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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마을의 우아한 변신 안동

2026년 02월 01일

  • EDITOR 고아라
  • pHOTOGRAPHER 안홍범
  • 제작 지원 안동시청

새로운 방식으로 안동포의 명맥을 이어 가는 금소마을과 주민들의 손길로 다시 태어난 태화동, 안동을 사랑하는 청년들의 활기로 가득한 원도심까지, 익숙한 이름 뒤 낯선 골목을 걸으며 경북 안동의 생생한 얼굴을 마주했다.

대마의 무한한 변신
금소마을

‘안동포짜기’를 천년 동안 이어 온 금소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삼베의 원료인 대마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옛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옥 스테이에서 하룻밤을 청한다.

경북 안동 임하면의 금소마을은 금양마을 또는 금수마을로도 불렸다. 금양(錦陽)은 비단처럼 따뜻하고 고운 양지를 뜻하고, 금수(錦水)는 마을을 휘감는 물길이 마치 한 필의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다는 의미다. 배수가 잘되는 사질토와 일조량이 풍부한 기후 덕분에 예부터 질 좋은 대마가 생산됐는데, 대마 줄기로 만든 삼베가 바로 안동포다. 금소마을은 전국 최고 대마 생산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포짜기가 현재까지 계승·보존되고 있으며, 산업용과 의료용 대마 제품이 활발히 생산되고 있다.
마을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고 대마민국 금소마을 1박 2일 촌캉스 프로그램 ‘금양연화’에 참여했다. 커뮤니티 센터인 고고창고에서 대마 차 시음을 시작으로 전통 간식 찰오찌 만들기, 안동포짜기 시연 감상, 옛 고택을 개조한 한옥 스테이에서 하룻밤 묵기 등 대마의 다양한 매력을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다. 날이 따뜻한 계절에는 대마밭에서의 명상, 대마 뿌리를 넣은 백숙 체험, 대마 잉여물로 만든 유등 띄우기 등 보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고고창고
수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고택이 길을 따라 줄지어 선 마을에 옛 주민들이 멱을 감거나 물놀이를 했던 수로가 휘감듯 흐른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문득, 세련된 건물 하나가 여행자를 2026년의 안동으로 되돌려 놓는다. 옛 농협 창고를 개조한 카페이자 금소마을 여행자 커뮤니티 센터인 고고창고다. 내부에는 대마 줄기로 만든 블라인드와 대마 껍질을 이용한 카운터 바가 눈에 띈다. 카페 옆 체험 공간에는 안동포 조각보를 줄줄이 매단 색동 모빌과 대마 줄기를 엮어 만든 금붕어 등 대마로 만든 예술 작품이 전시돼 있다. 모두 마을 공예가와 안동포짜기 명인의 손에서 탄생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향긋한 대마 차가 먼저 반긴다. 대마를 차로 마시다니…. 고고창고를 운영하는 권용숙 국장이 그 이유를 말해 준다. “금소마을은 ‘산업용 헴프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있어요. 환각 성분 0.3퍼센트 미만의 대마인 헴프를 국가에서 의류용이나 의료용 또는 산업용으로 사용하도록 허가한 곳이죠. 이 마을에서는 환각 성분이 있는 잎을 제외한 대마의 모든 부분을 유용하게 씁니다.” 대마 줄기는 안동포에, 대마 뿌리는 음식에 쓰고 대마 씨앗은 차로 우리거나 기름을 낼 때 사용한다.
고고창고에서는 대마를 활용한 다양한 메뉴도 선보인다. 대마 씨앗으로 짠 헴프씨 오일로 풍미를 극대화한 커피, 빵 안에 대마 씨앗과 찜닭을 넣은 안동찜닭 파이 등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대마는 혈액순환 개선에 효과적이고 강력한 항염 작용을 해요. 오메가-3와 감마리놀렌산이 피부를 튼튼하게 만들어 아토피나 습진 같은 피부 질환 개선에도 좋고요. 뇌세포를 보호하고 혈류량을 늘려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 덕분일까, 장수 마을로 알려진 금소마을 주민들의 치매율은 안동의 다른 마을에 비해 현저히 낮다.
차에 곁들일 디저트는 직접 만들어 보기로 한다. 예부터 금소마을에서 즐겨 먹던 전통 간식인 찰오찌를 재해석해 쿠킹 클래스를 진행하는 것. 찹쌀과 멥쌀을 섞어 반죽을 만들어서 동글납작하게 부친 뒤 대마잎 모양의 종이를 올리고 녹차 가루나 치자 가루 등을 뿌리면 고운 색의 찰오찌가 완성된다. 보드라운 찰오찌를 한 입 베어 물면 쫀득한 식감과 고소한 맛에 금세 빠져든다.

