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발리 우붓에서 소란과 완벽하게 단절된 곳에 머물며 신심 깊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간 발리 여행에서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꿈, ‘쉬고 비우고 채우기’를 마침내 실천하고 돌아왔다.


치유의 캠프
2년 전 번아웃을 극복해 보고자 2주간 발리에 머물렀다. 근 10년 만에 다시 찾은 우붓 중심가, 잘란 라야 우붓(Jl. Raya Ubud)에서 처음 마주한 장면은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비좁은 일차선로. 줄지어 선 자동차와 바이크가 함께 만들어 내는 자욱한 매연과 소란 틈에서 “거기 어때?” 하고 묻는 친구의 메시지에 이렇게 답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랑 요가 반(The Yoga Barn)이 우붓을 다 망쳐 놨어.”
우붓에 더 이상 여유, 고요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나의 단정을 유보한 건 로얄 피타 마하(The Royal Pita Maha)였다. 우붓 왕궁, 푸리 사렌 아궁(Puri Saren Agung)에서 5.7킬로미터만 내달리면 닿는 이 리조트에서 발리에 지금도 왕이 산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붓의 마지막 통치 군주 조코르다 그데 아궁 수카와티와 그의 아들 조코르다 그데 푸트라 수카와티(이하 푸트라 수카와티) 얘기다. 왕정은 끝났지만 왕국은 살아 있다. 로얄 피타 마하가 근거다. “이곳은 원래 왕실 저택이었습니다. 리조트가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우붓인들의 일자리를 위해, 그럼으로써 더 나은 삶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죠.” 로얄 피타 마하 총괄 매니저인 데와 아림바와의 말이다. 우붓에서 수카와티 왕가가 운영하는 리조트는 총 세 곳. 1500여 명의 우붓인이 피타 마하 그룹에 소속되어 일과 삶을 꾸려 간다.
데와에게 ‘수카와티 왕실의 지역사회 공헌’에 관한 얘길 들었지만, 왕실의 공간을 외지인에게 공개하는 까닭은 못 들어, 머물면서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첫날에는 정글을 바라보며 수영을 즐기는 독채 풀빌라, 지역 장인과 예술가의 작품으로 가득 찬 고풍스러운 방, 원시의 숲을 방불케 하는 정원,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의 화려한 면면에 마음을 뺏겼다. ‘예술로 우붓을 일으킨 왕조’로 유명한 수카와티 가문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은 확실히 매혹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일었다. 그걸 과시하는 것이 푸트라 수카와티의 의도였을까?
그가 베풀고자 한 것은 우붓의 번영기를 고스란히 품은 럭셔리 빌라에서 보내는 윤택한 며칠이 아니다. 그런 곳은 신혼여행객을 겨냥한 최고급 숙소의 각축장인 발리에 이미 차고 넘친다. 내가 로얄 피타 마하에서 경험한 건 20세기 전, 순전한 우붓 그 자체다. 이곳이 ‘약(medicine)’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의 발원지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추측은 확신이 됐다. 로얄 피타 마하가 자리한, 승천하는 용의 몸짓처럼 힘차게 굽이치는 아융강(Ayung River)이 품은 산기슭은 이 땅에 우붓이라는 이름을 붙인 성자, 르시 마르칸데야의 모험기가 펼쳐지는 무대다. 그 역사의 ‘기승전’을 이곳에 풀려면 사흘도 모자라므로 ‘결’만 간략히 요약하겠다. 신의 계시를 받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발리로 온 성자가 고행 끝에 찾은 안식처가 바로 아융강 일대. 치유의 식물이 자라고 성수가 샘솟는, 우붓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이 부지는 자연스럽게 큰 권력을 가진 왕의 집이 됐다. 그 기운은 떠나는 날까지 길을 잃고 헤맬 만큼 드넓은 리조트 부지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레 경험하게 된다. 빌라가 포진한 산기슭 중간, ‘홀리 워터(Holy Water)’를 이름으로 내건 수영장의 물은 우붓 사람들이 정화 의식에 사용하는 진짜 약수다. 수영장 안쪽 깊숙이 자리한 사원, 365일 향이 피어오르는 제단 위 차낭사리, “생리 중인 여성은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쓰인 표지판이 이곳이 진짜임을 입증한다.
