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아타카마 사막에는 거대한 쓰레기 산이 있다. 기부 또는 재활용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우리 옷장을 떠난 옷들의 무덤이다. 김은하 작가는 쓸모없어진 헌 옷으로 작품을 만든다. 그의 전시는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옷들의 장례식이다. 거창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작업은 아니지만,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김은하 작가를 만났다.

거짓말 같은 사건
기회는 스팸 메시지처럼 찾아왔다. 2019년 겨울, 인스타그램 DM이 도착했다. 졸업 전시에 출품한 작품을 영국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인이 한국 미술대학의 졸업 전시를 보고 학생 작품에 관심을 갖는다고?’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스팸 메시지로 생각했지만 김은하 작가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답장을 보냈다. DM을 보낸 이는 영국의 미술 컬렉터이자 큐레이터인 데이비드·세레넬라 시클리티라 부부였다. 2008년 현대미술 후원 비영리 기관 PCA(Parallel Contemporary Art)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한국 작가 후원 전시 <코리안 아이(Korean Eye)>를 주최해 온 이들이다. 교수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축하 메시지와 함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주최하는 전시에 참여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컬렉터 부부에게 다시 메일이 왔다. 김은하 작가의 작품을 <코리안 아이 2020 특별전: 창조성과 백일몽>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해도 되는지 동의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김은하 작가의 패브릭 설치 작품 ‘Bon appetit!(많이 드세요!)’는 컬렉터 부부에게 판매됐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국립 미술관과 영국 런던의 사치 갤러리, 잠실 롯데월드타워몰 등을 여행했다.
이웃에 사는 김은하
김은하 작가는 헌 옷을 재활용해 패브릭 작품을 만드는 현대미술가다. 버려진 옷이 후진국으로 수출돼 쓰레기처럼 방치되고, 동네 강아지들이 옷을 먹는 장면에 충격받아 헌 옷을 소재로 삼았다. 그렇게 시작한, 유행 따라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패스트 패션과 화려하지만 영양가 없는 패스트푸드를 현대사회에 빗대어 표현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졸업 전시가 열린 2019년 겨울, 김은하 작가는 평범한 취업 준비생이었다. 학원을 다니며 취업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독창성도 표현력도 부족해 전공인 서양화로는 전업 작가가 될 수 없었기에 택한 현실적인 타협이었다. 그러다 유명 컬렉터에게 작품이 판매되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미래를 위해 착실하게 기술을 익힐 것인가, 꿈꿔 왔던 작가가 될 것인가. 오랫동안 놀이처럼 패브릭 작업을 해 왔기에 만들고 싶은 것이 많았다. 결국 미술 학원 강사로 입시 미술을 가르치며 개인 작업을 지속했다. 좁은 작업실에서 헌 옷과 씨름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먼지처럼 시간이 쌓였다. 세상도 움직였다. 쓸모를 잃은 헌 옷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에 주목하는 이가 많아졌고, 지속 가능한 일상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협업 제안도 늘었다. 현대미술가나 패브릭 작가라는 타이틀 외에도 재활용 작가, 기후 활동가라는 수식이 붙었다. 자연스럽게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고, 그 고민이 김은하의 방식으로 작품에 담기기 시작했다.


‘Bon appetit!’는 작가가 입던 헌 옷으로 만들었다.

