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한가운데에 자리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14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진 군도다. 그 작은 섬 중에서 인류가 ‘살기로’ 선택한 땅, 사이판과 로타, 티니안의 야생 자연을 탐험했다.


극한의 사이판
사이판에서는 마를 틈이 없었다. ‘날씬’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안락한 올인클루시브 리조트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면 갈 곳은 물가뿐. 섬에 머무는 내내 몸을 옥죄는 수영복 위에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래시가드까지 겹쳐 입은 채 몸을 말릴 새도 없이 바깥을 쏘다녔다. 첫 행선지는 그로토(Grotto). 보통 자연이 빚은 동굴을 말하지만 여기선 고유명사로 쓴다. 섬 북쪽, 한때 이 지역을 삼키려고 했던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 절벽(Suicide Cliff) 근처에 있는 수중 해식동굴 얘기다. 그로토에 가기 전 내가 쥐고 있던 정보는 ‘세계 3대 다이빙 명소’뿐이었다. “그럼 다이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일정을 짠 동행에게 호기롭게 의욕을 내비쳤다. 그로토는 사이판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이고, 그런 이름난 관광지에는 자격증은 없고 바닷속엔 들어가 보고 싶은 욕심꾼을 위해 ‘체험 다이빙’이란 패키지가 존재하니까. 출발 전날 현지에서 ‘스노클링 먼저 해 보고 말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로토로 이어지는 117개의 계단 끝에서 ‘날 뭘로 보고…’ 했던 마음을 물렀다. 보기 아름다운 것과 겪기 아름다운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신생대부터 바람과 파도가 깎고 벼른 이 오래된 터는 진입부터 쉽지 않았다. 뭍에서 바로 뛰어들었다간 거센 물살에 휩쓸려 절벽에 부딪히거나 떠내려가기 십상. “그래서 그로토는 절대 혼자 와서 즐기면 안 됩니다. 자격증이 있는 가이드와 동행해야 해요.”
힘 좋은 가이드 셋의 도움을 받아 발목을 산산조각 낼 기세로 밀어닥치는 물살을 건너 너럭바위에 안착하면 진짜 공포가 기다린다. 2~3미터 높이에서 낙하해 깊이 21미터의 해저로 뛰어드는 일 말이다. 수영은커녕 구명조끼를 입고도 물에 못 뜨는 나는 고소공포증 호소인처럼 꽤 오래 주저했다. 주저앉으려는 몸짓을 뛰어들겠단 몸짓으로 해석한 가이드가 냅다 밀어 던진 덕분에 마침내 그로토의 차가운 품에 안착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부력과 옥신각신하며 수면에 겨우 엎드렸다. 조악한 물안경의 흐린 시야 사이로 보이는 동굴 아래 풍광은, 그걸 눈에 담기 위해 벌인 고투가 억울하지 않을 만큼 황홀했다. 온갖 형태의 산호와 색색의 열대어, 스펙터클한 지형보다 내 넋을 훔친 건 발광하는 푸른빛. 천창처럼 난 동굴의 구멍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만든 그 물빛은 꼭 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의 신비로운 피부 같았다.
다음 날에도 채 마르지 않은 수영복과 래시가드 안에 물과 땀, 더위로 불어난 몸을 꾸역꾸역 욱여넣고 나왔다. 오늘은 스마일링 코브 마리나(Smiling Cove Marina)에서 멀미약을 털어넣고 낚싯배 위에 오르는 날. 타나파그 리프(Tanapag Reef) 안쪽에서 엔진을 끈 선장님은 “잘만 하면 그 비싼 다금바리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로 초보 낚시꾼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아쉽게도 태평양의 물고기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끼로 끼워 넣은 비싼 오징어만 헌납한 채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가 연달아 잡은 이름 모를 물고기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손맛을 보는 덴 실패했지만 눈요기는 쏠쏠했다. 그날 스노클링을 하며 만난 열대어, 매가오리와 깃대돔, 가시나비고기, 노랑양쥐돔 같은 물고기들은 이름만큼이나 색, 무늬, 모양, 몸놀림이 화려했다. 낚시와 스노클링을 마치고 타나파그 리프의 꽃이자 이 섬의 관광 통계 수치를 높이는 최고 인기 스타, 마나가하섬(Managaha Island)에서 낮잠과 해수욕까지 즐기니 ‘꼭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한 기분이다.