로얄 피타 마하가 보여 주는 우붓다움의 백미는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환대에 있다. 제너럴 매니저부터 텃밭 농부까지, 모든 이가 내게 베푼 꾸밈없는 친절이 인상 깊어 바쁜 데와를 붙잡고 이유를 물었다. “이곳 직원들에게 여긴 그저 일하고 돈만 받는 직장이 아니에요. 왕이 선물한 삶의 터전이죠. 그래서 집에 온 손님처럼 진심을 다하는 겁니다. 또 우붓 사람들은 타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면 그 에너지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어요. 내가 오늘 만난 이를 축복하면 신이 나를 축복한다는 것도. 그런 진심이 당신에게 닿았나 봐요.” 래프팅 보트를 실어 나르는 아융강의 넘치는 기세, 우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농도 짙은 흙·풀·꽃 냄새에 취하게 되는 왕의 정자에 앉아 그의 말을 곱씹어 본다. 지난 10여 년 동안 다섯 번 넘게 온 발리에서 이 섬에 사는 사람들과 이토록 자주, 깊게 통한 적이 있었나? 내게 쉼을 느끼게 해 준 건 요가도, 스파도 아닌 사람이었다. 우붓에서 태어나 우붓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 매일 하루 세 번, 이 세계와 타인의 평화를 빌며 기도하는 일이 곧 삶인 사람들 말이다.


영혼을 씻는 시간
“내면의 평안을 찾고 싶을 때 많은 사람이 우붓을 떠올립니다. 저는 항상 궁금했어요. 우붓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왜, 언제부터 우붓이 치유와 정화의 땅이 됐을까?” 왕궁에서 만난 남자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우붓 왕, 아궁 수카와티의 아들 푸트라 수카와티가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 기념사진이나 찍는 유적인 줄 알았던 우붓 왕궁이 진짜 왕이 사는 집이며, 내가 그 집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에 떨리는 마음을 꼭꼭 숨긴 채. 통역한 말을 들은 푸트라 수카와티의 맑고 깊은 눈이 반짝 빛난다. “글쎄요, 그 ‘무엇’을 어떤 단어로 묘사하긴 힘들 것 같아요. 나 역시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으려고 했죠.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없지만 느낄 순 있어요.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포착되는 오라, 주파수 같은 것 말이에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일정 기간 원하는 것에 깊이 집중한다면 그걸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바로 지금의 우붓을 만든 것 아닐까요?”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면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횡설수설할 게 분명한 알쏭달쏭한 답의 진의를 푸라 티르타 엠풀(Pura Tirta Empul)에서 찾았다. 홀리 워터 템플(Holy Water Temple)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원은 성수를 근간으로 하는 발리식 힌두교, 아가마 티르타(Agama Tirta)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지다. 매표소를 지나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짙푸른 녹색 사롱 위에 붉은 띠를 둘러매는 예식용 옷(이라고 하기엔 보자기에 가까운)을 입고 제단에 차낭사리를 바치는 여행객 무리가 시선을 끈다. 생전 기도란 것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온몸을 타투와 피어싱으로 치장한 이, 인스타그램을 위해 젊음과 재산과 시간을 다 바칠 것 같은 이들도 가부좌를 틀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지나 중앙에 자리한 안뜰로 가면 성수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풀, 자바 텐가(Jaba Tenga)가 나타난다. 그곳은 더 기묘했는데, 녹색 사롱을 입은 수백 명의 외국인이 물줄기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분수 앞에서 물을 받아 마신 후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호기심과 충격으로 뒤엉킨 내 얼굴을 본 가이드가 건넨 설명은 다음과 같다. “푸라 티르타 엠풀에서 행하는 이 의식은 멜루캇(Melukat)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 영혼의 불순물을 깨끗이 씻어 내는 예배죠. 예배자가 성수가 흘러나오는 분수구 앞에서 할 일은 네 단계로 나뉘어요. 처음엔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다음엔 분수 물을 한 모금씩 세 번 마시고 얼굴을 세 번 씻어 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수 아래에서 머리를 씻어요. 분수 중에는 장례식에만 사용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안내자의 말을 잘 따라야 해요.”