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 어르신들이 삼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여인들의 고행이 깃든 안동포
삼베가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 전수교육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니 전통 베틀에서 기다란 삼으로 안동포짜기 시연이 한창이다. 교육사인 박순자 할머니와 이수자인 고갑연·김영숙·남귀숙 할머니까지 모두 네 분, 안동포의 명맥을 잇는 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 어르신들이다. 멀리서 보면 한없이 여유로운 모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을 고르는 손이 쉴 틈 없이 움직인다. 가까이 붙어 앉아 홀린 듯 지켜보고 있으니 할머니들이 옛이야기의 실타래를 훌훌 풀어놓는다. 과거 금소마을로 시집온 여인들은 대부분 안동포를 짰다. 절차가 복잡하고 고단해 이 지역으로 시집오기를 꺼렸는데, 듣고 보면 과연 그럴 만하다. 먼저 수확한 대마의 잎을 제거하고 증기에 쪄서 햇볕에 말린 뒤 껍질을 벗긴다. 겉껍질을 훑어 내 취한 속껍질을 일일이 손톱으로 째고 다시 훑어 낸다. 이렇게 만든 계추리를 햇볕에 말려 물에 적시는데, 이제부터 그야말로 고행이 시작된다. 삼 올을 이로 가늘게 쪼개어 뾰족하게 만든 후 허벅지에 비벼 이어야 하는 것. 한 번 잇는 삼의 길이는 무려 22미터에 달한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몸에 배어 익숙해진다는 뜻의 ‘이골이 나다’다. 이로 올을 쪼개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금소마을 여인들의 이가 움푹 패어 골이 생긴 것. 쪼개진 삼을 허벅지에 멍이 들도록 비벼서 잇다 보니 다리도 성할 날이 없다. 베틀 앞에 앉아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어느덧 40~50년을 훌쩍 보냈다. 할머니가 된 금소마을 여인들은 지금도 손에 익은 베틀을 끌어안고 처음 배운 방식 그대로 안동포를 짠다.

금소마을에서 길안천을 건너면 전국 최대 친수 공원인 금소생태공원을 만난다.

한옥의 화려한 변신, 스테이 예인
지난해 3월 경북 의성군에서 시작된 불길이 안동까지 번지면서 금소마을도 큰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생생히 기억한다. “마을이 온통 불바다였어요.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고 불씨가 이리저리 날아다녔지요.” 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 임방호 회장은 당시 마을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킨 뒤 집집마다 가스를 잠그고 한옥에 물을 뿌렸다.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은 잔인했다. 마을을 둘러싼 산은 까맣게 그을리고, 애써 일군 논과 밭은 잿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서둘러 복원 작업에 나섰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마을은 다시 평화로운 풍경을 되찾았다.
이제 금소마을은 여행자를 맞이하기 위한 채비로 분주하다. 수년 전부터 마을의 버려진 한옥을 수리해 온 임 회장은 화재 이후 스님이 사용하던 촌집을 한옥 스테이로 바꿨다. 그를 따라 스테이 예인에 들어서자 아늑한 공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거실을 중심으로 왼편에 자쿠지와 다락방이, 오른편에 침실이 자리한다. “방보다 낮은 위치에 있던 부엌을 욕실로 바꿔 자쿠지를 설치하고, 다락방은 아담한 차실로 꾸몄어요. 자개장과 원목 서랍장, 아치형 목재 난간은 제가 직접 구한 것이고요.” 여느 한옥 스테이에서는 보기 힘든 삼베도 눈길을 끈다. 욕실에 대마 줄기로 만든 커튼을 달고, 부엌장과 머릿장은 삼베를 바른 후 옻칠로 마무리했다. “삼베는 주로 수의를 만드는 데 썼잖아요. 망자의 몸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항균과 항습 기능이 있는 삼베옷을 입힌 거죠. 그런데 수의 문화가 점차 사라져 삼베를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임 회장은 항균과 항습은 물론 피부 질환 개선에도 효과가 있는 삼베를 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스테이 예인에 묵은 안동에서의 첫날 밤, 오묘한 무늬의 보름달이 떴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이불로 어깨를 감싸고 툇마루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본다. 처마 끝에 걸터앉아 가만히 마을을 굽어보는 달과 눈을 맞추니 도심에서의 분주한 일상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어둑한 등잔불 아래서 졸음을 참으며 밤새 삼베를 짜던 여인들도 이 달을 보며 고단한 하루를 위로받았을까.
다음 날 아침, 스테이 예인에서 도보로 15분이면 닿는 금소생태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마을 앞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길안천을 만나고, 잔잔한 물길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면 금소생태공원에 닿는다. 이 공원은 전국 최대 친수 공원으로 규모가 무려 20만 제곱미터(약 6만 평)에 달한다. 야외 공연장과 파크 골프장, 배드민턴장 등 체육 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매일 이곳에서 산책과 사색을 즐긴다.