졸업 전시에서 판매된 ‘Bon appetit!’는 대형 햄버거 모형이었어요. 어떻게 만든 작품인가요?
원래 패브릭 작업을 했어요. 유행 지난 청바지나 작아서 못 입는 옷으로 에코백이나 스커트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패브릭으로 손바닥보다 작은 오브제를 만들었죠. 졸업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작업의 크기를 키워 보기로 했어요. 재료를 찾기 위해 옷장을 뒤져 안 입는 옷들을 꺼냈죠. 초등학생 때 입던 옷, 학창 시절에 단체로 맞춘 ‘반티’ 같은 앞으로 절대 입지 않을 옷이 많았어요. 알록달록한 옷이 쌓여 있는 모습이 꼭 햄버거 같더라고요.
이전에도 패브릭으로 작업했다고 했는데 어떤 작업이었나요?
그때도 햄버거와 피자를 만들었어요. 형식은 조금 달랐죠. 서양화 전공자이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작업을 전공과 연결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패브릭으로 형태를 만들고 유화 물감으로 칠했죠. 그런데 기대했던 미감이 구현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패브릭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활용하기로 했어요.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착시를 일으키면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실제 크기로 제작한 햄버거를 학교 구내식당에 전시하기도 했어요. 음식인데 못 먹는 음식인 거죠.
서양화 전공자의 스케치 능력은 어떻게 발산하고 있나요?
계획적으로 스케치하고 재료를 고른 다음 작업하면 좋겠지만, 사실 제 작업은 즉흥적이에요. 즉흥적인 변화가 뭉쳐져 완성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좀 더 회화적이죠. 재료도 정해 두지 않고 비교해 가면서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요. 시행착오가 많죠. 어울릴 것 같아 꿰매거나 붙였는데 안 어울리면 뜯어 내고, 더 잘 어울리는 걸 발견하면 수정하고. 그림 그릴 때도 마찬가지예요. 입시 미술을 예로 들면, 소위 말하는 합격 공식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같은 결과에 이르는 다른 과정을 좋아했어요. 배운 대로 하지 않는다고 많이 혼났죠. 그런데 과정이 다를 뿐 결과물은 같거든요. 이런 방식이 제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인데, 그림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어요. 패브릭 작업도 마찬가지고요.
헌 옷에 담긴 이야기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궁금해요.
제 헌 옷은 이제 없어요. 지인들이 옷장 정리를 하고 보내 주거나 지인의 지인이 보내 주는 경우가 많죠. 예전에는 옷에 담긴 개인의 서사를 작업과 연결해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의미를 담으려고 하니 작업이 자유롭지 않더라고요. 고민 끝에 개인의 이야기를 담기보다 완성된 작품 사진을 보내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헌 옷 주인을 전시에 초대하기도 하는데, 작품 안에서 자신의 옷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면서 좋아해요.
작품에 헌 옷 주인만 알 수 있는 시그널을 남기기보다 작품으로 작가와 헌 옷 주인, 관람객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네요.
맞아요. 그렇게 하니까 자유로워지더라고요. 물론 타인의 헌 옷으로 작업하면서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들어요. 택배로 보내면서 옷마다 설명을 붙여 보내는 분도 있고, 가까운 지인들은 전화로 옷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해요. 헤어진 남자 친구가 선물한 옷이라 입기도 버리기도 난감해서 보낸다는 분도 있고요. 이야기를 듣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고맙기도 하고 더 소중하게 다루게 돼요. 예쁜 작품으로 만들어 보여 주고 싶고요.
작가는 작품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재활용이나 업사이클링 관점에서 어떤 얘기를 하고 싶나요?
부모님께선 늘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싫어서 숙제처럼 읽었는데, 그 영향인지 다큐멘터리 보는 걸 좋아해요.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뉴스가 들리면 귀 기울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도 해요. 그렇다고 제가 환경운동가는 아니에요. 대단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작업도 아니고 작업을 하면서 저도 함께 성장하는 중이에요. 다만 헌 옷을 소재로 삼으면서 옷에 담긴 사연을 접하게 돼요.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쓰레기 같아 보이는 물건도 쓸모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죠. 저에게 들려주는 사연을 스스로 한 번씩 곱씹으면 물건을 더 소중하게, 더 오래 사용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자연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했어요.
헌 옷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환경오염 문제나 쓰레기 문제에 관심이 생기고, 식물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어요. 무거운 주제를 위트 있게 풀어내는 방법을 고민했죠. 그러면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좀 덜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조금 엉뚱한 생태계를 상상하기도 해요. 헌 옷을 다루다 보면 좀벌레가 많이 나오는데, 좀벌레는 섬유질을 양분으로 하거든요. 만약 아타카마 사막의 쓰레기 무덤처럼 세상이 버려진 옷으로 뒤덮인다면 좀벌레처럼 헌 옷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어요. 일종의 돌연변이 곰팡이처럼요. 그러다 천연섬유에 곰팡이처럼 버섯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독버섯을 만든 거예요. 지구에서 태양이 멀어지고 있대요. 언젠가는 빛을 흡수하는 양이 줄어 식물의 색이 사라질 수도 있겠죠. 그래서 무채색의 식물도 만들어 봤어요.
혼탁한 세상을 귀여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귀엽고 예쁜 오브제를 만든다고 얘기한 적이 있지요? 작가님의 생태계는 디스토피아적이네요.
작업을 하면서 본심이 튀어나온 것 같아요. 상상력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비관적인 성향이 있어요. 예전에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살기 편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더 ‘비관력’이 올라온 상태예요. 이대로라면 독버섯에 잡아먹힐 것 같아 멈춘 상태이고, 요즘은 자연에 가까운 음식을 만들고 있어요. 다시 세상을 귀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브랜드 협업은 작가님께 어떤 영향을 주나요?
협업을 제안하는 브랜드는 대체로 제 의견을 존중해 줘요. 물론 큰 틀은 상의하는데 자율성을 주죠. 혼자 작업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은 제가 도움을 받을 때도 많아요. 브랜드 담당자들과 얘기하는 과정에서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거든요. 저의 생각을 더 확장해 주는 느낌이랄까. 물론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니고요.
요즘 어떤 작업을 하나요?
지난 12월에는 에르메스와 협업해 워크숍을 진행했고, 개인 작업은 초기 작업을 확장하는 중이에요. 한동안 재봉틀로 작업했는데 기계를 쓰려면 계획적이어야 하더라고요. 지금은 손바느질과 본드를 사용하는 초기 작업으로 돌아가, 재료를 즉흥적으로 해체하고 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물론 이전과 똑같지는 않을 거예요. 버섯이 상상으로 빚어 낸 디스토피아적 생태계였다면,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해 보고 싶어요. 어느 방향으로 확장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