막 의식을 마치고 나온 이들 중 천년 묵은 때를 벗겨 낸 듯 개운한 얼굴을 한 남녀에게 다가가 기분을 물었다. “글쎄요, 우리는 사실 특정 신을 믿는 신자는 아니지만 뭔가 특별한 계시를 받은 느낌이에요. 우주와 연결된 듯한 기분, 그래서 앞으로 원하는 게 다 이뤄질 것 같은 믿음이 생겼어요.” 둘의 해사한 미소 뒤로 또 다른 희망찬 얼굴들이 둥둥 떠다녔다. 저 여행객 무리 중 사원을 수호하는 물의 신 비슈누를 믿는 힌두교도가 있긴 할까? 수도국의 수질 안전성 판정 안내장이 없어도 ‘성스럽다고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마음을 맡긴 채 몸 안팎을 적시는 이들을 보며 푸트라 수카와티에게 했던 질문의 답을 찾았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굳게 믿으려는 마음이 모여 만드는 오라, 그게 바로 우붓을 덮은 치유의 기운이었다.


몸의 기운을 돋우는 법
쉬고 비우며 원기를 채운 덕에 마침내 바깥으로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북적이는 시내 말고 조용하게 걸을 만한 곳은 없을까요?” 리조트 직원의 입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이름은 참푸한 리지 워크(Campuhan Ridge Walk). 약 2킬로미터 길이의 이 산책로는 우붓 사람들이 가볍게 운동하고 싶을 때 즐겨 찾는 곳이다. 영문 가이드북에서는 트레일로 소개되었지만 대부분은 평지에 포장도로라 등산화, 스틱, 드라이핏 티셔츠 같은 건 필요 없다. 모자, 선글라스, 물, 모기 기피제(발리 어디에서나 필요한 것들 말이다)만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햇볕이 이마와 등을 따갑게 쪼아 대는 들판의 골든 스폿(golden spot)을 지나면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이 나타난다. 더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정을 끝내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에어컨 바람과 얼음물, 차가운 수건이 기다리는 차로 서둘러 돌아가려는데 산책길을 안내한 데와가 옷깃을 잡는다. 그의 뒤를 따라 다리 아래로 내려가니 싯누런 흙탕물이 넘실대는 계곡이 나타난다. “여긴 우붓에서 가장 신령한 기운이 깃든 장소예요. 오른쪽 강 워스 텐겐(Wos Tengen)과 왼쪽 강 워스 키와(Wos Kiwa)가 합류해 하나의 강물을 이루는 곳이거든요. 음과 양이 만나는 지점이죠. 우붓 사람들은 간절하게 원하는 것 혹은 치유받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이곳, 구눙 레바(Gunung Lebah)에 와서 치성을 드려요.”
역사와 종교에 해박한 나의 우붓 구루, 데와와 함께한 덕분에 여정 내내 그 어디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오직 우붓 사람들만 구전으로 간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런 것을 몰라도 우붓 곳곳을 누비다 보면 숨통이 트이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 이곳 사람들 표현을 빌리면 ‘좋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거대한 바위가 첩첩이 쌓여 만들어진 절벽을 이불처럼 뒤덮으며 강하하는 물줄기가 눈을 사로잡는 칸토 람포 폭포(Kanto Lampo Falls)에서도 그랬다. 별다른 정보 없이 지명만 듣고 찾아간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건지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풍경에 눈을 질끈 감지만, 그 장면을 뒤로하고 아래쪽으로 난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비옥한 화산토, 차고 넘치는 물과 햇빛, 깨끗한 산소를 마음껏 취하고 자란 열대식물, 고요한 절벽, 잔잔하게 흐르는 계곡, 그리고 마른 바위에 걸터앉아 따뜻한 볕을 쬐는 사람들이 차례로 시선을 끈다. 그늘과 햇빛이 적당하게 데운 바위에 앉아 그 좋은 기운, 더없이 평화로운 순간을 한참 동안 누렸다. 발리인들이 사랑하는 물의 여신, 자애로운 데위 다누가 내린 은총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