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문 시대, 밀도 높은 다양성의 도시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만의 가양주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에 대하여.

무언가를 삼킬 때 목에서 나는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다. 꿀꺽. 술이든 음료든 다른 무엇이든 ‘꿀꺽’ 삼키는 짧은 순간, 우리는 꽤나 복합적인 경험치를 얻는다. 맛에 대한 경험, 재료에 대한 경험, 그것을 빚어 낸 손길과 시대·문화에 대한 경험이다. 마치 목 너머로 뒤섞여 흐르는 액체 형태의 무언가처럼, 일단 시작된 경험은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고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 영역을 넓혀 나간다. 다양성과 유연성 그리고 창의성. 이는 2010년대 중반 이후 부산 일대에 번진 이른바 ‘크래프트 문화’의 본질이자, 저마다의 영역에서 활약해 온 세 청년이 ‘꿀꺽’이란 단어 아래 의기투합한 배경이기도 하다.


맥주에서 전통주로,
새로운 술 문화를 꿈꾸다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모인 시작점은 다름 아닌 ‘맥주’였다. 부산에서 수제 맥주를 양조하던 이준표 대표는 양조장 동료로 최승하 이사를, 단골손님으로 이우주 이사를 처음 만났다. 한창 지역을 달구던 수제 맥주의 열기 속에서 자연스레 시장의 성장기와 부흥기를 함께한 세 사람은 머지않아 새로운 술 문화를 향한 열망을 공유하게 됐다. 맥아와 홉 등 양조의 핵심 요소를 대부분 해외에서 들여오다 보니 원재료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직접 생산자와 소통하며 고른 좋은 재료로 좋은 술을 빚고 싶다는 이 대표의 바람은 이 여정의 방향을 전통주 쪽으로 이끌었다. 최초의 질문은 이러했다. 수제 맥주의 독립성과 창조 정신, 다양성에 관한 화두를 전통주로 풀어 보면 어떨까? “수제 맥주라는 해외 문화를 경험하면서 얻은 색다른 아이디어가 많은데, 그걸 전통주에 적용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우리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에 우리만의 독창적인 기술을 접목해 보자는 생각으로 우리 술 장르를 시도하게 됐어요.”
새로운 술 문화의 거점으로 부산 광안리를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심 속 해변 특유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서와 광안대교의 야경을 휘젓는 낭만, 지역민과 여행자가 함께 호흡하는 문화 생태계야말로 오늘날 광안리를 대변하는 수식어일 터이다. “사실 부산의 문화적 특성 중 저희와 부합하는 게 좀 많아요. 지역성과 글로벌성이 공존하고, 바다와 산이 공존하고, 어떤 지역은 굉장히 투박한데 또 어떤 지역은 무척 세련된 모습이죠. 특히 광안리가 그렇거든요. 1인 가구와 외국인 가구도 많고요. 그런 다양성이 저희가 만들고 싶은 술의 방향과 닿아 있었어요.”
전통주와 수제 맥주 문화 그리고 광안리. 세 사람의 고민은 ‘어떤 공간을 만들어야 할까’로 이어졌다. 단순히 술만 빚는 양조장이 아니라, 술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고 문화적으로 소통하는 주막 같은 공간이 필요했다. 생산과 소비를 연결해 소비자에게 가장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고민의 해답은 브루 펍이었다. 그리하여 2022년 여름, ‘꿀꺽하우스’라는 이름을 내건 양조장 겸 펍이 광안리 해변 인근에 문을 열었다. “우리 술의 기반은 가양주 문화니까요. 어떻게 보면 저희도 ‘우리 술을 빚는 우리만의 집’을 만든 셈이에요.” 탁 트인 통유리창 사이로 계절과 술이 나란히 익어 가는 이 집에서 이 대표는 양조와 운영, 최 이사는 기획과 브랜딩, 이 이사는 사업과 수출을 책임진다. “처음부터 모든 인원이 현장에서 협업하며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생각을 동기화하려 노력했어요. 여러 분야의 일을 보고 배우면서 얻는 경험 역시 본인의 자산이 될 테니까요. 이런 게 크래프트 문화의 장점이기도 하고요.”



