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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충만한 풍경, 충남 I

2025년 02월 07일

  • EDITOR 강은주
  • pHOTOGRAPHER 전재호

서쪽 바다의 너그럽고 온화한 품에 몸을 맡겼다. 충남 서해안권 여섯 도시가 안긴 충일한 기쁨을 여기 펼친다.

바다의 시간을 걷다

서천·보령·태안·서산·홍성·당진

시간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서해로 떠났다. 끝없이 밀려오고 쓸려 가는 바다, 저 바다의 넉넉한 어깨에 깃들여 살아온 무수한 생명을 생각하는 여정이었다. 자연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주무대 갯벌, 꽃망울 같은 섬들이 피어난 해변, 파도와 바람의 손길에 부서진 기암괴석과 드넓은 모래언덕, 바닷길을 따라 내포에 흘러든 문물과 고유한 문화. 이 모든 풍경에 흐르는 온기 어린 이야기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충남 서해안권에 늘어선 여섯 도시, 서천·보령·태안·서산·홍성·당진을 잇는 느슨한 길이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를 가만가만 위로해 주었다.

① 서천 & 태안 지질 기행

연흔을 따라서

바람이 만든 물결 모양의 흔적, 연흔을 따라 서천갯벌과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를 걷는다. 천변만화하는 눈구름이 이 여정에 동행했다.

지극히 서해다운 풍경,
서천갯벌
눈, 눈, 눈 하며 천천히 흩날리던 싸락눈이 눈 깜짝할 새 함박눈으로 쏟아진다. 회청색 갯벌과 짙푸른 솔숲의 경계를 지우는 흰 눈을 바라보며 장항스카이워크에 발을 디뎠다. 15미터 높이의 아찔한 전망 대로 이루어진 장항스카이워크 한복판에 이르자 완만한 전망산 능선 위에 불쑥 솟아오른 장항제련소 굴뚝, 유부도와 대죽도의 연한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드넓은 장항송림엔 눈이 소금처럼 내려앉아 있다. 비로소 서쪽 바다에 다다랐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눈이 연흔을 따라 고요히 쌓였으니, 반복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추상회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캔버스는 한국의 열세 번째 람사르습지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서천갯벌. 펄과 모래가 섞여 풍부한 종 다양성을 간직한 이곳은 무수한 생명의 집이며 놀이터다. 고요하기만 한 갯벌 안쪽엔 농게, 칠게, 방게, 바지락, 동죽, 맛조개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갑오징어와 주꾸미, 대하, 갯가재도 저 바다 어디쯤 몸을 기대어 산다. 흰뺨검둥오리와 청둥오리, 저어새와 도요물떼새 또한 올겨울 어김없이 날아왔을 테다.

서천갯벌과 장항스카이워크
울창한 장항송림이 바다와 땅을 가로지른다. 늦여름이면 이곳에 보랏빛 맥문동이 피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솔숲과 서천갯벌을 굽어보는 장항스카이워크가 이 고장의 늠름한 이정표다.
주소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 산58-48
문의 041-956-5505

낯선 바다에서,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슬로모션으로 내리던 눈은 태안반도 북부 해안에 펼쳐진 신두리 해안사구에 닿아 혹독한 눈보라로 변모했다. 모래언덕에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엷게 쌓인 눈송이가 드라이아이스의 부연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사막에 눈이 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낯설어서 아름다운 풍경이란 신두리의 겨울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길이 약 3.4킬로미터, 광막한 사구가 펼쳐 내는 극적인 움직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 선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모래알이 1만 500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쌓이면 이처럼 거대한 언덕이 된다. 빙하기 이후, 바닷물에 잠겨 있던 모래가 썰물 때 바람을 타고 해변에 밀려오면서 지금의 신두리 해안사구를 형성했다. 강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드넓게 펼쳐진 사구는 자연스레 바다와 땅 사이의 울타리가 되어 마을과 농토를 보호해 왔다. 도마뱀 같은 파충류와 해당화·통보리사초 등 염생식물, 2023년 생태환경 복원을 위해 방사한 멸종위기종 소똥구리까지 넉넉히 품었음은 물론이다. 황량하고 쓸쓸한 계절의 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생명 활동을 상상한다.