야생의 로타
“로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침략을 피해 간 섬입니다. 차모로족은 이 섬을 수호하는 정령이 그 액을 막았다고 믿어요. 로타가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어 배를 정박하고 상륙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있긴 하지만….” 로타에 삶을 정박시킨 다이버 알레한드로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말리럭(Maliluk) 정글 안에 숨어 있는 누누 트리(Nunu tree) 앞에 서 있다. 차모로어로는 나나 누누(nåna nunu), ‘조상들의 어머니’란 뜻이다. 차모로 사람들은 바위나 나무의 갈라진 틈 같은 데에 타오타오 모나(taotao mo’na), 즉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맘먹고 뛰어올라도 나무의 정강이쯤 되는 높이밖에 닿지 못하는, 수천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줄기들이 얽히고설킨 이 벵골보리수는 정령의 탯줄 같았다.
“차모로에는 깊은 정글에 들어갈 때 꼭 누누에게 인사하고 허락을 받는 풍습이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기시감을 느낀다. 제주에서도 이런 나무를 본 적이 있다. 깊은 숲속, 기개 좋게 뻗어 나간 가지와 성성한 잎이 무리 지어 있는 밑동 굵은 나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스산한 분위기,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찬 바람이 불던 당나무 터. 할망 무당이 섬을 지켜 달라고 기도를 올리고 굿이 벌어지는 폭낭(마을을 지키는 신령이 깃든 당나무)과 누누 트리를 둘러싼 공기는 놀라울 만큼 닮았다. 이런 나무 앞에선 어쭙잖은 장난을 치면 안 된다. 나무 주변을 한 바퀴 휘돌면서, 수십 년 된 경비행기를 타고 사이판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기도했다.
여행지로서 로타의 매력을 발견한 건 스쿠버다이버들이다. 다이빙 좀 한다는 이들에게 쇼운마루(Shoun Maru) 포인트는 버킷 리스트로 꼽히는 곳. 1944년 미국의 공중 어뢰에 의해 침몰한 일본 화물선 쇼운마루는 소산자야 베이(Sosanjaya Bay) 아래, 수심 33.5미터 깊이의 해저에서 과거를 잊은 채 열대어의 놀이터가 됐다. 어쩌면 로타에선 수중 동굴 센하놈(Senhanom)의 구멍 사이로 태양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들어오는 로타 홀(Rota Hole), 산호는 꽃이 되고 열대어는 나비처럼 그 안팎을 나부끼는 낭만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코럴 가든(Coral Garden) 주변이 땅 위보다 인구밀도가 더 높을지도 모른다.


평온한 티니안
사이판 국제공항 옆에는 임시 대기 장소 같은 야외 벤치와 컨테이너 몇 채가 있다. 공항 직원들이 끽연을 하거나 쉬는 공간인 줄 알았던 그곳이 바로 티니안과 로타로 넘어가는 국내선, 스타 마리아나스 에어의 터미널이다. 티니안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 생소한 과정, 그러니까 인류가 하늘을 날아 이 땅에서 저 땅으로 넘어가는 행위가 갓 태동하던 시절에 있었을 법한 일을 겪는 것에서 시작된다.
공항에서 렌터카를 타고 몇 분 달려 나가면 티니안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시원하게 뚫린 브로드웨이(Broadway)가 나타난다. 남쪽 부두와 북쪽의 노스 필드(North Field)를 잇는 이 10.3킬로미터의 직선로는 1945년, 미군이 ‘티니안 하이웨이’라는 이름으로 구축한 고속도로. 뉴욕의 쭉 뻗은 브로드웨이와 닮았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 현재의 이름이 됐다. 그 길 초입에 자리한 타가 비치(Taga Beach)는 압도적인 물빛으로 방문객의 발목을 붙든다. 고대 차모로 왕족 타가 가문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3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다이빙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쌀뜨물에 파워에이드를 풀어 놓은 듯한 바다에 몸을 적실 수 있다. 그 아래 타촉냐 비치(Tachogna Beach)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군락과 바비큐 덱을 갖춘 해변 공원도 있어 지역민들 사이에서 소풍지로 인기가 높다. 휴양지로 이름난 섬의 수심이 얕고 물살이 잔잔하며 물빛이 아름다운 바다엔 스노클링이나 카야킹, 스탠드업 패들링을 즐기는 이들이 풍경을 채우기 마련인데, 내가 찾은 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근해에 악독한 해파리라도 출몰했나 싶었지만 그냥 말 그대로 ‘인적이 드문 섬’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손 타지 않은 자연과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 안을 누비는 고요한 모험을 간절히 원했다. 막상 그런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니 간사함이 요동친다. 마을 하나 찾을 수 없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적막은 끝없이 깊어졌고 슬슬 사람 냄새가 그리워지던 차, 어디선가 조악한 스피커로 내보내는 음악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여기는 출루 비치(Chulu Beach)예요. 별 모양으로 부서진 산호 모래가 아주 예쁜 풍경을 만드는 해변이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차 문을 여는데 저 멀리 쿵짝 소리의 발원, 텐트와 간이 부엌, 의자, 테이블로 캠프 사이트를 구축하고 맥주를 들이켜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무인도에 사흘 갇혔다 나온 사람이라도 되는 양 한달음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당신은 누구고 우리는 누구이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고 우리는 뭘 하러 이 섬에 왔는지 같은 대화를 주고받기도 전에 내 손에 음식이 한가득 담긴 접시가 들렸다. 그들이 ‘일단 먹고 시작하자’고 준 그 음식은 꿈에서도 못 먹어볼 것 같았던 코코넛크랩이었다. 맵기로 유명한 티니안 특산 고추 도니 살리와 코코넛 워터, 토마토, 라임과 각종 채소를 푸짐히 넣고 한 솥 가득 쪄 낸 ‘티니안 엄마표 코코넛크랩 요리’에 아이스박스에서 갓 꺼낸 시원한 음료까지 곁들이니 한시라도 빨리 (사람 많은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들이 나무에 매단 해먹에 누워 낮잠 한숨 자다가 물비늘이 발광하는 출루 비치의 맑은 바다에 달궈진 몸을 식히고, 노을 앞에서 넋을 놓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구가 비강까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