골목에 피어난 예술
태화동

이재민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낡은 담벼락을 수놓은 색색의 벽화와 좁은 골목에 들어선 예술가들의 작업실, 주민들이 정성껏 가꾼 한옥이 허름한 도시의 표정을 바꿔 놓았다.

안동시 중심에 위치한 태화동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 이후 수몰 지역 이재민의 새로운 거주지로 조성한 마을이다. 짧은 기간에 많은 집이 필요했고, 그 결과 비슷한 구조의 집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촘촘히 들어섰다. 하지만 불과 10년 후 주변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주민들이 하나둘 떠났고, 태화동의 시간은 50년 전에 멈춰 섰다. 한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태화동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빈 주택과 상가에 지역 예술가들의 공방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개발의 사각지대에 놓여 도시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은 태화동은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오히려 ‘힙’한 마을로 급부상했다. 여행지를 가장 깊게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 태화동 주민들이 마을을 안내하는 도슨트로 나서고 숙소도 제공하는 여행 프로그램 ‘응답하라 태화, 태트로 여행 1박 2일’에 참여하면 이 마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응답하라 태화, 태트로 여행 1박 2일’의 연꽃 차 체험.

골목을 지키는 사람들, 서경지길 아트로드
태화동의 ‘아트로드’라 불리는 서경지길은 독특한 역사를 지녔다. ‘서경지’라는 커다란 못이 있던 자리를 메워 마을을 형성한 것.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 오랜 시간 방치됐던 이 길이 활기를 되찾은 건 2019년 골목길 변화 사업이 진행되면서다. 버려진 상가와 주택에 도예, 민화, 서예, 서양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공방을 차렸고, 주민들도 합세해 어떻게 하면 즐거운 마을을 만들까 고민했다. 골목에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벽화가 양옆으로 펼쳐지고, 반듯한 담벼락에는 동네 아이들이 만든 판화가 전시돼 있다. 집집마다 도자기에 붓글씨를 쓰거나 색색의 천 조각을 바느질해 만든 독특한 문패가 걸려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태화동 여행은 연꽃 차 체험으로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연못이었던 것에서 착안해 웰컴 티로 연꽃 차를 준비한 것이다. ‘응답하라 태화, 태트로 여행 1박 2일’에 참여하면 한옥 스테이나 공예 공방 등 원하는 곳에서 연꽃 차를 즐길 수 있다. 에디터가 서경지길을 찾은 날 연꽃 차 체험이 진행된 곳은 바느질 공방인 ‘생활공방’. 공간 한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을 놓고 연꽃이 담긴 그릇과 망개떡, 찻잔을 낸다. 연꽃은 한여름에 딴 봉오리를 냉동 보관해 향과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한 것으로, 커다란 그릇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으니 안동포처럼 은은한 빛깔의 꽃잎이 서서히 몸을 편다. 공방 가득 연꽃의 향긋함이 퍼진다.
오후에는 예술 공방 체험이 이어진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도자기 빚기, 재봉틀로 파우치 만들기, 민화 그리기, 책갈피 만들기 등 즐길 거리도 풍부하다. 그중 도자기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는 공방 ‘현도예’에서는 도자기에 그림 그리기, 물레 돌리기, 점토 빚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흙은 정직해서 손이 가는 대로 움직여요.” 김강현 대표의 말을 되새기며 차분하게 흙을 매만진다. 정성스럽게 다독이다 보니 매끈하진 않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컵이 완성된다.
다음으로 찾아간 체험 공간은 ‘학수네 책방’. 고즈넉한 한옥을 개조한 이곳에서는 버려진 택배 박스에 안동 한지를 붙인 후 책 속 문구를 넣어 책갈피를 만드는 체험을 한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독서를 즐기기도 좋다. 책방 내 다락방에는 아늑한 조명 아래 폭신한 방석을 깔아 프라이빗한 독서실을 마련했다. 책방 옆에는 하루 종일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2층 침대와 독서 조명, 책장으로 꾸민 스테이도 자리한다.

