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일라이다의 수원 행궁동 나들이

2026년 04월 01일

  • WRITER 박진명(헤이! 트래블 기자)
  • PHOTOGRAPHER 조수민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은 2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을 품어 주는 든든한 터전이다. 튀르키예계 독일인 일라이다와 함께 고즈넉한 성곽 길을 걷고, 견고한 성벽을 이웃 삼은 행궁동 골목 곳곳의 매력적인 공간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를 향한 효심의 길, 수원화성

“화서문에서 내려 줄게요. 장안문 쪽으로 걸어가며 내려다보는 행리단길 풍경이 예쁘거든.” 택시 기사에게 수원화성에 간다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맞춤형 동선을 일러 준다. 그의 말마따나 조선의 건축미와 근대의 흔적이 교차하는 풍경을 굽어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치 가 본 적 없는 시간의 틈새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저는 고택이나 성곽 같은 역사적 장소를 좋아해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는 시대에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켜 온 것을 보면 안정감이 들거든요”라며 일라이다가 거든다. 이 거대한 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해 품은 마음속 약속이기도 했다.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옮기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정조는 국방과 경제를 동시에 강화할 전략적 요충지로 수원화성을 축조했다.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되새기며 일라이다와 수원화성 성곽 길을 천천히 걸었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나혜석을 추억하며, 패터슨커피

수원을 여행하다 보면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자주 만나게 된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성운동 선구자인 나혜석의 생가가 이곳 행리단길에 있고, 행궁동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인계동에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조성한 나혜석거리가 자리한다. 행리단길 중심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패터슨커피는 나혜석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드립 커피 전문점으로, 나혜석의 자손이 운영하는 곳이다. 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실내에는 나혜석 관련 서적과 말 모양 오브제가 가득하다. 5년 전 승마 선수 출신 나진수 대표가 아내, 아들과 함께 카페를 시작했다. 아내가 오랜 시간 모아 온 빈티지 찻잔에 아들이 정성스레 내린 커피가 가득 담긴다. “깔끔한 산미와 묵직한 보디감이 레트로한 분위기와 더없이 잘 어울려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일라이다의 표정이 한껏 밝아진다. 패터슨커피의 자랑, 단호박 케이크는 어떤 맛일까. “단호박의 달콤한 맛과 폭신한 식감이 정말 매력적이에요.” 두 눈을 반짝이며 케이크를 먹는 일라이다를 보니 그 맛이 저절로 상상이 간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33

음악과 이색 메뉴가 있는 곳, 롱플레이어

수원 행리단길 탐험의 종착지는 LP 숍이자 바, 롱플레이어다. 평소 보이 밴드 데이식스의 곡을 즐겨 듣는다는 일라이다는 2층짜리 공간을 가득 메운 LP와 CD, 카세트테이프, 각종 음향 기기와 필름 카메라에 금세 매료됐다. 포크 록 뮤지션인 김동산 대표가 운영하는 이곳은 오후 6시가 되면 LP 박스가 바 테이블이 되고, 김 대표가 즉석에서 뚝딱 만드는 ‘오늘의 요리’가 식욕을 자극한다. ‘김치찌개와 크레이프’라는 종잡을 수 없는 메뉴 구성만큼이나 이곳의 밤은 자유롭다. “베를린은 밤새 클럽에서 테크노를 즐기는 반면, 한국은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더라고요.” 얼마 전 데이식스 콘서트 티케팅에 실패한 일라이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연태고량 하이볼 한 잔이 테이블에 놓인다. 김 대표가 고량주 팝업 행사에서 선보인 메뉴다. 연태고량주의 알싸한 맛이 짜릿한 탄산수와 섞여 청량하게 입안을 적신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감미로운 음악이 뒤섞인 행궁동의 밤이 로맨틱하게 물들어 간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886번길 12

일라이다 아심길

방송인이자 모델. 한국전쟁 참전 용사의 후손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왔다. 지난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국제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새로운 커리어를 찾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인 친구를 통해 한국 문화를 처음 접했고, 2018년 성인이 되자마자 첫 배낭여행지로 한국을 택했다. 그의 한국살이는 올해로 8년째. 쾌활한 성격에 호기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