신두리사구센터
해안사구의 지형적 특징과 풍부한 생태계를 입체적인 전시물로 만난다. 모래를 손으로 쥐고 감각할 수 있는 체험 공간에서
사구의 신비로움을 몸으로 느낀다.
주소 태안군 원북면 신두해변길 201-54
문의 041-672-0499

② 홍성 & 당진 건축 산책

공간과 공간 사이

육지 안에 발달한 포구를 뜻하는 ‘내포’란 지명은 오늘날 충청도 서북부권을 아우른다.
내포 지역에 자리한 두 건축물, 홍성 이응노의 집과 당진 신리성지를 살펴본다.

풍경의 건축,
홍성 이응노의 집

완만한 산기슭에서 너른 갯벌로 이어지며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충남 땅은 예부터 걸출한 예술가를 배출해 왔다. 예산의 김정희, 서산의 안견, 공주의 이상범, 연기의 장욱진, 그리고 홍성의 이응노. 홍성이 아직 홍주였던 1904년, 홍천면 쌍바위골의 조촐한 초가에서 고암 이응노가 탄생한다.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또렷하고 아름다운 족적을 남겼다. ‘문자 추상’과 ‘군상’ 연작으로 독보적 조형 세계를 구축했으며, 투옥 당시에는 밥풀을 모아 조각을 하거나 휴지에 그림을 그리며 예술혼을 살랐다.
이응노의 집,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은 고암의 예술적 생애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대지의 지형을 탁월하게 이용하는 건축가 조성룡의 설계로 지은 황톳빛 건물은 마치 땅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온화하고 자연스러워 고암의 고단했던 삶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주요 작품과 자료가 여백을 두고 늘어선 로비엔 적절한 빛과 어둠이 드리우며 관람객을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복원한 생가 터, 아늑한 북 카페, 성성한 대숲을 차례로 거닐고 나면 덧없는 상념과 번뇌가 고요히 가라앉는다.

이응노의 집
격동의 세월을 통과한 이응노의 삶을 다양한 자료로 만난다. 육필 편지와 각종 기사가 당대 상황을 실감하게 하고, 그의 수묵화를 입체로 구현한 조형물이 자연을 손끝으로 느끼게 한다.
주소 홍성군 홍북읍 이응노로 61-7
문의 041-630-9232

이 땅을 위한 기도,
당진 신리성지

내포(內浦)는 서해의 바닷물이 유입되는 하천과 습지, 논 등지를 뜻하다가 충청도 서북부를 가리키는 지명이 됐다. 조선 후기, 육로와 수로가 동시에 발달한 이 지역에 새로운 사상이 흘러들기 시작한다. 하늘 아래 반상이 따로 없음을 설파한 급진주의, 천주교다. 1845년 10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이 땅에 첫발을 디딘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866년 순교하기 전까지 21년간 조선의 낮은 자들에게 임하며 선교의 사명을 다했다.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당시 가장 큰 규모로 교우촌을 이룬 당진의 신리 일대에 머물렀다. 신리는 ‘조선의 카타콤’이라는 수식어처럼 선교사들의 은신처이자 비밀 기지로 기능하며 한반도와 세계를 연결한 장소다. 숭고한 역사를 간직한 신리성지에 2017년 건축가 김원의 설계로 내포 갯벌의 색깔을 닮은 순교미술관이 올라섰다. 이종상 작가의 순교 기록화 13점을 전시한 6층 건물로, 꼭대기층 전망대에 오르면 나지막한 둔덕과 들판에 드문드문 자리한 성당, 경당, 주교관을 복원한 초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양곡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 카페 ‘치타 누오바’는 이 짧고도 농밀한 여정의 근사한 마침표가 되어 준다.

신리성지
숭고한 정신이 느껴지는 성지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몸과 마음을 씻는다. 성 다블뤼 주교관과 순교자기념관, 순교미술관 등을 한붓그리기 하듯 둘러볼 수 있다.
주소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문의 041-363-1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