보고 먹고 즐기는 태화마을
안동의 관왕묘는 한국 전역의 관왕묘 중 유일하게 관우의 석상을 모신 곳이다. 안동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으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사당 중앙에 자리한, 화려하게 채색된 관우의 석상은 육중한 몸과 굳은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사당에서는 특별한 체험도 즐길 수 있다. 관제영첨(관우를 모시는 사당에서 점을 칠 때 사용한 점괘 도구)으로 오늘의 운세를 점쳐 보는 것. 원형 통에 운세가 적힌 종이가 돌돌 말려 있는데, 통을 살살 흔들다 보면 신기하게도 종이 하나가 삐죽 솟아오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종이를 펼쳐 보니 “가벼운 산책이 큰 힐링으로 이어집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토록 영험할 수가. 태화마을을 걸으며 마주한 아름다운 풍경과 정다운 이야기로 위로받은 에디터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 냈다.
다시 마을로 돌아오니 슬슬 배가 출출해진다. 현도예의 김 대표가 추천한 돌짬뽕 맛집 ‘중화관’으로 향했다. 주문과 동시에 낙지와 오징어, 새우, 홍합 등 각종 해산물이 가득 담긴 짬뽕이 나온다. 돌판 위에서 자글자글 끓는 국물을 한 수저 크게 떠 마시니, 뜨끈하고 얼큰한 맛에 언 몸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밖으로 나오니 이번에는 고소한 빵 냄새가 발길을 붙든다. 태화동 주민들이 사랑하는 빵집 ‘느리게 굽다’와 ‘영가제과’다. 최근 빵지 순례 코스로 두 곳을 찾는 여행자가 늘고 있다. 느리게 굽다는 저온 발효로 소화가 잘되는 건강한 빵을 만드는 베이커리, 영가제과는 태화동의 터줏대감 격으로 36년간 매일 아침 6시부터 빵을 굽는 동네 맛집이다. 오랜 세월 주민들의 아침 식사를 책임져 온 영가제과의 옛날햄버거는 태화동 미식 여행에서 꼭 먹어 봐야 할 메뉴다.

위로를 건네는 집, 토닥토닥 한옥스테이
태화동에서는 숙소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아늑하고 시설 좋은 한옥 스테이가 여럿 있기 때문. 그중 널찍한 거실과 테라스에 반해 토닥토닥 한옥스테이를 선택했다. 50년 된 고택을 개조한 곳으로 2023년에 문을 열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통창으로 아늑한 실내가 들여다보이는 한옥과 아담한 족욕 공간이 자리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토닥토닥 한옥스테이는 머물수록 더 좋아지는 매력을 지녔다. 하루를 편안히 마무리하도록 욕실에 반신욕용 욕조를 설치하고, 여행 중 오염되는 옷을 신경 쓰지 않도록 침실에 스타일러도 구비했다. 이튿날 아침에는 주인장이 직접 조식을 만들어 배달해 준다. 메뉴는 콩나물 떡국과 직접 담근 김치. 뜨끈한 국물과 떡을 함께 떠먹으면 “시원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편안한 잠자리와 세심한 배려, 든든한 아침 식사까지, 마치 시골 할머니 댁에 머무는 기분이다.

지금 가장 뜨거운 안동
원도심

거리를 걸으며 고려 시대 유적을 만나고, 분홍색 옷으로 갈아입은 벽화 마을을 구경하다 해가 지면 안동소주로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타로점을 본다. 천년의 시간이 한 공간에 어우러진 원도심 이야기다.

