대하느라 바쁜 홀 매니저를 붙잡고 그 까닭을 물었더니 돌아온 답. “베트남의 스타 셰프 후이쩐(Huy Tran)과 영화배우 응오타인번(Ngo Thanh Van)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거든요. 예쁜 인테리어도 인기에 한몫하지만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기 때문이죠.” 해외엔 베로니카 응오(Veronica Ng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배우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올드 가드> 등의 영화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슈퍼스타다. 채식주의자인 그가 셰프인 남편과 함께 레시피를 개발해 선보이는 음식은 달걀, 우유, 꿀까지 제한하는 비건의 규칙을 철저히 따른다. 땅콩버터와 버섯으로 만든 XO 소스로 매콤한 맛을 낸 비빔당면, 토마토·시금치·고추 등을 먹음직스럽게 얹어 내는 타이 누들 수프, 고추기름을 끼얹은 만두 등은 모르고 먹으면 채식인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감칠맛이 가득하다. 기대 없이 찾아간 곳에서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영국 매거진 <타임 아웃>이 올해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38곳 중 하나로 꼽은 타오디엔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쑤언투이(Xuan Thuy)에서 쇼핑을 즐길 차례다. 베트남의 수준 높은 도자기를 현대적 디자인으로 해석한 브랜드 매장 아마이 하우스(Amai House)를 비롯해 그 옆, 지난해 10월에 문을 연 라이프스타일 숍 다까옥(Dakaoq), 남베트남에서 생산하는 카카오로 만드는 아르티장 초콜릿 메종 마루(Maison Marou) 카페를 차례로 거치다 보면 어느새 양손 가득 쇼핑백이 들려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뭔가를 더 살 여력이 남아 있다면 중정이 아름다운 사이공 콘셉트(Saigon Concept)도 놓치지 말자. 아르티장 치즈 전문점 캐슈 치즈(Kashew Cheese),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그레이드 비(Grade B), 근대 베트남의 앤티크 도기를 소개하는 송베(Song Be)와 아트 스튜디오, 옷 가게, 향수 전문점 등이 취향 좋은 맥시멀리스트의 신용카드를 유혹한다.
대부분의 가이드북에서는 타오디엔에서의 일정을 랜드마크 81(Landmark 81) 75층에 자리한 루프톱 바 블랭크 라운지(Blank Lounge)에서 마무리하길 추천하지만, 나는 마천루보다 지상에 머물고 싶었다. 강가에서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홍 카페(Hong Cafe)는 상점이 아닌 집이, 가로등이 아닌 나무가 쭉 늘어선 뒷골목 끝에 자리해 고즈넉한 운치가 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쇼핑으로 폭주한 하루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끝내고 싶었지만 카페 바로 옆, 호찌민 MZ세대에게 인기 높은 편집숍 오브조프(Objoff)의 유혹을 끝내 물리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욕망에 사로잡힌 채 하루를 마치게 되는 곳. 타오디엔은 그런 동네다.

Quan 3

떤딘 시장으로 가는 길에 만난 세련된 건축물들.
3군의 랜드마크, 떤딘 성당.
고대 후에 시대의 고건축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 다바오 콘셉트.

취향 좋은 애호가들의 동네, 3군
호찌민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지형도를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5군에서 먹고, 3군에서 자고, 1군에서 파티를 즐긴다.” 호찌민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동네’로 꼽는 3군은 모든 게 정신없이 뒤엉킨 1군의 혼란과 달갑지 않은 긴 숫자가 영수증 위에서 춤을 추는 2군의 살벌한 물가에 지친 이들을 포근하게 품어 준다. 낮은 인구밀도(1제곱킬로미터당 4만 명), 도시에서 가장 넓은 녹지대를 보유한 동네, 시내 주요 지구로의 뛰어난 접근성 같은 점도 3군의 가치(집값)를 높이는 요소. 3군을 가르는 뚜쓰엉(Tu Xuong) 거리, 쩐꾸옥타오(Tran Quoc Thao) 거리, 바후옌타인꽌(Ba Huyen Thanh Quan) 거리 중 어디를 걸어도 이 동네의 정체성이 한눈에 보인다. 고대 전통 건축물,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유럽식 건축물부터 근대건축물까지 도시가 지나온 역사를 품은 ‘집’들이 연대기처럼 펼쳐진 풍경이 눈과 발을 붙든다.
1790년 응우옌아인(Nguyen Anh) 황제가 지은 궁전으로, 호찌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알려진 딴싸(Tan Xa)를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 시절 고무 농장을 운영한 부호들이 소유했던 저택들을 기웃거리기만 해도 시간이 훌쩍 지난다. 안쪽 풍경을 살피고 싶다면 그런 집 한 채를 사서 개조한 카페나 레스토랑을 찾아가 보자. 현지인 사이에서 아름다운 공간미를 추구하는 카페로 통하는 다바오 콘셉트(Dabao Concept)도 그중 한 곳. 고대 후에 시대의 저택을 재현한 코도(Codo) 지점의 고풍스러운 대문을 열고 안뜰로 들어서면 오래된 나무, 정성스럽게 빗질한 마당, 처마 아래와 문 안쪽 곳곳에 놓인 고가구가 시선을 끈다. 커피 맛도 꽤 준수하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건 호찌민 사람들의 조용조용한 몸짓과 목소리. 자신의 성향이 무엇이든, 혹은 어디에 있든 그곳의 분위기에 걸맞은 언행을 하는 것이 미덕인 베트남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공간미보다 맛과 질에 더 집중하는 커피 애호가에게도 3군은 행복한 선택지를 내준다. 베트남에 스페셜티 커피 신이 갓 자리 잡기 시작할 때부터 흐름을 만든 개척자들의 공간이 3군에 꽤 몰려 있다. 베트남의 바리스타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노련한 로스터 쩐호아(Tran Hoa)가 운영하는 허밍버드 카페 & 로스터리(Hummingbird Cafe & Roastery), 다양한 향과 맛을 내는 지역 원두를 소개하며 실험적 레시피의 커피 음료를 선보이는 96B 카페 & 로스터리(96B Cafe & Roastery), 콜드 브루를 전문으로 하는 노매드 콜드 브루 커피(Nomad Cold Brew Coffee), 열대 과일을 커피에 접목한 메뉴를 선보이는 라비엣 커피(Laviet Coffee) 등이 3군의 인구밀도를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