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을 단(丹), 푸를 청(靑). 20대에 장인이 된 안유진 국가무형유산 단청장 이수자를 만났다. 단청을 건축물에서 해방시켜 일상에 스며들게 하겠다는 붉은 열정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해 후대에 전하겠다는 푸른 이성이 그의 우주를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었다.

2024년 말 서울 덕수궁 덕홍전에서 국립무형유산원 무형유산 창의공방 레지던시 10주년 성과전시회가 열렸다. 소목을 깎아 만든 구름 모양 틀에 꽃, 나무, 봉황 등의 문양을 입체적으로 장식한 작품 ‘우화’가 화제였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불교적 이미지를 단청으로 구현한 것으로, 20대에 국가무형유산 장인이 된 안유진 단청장 이수자의 손끝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모빌 형태에 단청의 오방색과 문양을 입혀 단청이 건축물을 벗어나 독립된 예술 작품이 될 가능성을 보여 줬다.



장식해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치유해 줄 아름다운 세상을 표현한 작품 ‘우화’.
전통을 잇는 청년 장인
한복 디자인을 차용한 검은색 세미 정장을 입고 나이키 덩크 로우 스니커즈를 신은 안유진 이수자가 시크릿 투톤 헤어를 휘날리며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허리춤에 찬 검붉은 노리개와 단청 문양을 넣은 스마트워치 밴드가 멋스럽다. 전통과 현대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모습이 그의 작품과 꼭 닮은 듯하다. 안유진 이수자는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을 보고 단청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금은방 앞에 있어 자주 가던 곳이다. 예술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2019년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단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3년간 무형문화유산 전수 교육을 받은 그는 심사를 통과해 2021년 단청장 이수자가 됐다. 20대에 문화유산 전승자가 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건물에서 해방된 단청
단청은 궁궐, 사찰, 전통 가옥 등 목조 건물에 오방색 문양을 입혀 건축의 격을 높이는 작업이다. 건물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넘어 습기와 해충으로부터 목재를 보호해 건물의 수명을 연장하고, 구조가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단청장 이수자가 되면 국가유산을 복원·수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공주 갑사 대웅전과 기장 장안사 대웅전의 단청 기록화, 홍성 효령대군파 재실 고색 단청, 부안 개암사 사천왕문 석채 단청 등에 안유진 이수자의 손길이 닿았다.
안유진 이수자는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적 상품 개발과 작품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2024년 덕수궁에서 열린 <미키 in 덕수궁: 아트, 경계를 넘어서>전에서 현대미술 작가들과 함께 디즈니 캐릭터를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였고, 스케이트보드와 바이크 헬멧, 스마트폰 액세서리, 스티커 등에 단청 문양을 입히는 작업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25년에는 궁궐과 사찰의 단청 문양을 원형 그대로 옮긴 <단청장 이수자 안유진의 단청 컬러링북>을 출간하기도 했다.
안유진 이수자는 단청을 건물에서 해방시켜 일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천연 안료를 사용해 단청 고유의 깊이 있는 색감과 안정적인 조화를 유지한다. 금박을 더해 눈이 반짝이는 듯한 효과를 내는 전통 기법도 계승한다. 단청을 현대적 방식으로 변주하되 전통의 틀을 엄격하게 지키는 젊은 장인을 만났다.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을 보고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숭례문이 불타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해요. 자주 가던 곳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거죠. 불에 탄 현판이 추락하면서 갈라지던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대한민국 국보 1호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건가, 궁금해서 검색하다 전통 장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글을 봤어요. 무형문화유산 기능자는 점점 나이가 드는데 이를 배우려는 청년이 없어 기술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경복궁과 불국사도 숭례문처럼 사라질 것 같아 더럭 겁이 났어요.
똑똑하고 대견한 어린이였네요. 그 사건이 진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나요?
어릴 때부터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 단청 문양으로 디자인하거나 불화를 그리면서 놀았어요. 예술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면서도 전통 회화 학원에서 단청을 배웠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전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흉내만 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제가 좋아하는 것 사이의 괴리감이 커졌고, 졸업 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어요. 혼자 고민한 시간이 많아서인지 동기들보다 1년 먼저 국가유산수리기능자 자격을 취득하고 졸업할 무렵 이수자 심사에 통과했어요. 편입 직후 저는 오로지 단청만 팠어요. 그런데 한 교수님이 배움에 편식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셨어요. 단청뿐 아니라 불화, 민화, 초상화, 벽화 등을 두루 섭렵해야 전통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고 말하는 교수님도 계셨고요. 덕분에 전통미술뿐 아니라 전통문화 전반을 공부했고, 단청 표현에도 깊이가 생긴 것 같아요.
단청장 이수자는 어떤 일을 하나요?
무형유산은 말 그대로 형태가 없어 사람이나 단체에 의해 전승돼요. 한국 국가무형유산 전승 체계는 보유자, 전승교육사, 이수자, 전수자(전수 교육생)로 나뉘는데, 전수자를 제외한 분들을 전승자라고 불러요. 이수자부터는 무형유산으로 분류되고, 전승교육사부터는 후학을 양성할 수 있어요. ‘인간문화재’라 부르던 보유자는 해당 무형유산의 기능 및 예능을 전형대로 체득하고 실현할 수 있는 소수에게만 이름이 주어져요. 전승자가 아니라도 국가유산수리기능자·기술자 자격을 취득하면 국가유산을 수리하거나 재단청할 수 있고요. 국가무형유산 전승자의 임무는 국가유산을 널리 알리고 지키는 거예요. 저는 현장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에서 풀어내고 있어요. 스케이트보드, 바이크 헬멧, 스마트폰 액세서리, 스티커, 키링, 쿠션 등 일상에서 접하는 물건에 단청의 문양과 색을 입히는 거죠.