안동 원도심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심 한복판에 고려 건국 공신들을 모신 태사묘가 있는데, 태조 왕건이 견훤을 꺾고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고창전투에서부터 태사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왕건은 승리를 도운 이 땅에 ‘동쪽을 평안하게 한다’는 뜻의 안동(安東)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원도심은 고려 시대부터 안동의 심장부였던 셈이다. 태사묘 근처에 있는 공원은 과거 안동 대도호부가 자리했던 웅부공원. 고려 공민왕이 ‘안동웅부’라 쓴 친필 현판을 내린 곳이다.
역사의 도시로 인식되던 원도심이 최근엔 MZ세대도 즐겨 찾는 여행 명소로 거듭났다. 반세기 동안 아무도 몰랐던 앙드레 부통 신부의 벽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마을 전체를 분홍색으로 칠한 신세동이 사진 촬영 스폿으로 사랑받고 있다. 원도심의 낡은 상가에는 타로점을 봐 주는 커피 바와 안동소주를 재해석한 칵테일을 선보이는 바 등 흥미로운 공간이 들어섰다.

고려의 흔적을 좇아, 천년순례길
원도심 여행에 앞서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안동시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찾았다. 안동 최초의 근대식 결혼식장인 안동예식장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외관과 유리창에 남은 ‘예식장’이라는 글자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
1층에 지난해 처음 세상에 공개된 앙드레 부통 신부의 벽화가 보관돼 있다. 1973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 전통 혼례복을 입은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담겨 있다.
앙드레 부통 신부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한국 전역에 약 200점의 벽화를 남겼는데, 그중 성당이 아닌 민간 시설에 그린 것은 이 벽화가 유일하다. 하지만 신식 예식장에 전통 혼례 그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50여 년이 지난 2025년, 벽체 안에 숨겨졌던 벽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동시 도시재생지원센터 2층에서는 안동 전통 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차림과 전통주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곳의 마스코트는 고양이 ‘재생이’. 재생이는 본래 원도심을 배회하던 길고양이였는데, 센터 직원들의 보살핌으로 건강을 되찾았고 이후 이곳에 살고 있다. ‘재생이’라는 이름은 직원들이 지어 준 것. 재생이는 안동 지역에서 SNS를 타고 유명해졌으며, 지난해 12월 도시재생지원센터의 공식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안동 원도심 도슨트 투어의 이름도 ‘재생이와 함께하는 천년순례길’이다. 이 투어는 태사묘에서 임청각까지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원도심의 역사를 살피고 도시의 일상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고려 시대 의복을 입어 보는 것도 이곳에서만 가능한 특별 체험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밝은색 치마저고리를 골라 입고 웅부공원으로 향했다. 웅부공원은 고려 공민왕 때 안동 대도호부와 관아가 있던 자리에 조성한 근린공원이다. 조선 시대 관아를 본뜬 영가헌과 문루인 대동루, 상원사의 동종을 재현한 시민의 종이 있다.
수령 800년에 이르는 느티나무, ‘관청을 지켜 주는 신을 모시는 나무’라는 뜻의 부신목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선 시대에 안동부사가 부임하면 가장 먼저 이 나무에 그 사실을 알렸고, 매년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는 백성들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안동시장이 새로 부임하면 부신목을 찾아가 인사를 올린다. 부신목은 두 가지 소원 중 하나는 꼭 들어준다고 전해진다. 종이에 소원을 적어 나무를 둘러싼 새끼줄에 매달아 본다. 수백 년 세월을 품은 나무의 영험한 기운에 어쩐지 소원이 이뤄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50여 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앙드레 부통 신부의 혼례 벽화.