술에 깃든 사람·지역·시대의 이야기
전통주와 수제 맥주의 만남은 양조 과정에서 특히 눈에 띈다. 보통 전통주는 누룩을 발효제로 사용하는데, 그 안의 수많은 미생물이 자연 발효를 거치며 매우 복합적인 맛과 향을 낸다. 이런 복합성이야말로 전통주의 특징이자 강점이지만, 그만큼 환경에 예민한 탓에 늘 균일한 맛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 대표가 전통주와 맥주 양조 기법을 합친 방식으로 술을 빚는 이유다. 우선 맥주 공법을 활용해 베이스를 만들고, 거기에 누룩을 더해 특유의 복합적인 풍미를 살린다. “전통주 제조의 경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지식이 많잖아요. 조금씩 데이터를 정립하고 또 개척하면서 저희만의 술을 만들어 간다는 게 굉장히 기쁘고 재미있는 과정이에요.”
하나의 술을 완성한 뒤 여러 변화를 덧입히는 게 아니라 모든 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기획한다는 점 역시 전통주보다는 수제 맥주의 특성에 가깝다. 실제로 꿀꺽하우스의 술은 어느 하나 비슷한 스타일이 없다. 재료와 효모 종류도 다르고 활용하는 기법도 제각각이다. 다만 한 가지, 쌀만큼은 김해의 청년 농부와 협업해 양조 전용으로 재배한다. “저희 술이 워낙 변주가 많다 보니 가장 기본이 되는 쌀은 믿을 수 있는 곳에서 안정적으로 수급하자는 마음이었죠. 맛이나 질감에 관해 여러 논의와 실험을 거듭하면서 우리 술에 적합한 쌀을 함께 찾아가고 있어요.”
결국 술은 사람과 삶, 시대상을 반영한다. 기획자이자 양조자로서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대추로 술을 빚는다면 ‘요즘 정말 맛있는 대추는 어디에서 나는지’ ‘우리가 좋아하는 시나몬 롤이나 추로스 맛을 술로 구현해 볼 순 없는지’ 같은 동시대적 관심사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접목하려 애쓴다. 그렇게 완성한 제품이 밀양 단장 대추와 시나몬을 결합한 ‘대추걸렸네’다.
한편 지역 화가인 방정아 작가와의 협업 역시 꿀꺽하우스만의 색깔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보통 술과 예술의 만남은 라벨이나 패키지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순수하게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술을 기획했다는 점에서 ‘욕망의 거친 물결’은 유독 특별하다. 유자와 스피어민트로 쨍한 산미를 살리고, 파도처럼 거친 질감을 더한 이 탁주는 동명 작품의 색감은 물론 이름의 뉘앙스, 작가의 술 취향 등 무수한 요소를 담은 결과물이다.
“한국의 제철 재료를 사용하다 보니 확실히 맛에 대한 공감대가 깊다고 느껴져요. 최근엔 우리 밀에 참깨를 넣어 ‘고소햇밀’이란 술을 빚었는데, 뜻밖에 깨송편 맛이 나서 추석 즈음에 마시면 재미있을 것 같더라고요.” 실제로 꿀꺽하우스의 술에 담긴 지역성이란 재료 자체보다는 그 재료나 맛이 지닌 공감대에서 기인한다. 어울리지도 않는 특산물을 집어넣고 ‘부산의 술’이라 호소하는 대신, 여러 분야의 지역민들과 대화하며 창작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는다. 더덕과 메이플 시럽을 조합한 ‘더덕캐냈네’ 역시 더덕으로 술을 만들고 싶다는 지역 어르신의 사연에서 출발한 술이다. 이 대표가 단 한 번도 술의 재료로 생각하지 못했던 더덕은 오랜 기획 끝에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준 더덕 요구르트 맛의 탁주로 재탄생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에 깃든 무언가를 찾아내 술로 표현하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보면 젊은 세대부터 부모님 세대까지 술 하나로 통합되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게 전통주의 장점이겠죠.”