표현이 자유로운 디자인 영역에서 규율이 엄격한 전통문화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정해진 틀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하려면 기본에 충실해야 해요. 혼자 단청 문양을 디자인할 때도 문양을 배치해 구도를 잡으면서 전통적 미감을 살리는 게 어려웠는데, 전문적인 공부를 하면서 더 어려워졌어요. 단청에 사용하는 문양이 수십 가지고, 이를 조합해 나올 수 있는 문양은 수백 가지가 넘어요. 색 표현에도 규칙이 있어 한색과 난색을 번갈아 써야 하고, 색을 입힐 때도 칠하는 순서가 있어요. 그뿐 아니라 궁궐과 사찰의 단청에 차이가 있어요. 궁궐 단청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정신에 따라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아야 하고, 사찰 단청은 부처께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비단에 수놓듯 화려하고 빽빽하게 문양을 채워야 해요. 또 건물의 위상과 기능에 따라 단청 문양과 표현 방식도 달라지죠. 그래서 배울수록 어렵고, 알수록 재미있어요.
단청은 동아시아 목재 건축물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어요. 한국 단청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한국과 중국, 일본의 단청은 동아시아의 음양오행 철학을 공유하지만 미감과 자연환경, 민족성에 따라 차이가 있어요. 중국 단청이 황실의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며 청색과 금빛 장식 중심의 웅장함을 추구했다면, 일본은 목재의 질감과 절제를 우선시해 8세기 이후 채색 건축이 줄었어요. 반면 한국 단청은 오방색이 살아 있어요. 산세와 숲, 기와와 어우러진 색채의 균형을 중시하고 자연과 건축이 하나의 풍경을 이루도록 하는 게 특징이에요. 저는 개인 작업을 할 때 오방색만 사용하지 않아요. 천연 안료를 사용하되 모노톤이나 핑크 톤으로 변형해 저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죠. 문양에 담긴 의미를 아는 것도 단청을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예를 들어 주화 문양은 감 꼭지를 위에서 본 모습이에요. 단청에 주화 문양을 넣는 이유가 놀라워요. 단단한 감나무 열매 일부를 단청에 담아 건축물이 튼튼하게 오래 버티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장수하길 비는 거예요. 단청 문양의 상징이 궁금하다면 <단청장 이수자 안유진의 단청 컬러링북>을 참고하세요. 궁궐, 사찰 등 전통 건축물의 단청 문양을 해설과 함께 그대로 옮겨 담았어요.
단청이 아름다운 궁궐과 사찰을 추천해 주세요.
창덕궁은 후원을 거닐면서 인정전을 감상하기 좋아요. 그곳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청은 낙선재 후원의 상량전에 있어요. 육각형 정자 천장에 학, 용, 박쥐, 복숭아, 불수감(부처님 손을 닮은 과일) 등 다산과 복, 장수, 벽사를 상징하는 문양이 가득 새겨 있죠. 너무 좋아해서 모사한 작품을 <조선의 만화경, 단청>전에서 선보이기도 했어요. 창경궁 명정전에는 가장 오래된 조선 궁궐 단청이 남아 있어요. 천장 중심부에 왕권을 상징하는 봉황 한 쌍이 금박으로 장식돼 있고, 어좌는 일월오봉 병풍으로 둘렀어요. 색이 많이 바랬지만 조선 후기의 화려한 단청과 달리 단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사찰에는 단청뿐 아니라 불화와 벽화도 있어요. 가장 좋아하는 사찰은 양산 통도사예요. 물길을 따라 가람이 배치됐는데, 전각마다 부처님상이 달라요. 사찰 규모가 커서 다양한 단청 문양과 화려한 전각 벽화를 볼 수 있어요.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중층 건물인데, 내부에 긴 기둥이 네 개 있어요. 기둥마다 그려진 각기 다른 용 무늬는 여러 번 봐도 질리지 않아요. 단청을 볼 때 주로 기둥이나 처마 등 건축물 외부를 많이 보는데, 내부 천장을 보는 걸 추천해요. 면적이 넓다 보니 회화적으로 많은 무늬를 새길 수 있어요.
작업물이 예스럽기보다 외려 트렌디한 느낌이라 놀라워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단청의 기본이 되는 오방색을 일상용품에 적용하면 너무 화려해 거부감이 생길 수 있어요. 저는 색은 전통 안료 안에서 자유롭게 변주하고, 문양은 전통의 규칙을 철저하게 따라요. 조금만 틀어져도 국적이 불분명해지거든요. 단청 문양을 비틀어 응용하는 작가도 있는데, 단청인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앞으로의 목표를 들려주세요.
단청장 이수자라고 저를 소개하면 단청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단청을 알고, 그 형태와 목적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문화유산을 수리하고 재단장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전통에만 치중하면 확장에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단청을 홍보할 방법을 늘 고민해요. 그렇다고 후원을 받거나 협업하기 위해 애쓴 적은 없어요. 일상에서 흔하게 보는 물건에 단청 문양을 넣고, 제작 과정을 촬영해 소셜 미디어에 공유해요.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며 어디서든 그림을 그리고요. 카페 샹들리에가 예쁘면 단청으로 채색해 보고, 명품 브랜드 로고가 예쁘면 단청을 적용해 디자인해 봐요. 얼마 전에는 KTX 열차를 타고 가다가 열차 이미지에 단청을 입혀 보기도 했어요. 단청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지금처럼 다양한 시도를 계속할 생각이에요. 앞으로도 건강하고 즐겁게 단청 작업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