분홍 옷 갈아입은 달동네, 신세동 벽화마을
안동시립웅부도서관 옆 산비탈을 오르면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진 신세동 벽화마을이 나온다. 후락한 산동네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마을 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부터다. 낡은 담벼락은 집주인의 초상화가 담긴 캔버스로 변했고, 좁고 가파른 골목길에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조형물이 들어섰다. 비어 있던 주택에는 카페와 예술 공방이 들어서 여행자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자 신세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를 품은 북 카페가 모습을 드러낸다. 동네 아이들에게 ‘뚜비 아저씨’로 통하는 카페 주인은 1990년대 TV 프로그램 <꼬꼬마 텔레토비>에서 뚜비 목소리를 더빙한 성우다. 안동을 여행하던 중 이곳의 노을 진 경치에 반해 카페를 차렸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카페 이름도 ‘다시 여기서’라고 지었다. 향긋한 허브티 한 잔을 손에 들고 전망대에 올랐다. 분홍색으로 칠한 지붕들이 물결치고 인증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든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원도심의 밤을 책임지는 바 호핑
서둘러 밤이 찾아오는 계절, 조용한 원도심에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는 곳이 있다. 안동의 문화와 마을을 사랑하는 청년들이 운영하는 바 ‘시야 커피바’와 ‘잔잔’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주택가, 파란 간판과 나직한 음악 소리가 발길을 끄는 시야 커피바는 커피와 칵테일을 낸다. 세련된 외관과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한옥을 트렌디한 감성으로 개조한 공간이 반전 매력을 뽐낸다. 나무 기둥과 서까래는 그대로 두고 컬러풀한 조명과 스테인리스 가구를 더해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곳이 더욱 끌리는 이유는 칵테일을 주문하면 주인이 타로점을 봐 준다는 점. 원하는 맛과 향, 스타일을 말하면 그에 맞는 칵테일을 만들어 준다.
잔잔은 안동소주를 기반으로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입힌 칵테일을 선보인다. 안동소주는 총 아홉 종. 잔잔은 대한민국식품명인 제6호 박재서 명인의 ‘명인 안동소주’를 사용한다. 잔잔의 이창우와 박민재 믹솔로지스트는 모든 메뉴의 레시피와 스토리를 직접 개발한다. “단순히 맛있는 칵테일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과 가치를 전달하려고 해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칵테일에 담긴 내용을 설명해 주는 건 그 때문이죠. 손님들이 술 한잔의 여유와 함께 안동의 문화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바 좌석에 앉자 칵테일 쇼가 시작된다. 안동소주에 검은콩 두유와 캐러멜 시럽, 아마레토를 차례로 담은 후, 부드러운 맛을 표현하기 위해 셰이킹 대신 컵에서 컵으로 길게 떨어트리는 스로인 방식으로 섞는다. 손바닥만 한 나무 평상 위에 놓인 항아리 잔에 완성된 술을 따른 후 훈연을 입힌다. 일제강점기 뒷마당 항아리에 술을 빚으며 가양주의 명맥을 잇던 안동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칵테일 ‘안동 한량’이다. 은밀히 빚어야 하니 모두가 잠든 시간에 맛을 봤을 터. 물안개가 자주 피어오르는 안동의 새벽녘을 표현하기 위해 연기를 입혀 마무리한다.

안동시립박물관의 특별 기획전 <죽음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에선 이응태 묘에서 발굴된 부장품을 만난다.

낙동강에 담긴 달, 월영교
원도심에서 차로 약 8분 거리에는 안동 대표 관광 명소, 월영교가 자리한다. ‘달빛이 물에 비치는 다리’라는 뜻의 월영교는 날이 맑은 밤, 강물에 달이 둥둥 떠 있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 또한 장관이다. 동이 틀 무렵 낙동강을 끼고 달려 월영교에 닿았다. 강을 둘러싼 검푸른 산 아래, 길이 387미터의 목조 교량이 물안개를 가로질러 뻗어 있다. 밤사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차가운 공기가 강물과 만나 피어난 안개가 점점 짙어지며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월영교는 원이 엄마의 애절한 마음을 담아 미투리 모양으로 지었다. 1998년 안동 정상동에서 이응태의 묘를 발굴했는데, 그때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쓴 원이 엄마의 편지가 발견됐다. 아픈 남편이 어서 낫기를 바라며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으로 짠 미투리 한 켤레도 놓여 있었다. 원이 엄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월영교 근처 안동시립박물관에서 들을 수 있다. 박물관 2층에서 원이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특별 기획전 <죽음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가 열리는 중이다. 올해 5월 31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에서는 1586년에 쓴 한글 편지와 머리카락으로 짠 미투리를 비롯해 이응태 묘에서 발굴한 부장품을 소개한다.

안동시립박물관 2층에선 붓글씨를 선물해 주는 권영한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안동시립박물관 2층에서는 붓글씨를 쓰고 있는 청남 권영한 선생도 만난다. 1931년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안동전통문화연구회장과 한국추사체연구회 고문으로 활동한 서예가다. 관람객에게 성씨를 물은 후 해당 성씨의 시조와 그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고, 연관된 가훈을 멋진 서예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예의와 도덕에 엄격하고 정적인 도시로 알고 있던 안동의 새로운 발견. 금소마을 대마의 우아한 변신을 마주하고, 태화동을 예술 마을로 바꾼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원도심의 황홀한 밤거리를 걸으니 안동의 내일이 더욱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