현재 꿀꺽하우스는 시즌마다 대략 10종의 술을 선보인다. 정규 라인업은 ‘정오, 혼자가 아닌 나’ ‘광안밤’ ‘욕망의 거친 물결’ ‘달그락’ ‘더덕캐냈네’ 등 다섯 가지다. 나머지는 한정판으로 시즌에 따라 조금씩 구성이 달라지는데, 재료가 계절을 타기도 하지만 매해 이들의 관심 분야가 바뀌는 까닭도 있다. 이를테면 곡물에 유독 관심이 많은 해에는 쌀의 도정률이나 로스팅 방식을 집중 탐구해 신제품을 구상하는 식이다.



우리만의 가양주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
영감을 모으고 이야기를 발효시키며 꿀꺽하우스가 하루하루 쌓아 온 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양주 문화’다. 물론 가양주에 대한 해석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저 우리가 느끼고 경험한 이 시대를 우리 술로 표현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 이야기한다. 과거 우리가 쌀과 함께 먹었던 반찬이라면, 적어도 우리 안에 그 맛과 문화에 대한 경험치가 있다면 어떤 식재료도 우리 술의 첫 단추가 될 수 있을 터. 오히려 재료보다 우선하는 기준은 여정 자체가 주는 즐거움의 농도다. 꿀꺽하우스는 어떤 술이든 만드는 사람이 즐거워야 마시는 사람도 즐거울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꿀꺽하우스가 여러 문화 예술 분야와 협업을 지속적으로 궁리하는 것도 도전하는 데 대한 설렘과 희열, 자신들의 폭넓은 관심사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백현진 작가와의 협업을 기념하며 작가의 노래인 ‘모과’를 술로 표현했고, 최근에는 미국의 하나막걸리와 함께 ‘에브리띵 베이글’ 맛이 나는 막걸리를 기획해 뉴욕과 부산에서 동시에 선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예술뿐 아니라 술과 결합한 음식이나 음악, 무용 등 각종 영역에서 협업을 시도하는 단계예요. 아직은 좀 막연하지만 문학과의 만남도 고민하고 있고요. 장기적으로는 이 모든 장르를 결합한 형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돌이켜 보면 세 사람의 지난 3년은 끝없는 실험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술과 요리를 개발하는 틈틈이 팝업 행사를 열고, 발효 세미나와 양조 클래스, 페어링 모임도 꾸준히 진행했다. 이들이 빚은 술을 맛보려고 국내 다른 지역은 물론 해외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적지 않다. 꿀꺽하우스가 목표하는 다음 단계는 좀 더 소비자가 많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다만 더 넓은 시장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은 건 몇 종류의 술 너머, 시대와 문화를 잇는 새로운 경험의 씨앗이다. 이들이 꿈꾸는 해외 진출의 결과물이 단순히 ‘꿀꺽하우스 도쿄’나 ‘꿀꺽하우스 뉴욕’ 같은 형태만은 아니라는 의미다. “사실 하나막걸리와 협업하는 것도 직접 뉴욕에 가지 않으면서 우리 문화를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잖아요. 그들이 여기에 오지 않더라도 우리 술을 마시거나 우리의 스토리텔링을 접하면서 결국은 한국을 경험하고, 부산을 경험하는 것이라 봐요.” 지역의 야생 효모를 채취해 일명 ‘부산의 효모’를 개발 중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 꿀꺽하우스가 어떻게 변화할지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우리 술이란 장르가 너무 재미있고 해야 할 일도 많아 열심히 도전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쌀로 빚은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날 수도 있겠죠. 그런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이제 막 씨앗을 뚫고 나온 줄기가 어떤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 어떤 꽃과 열매를 맺으며 얼마나 큰 숲을 이룰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마치 ‘꿀꺽’ 삼키는 순간 시작되는 맛의 경험이 어떻게 변하고 확장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다만 분명한 건 꿀꺽하우스가 시대와 문화,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을 닦고 문을 낼 거라는 사실이다. 우리 삶에 깃든 숱한 낮과 밤이, 지금도 술과 함께 익어 가는 무수한 이야기가 바로 그 문 너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