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은 서로 반대라고 생각하는 두 개념이 자유분방하게 뒤섞이는 도시다. 전통으로 새로움을 만드는 젊은 로컬, 오래된 것에서 미래를 모색하는 동네에서 발견한 이스탄불의 지금.
WEST
서쪽, 젊은 동네들



발라트로 들어서는 거리 초입, 자주색 헤링본 재킷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남자가 발라트 메르케즈 셰케르지시(Balat Merkez Şekercisi)라고 쓰인 가게 앞에서 사탕을 건넨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캔디 숍이에요. 187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죠.” 우리를 미지의 이스탄불로 이끌어 줄 가이드, 사키스의 설명을 들으며 달콤한 환영을 입안에 넣고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이곳에선 몇 걸음 떼지 않아도 누구나 ‘괜스레 설레는’ 기분으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속 세트장 같은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꼭 놀이공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채색된 그 건물들은 짧게는 50년, 길게는 200여 년 전에 지어진, 텅 빈 채로 오래 방치된 집들이었다. 1985년 유네스코가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 시절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동네에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영예를 안긴 후 2000년대부터 낙후한 빈민가를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발라트는 옛 시절의 영광과 생기를 되찾았다.
관광객이 사진발 좋은 옛 건축물 앞을 눈과 카메라로 훑으며 빠르게 지나칠 때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골목 안쪽에 숨은 매력적인 카페와 식당, 바와 상점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스탄불 스페셜티 커피 신의 1세대 중 한 곳인 커피 디파트먼트는 동네의 정다운 시간을 엿볼 수 있는 아지트. 삼삼오오 둘러앉아 커피점을 보거나 주말 계획을 나누는 세련된 행색의 로컬 안에 자연스럽게 섞이기 좋은 공간이다. “볕 좋은 여름이면 이 지구 일대는 노천 테이블과 햇빛을 즐기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옛날부터 자리를 지킨 오래된 가게도 많지만 새로운 레스토랑과 카페가 속속 들어서고 있거든요.” 사키스가 말한 그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젊은 인파로 붐비는 보디나(Vodina) 거리로 향할 것. 포노 발라트(Forno Balat)는 2015년부터 보디나 거리의 인기를 이끈 터줏대감이다. 밀라노의 깜찍한 피자가게 같은 안쪽 공간에 들어서면 온갖 신선한 채소와 치즈, 갓 구운 빵과 올리브가 탐스럽게 놓인 메제(mezze, 튀르키예 사람들의 반찬 혹은 전채 요리) 뷔페가 눈에 띈다. 돌화덕에서 갓 구워 내는 피데(pide, 납작한 빵 위에 다양한 토핑을 올려 화덕에 구운 음식) 한 판을 시켜 브런치 데이트를 하는 젊은 연인, 주말을 맞아 외식을 나온 가족들 틈에서 평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오후의 행선지는 카라쾨이(Karaköy). 유럽 지구로 통하는 이스탄불 서쪽에서 주말이면 인구밀도가 치솟는 지역으로 손꼽히는 동네다. 13세기 제노바공화국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던 이 지구는 유대인, 그리스인, 러시아인 커뮤니티까지 품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항구로 급부상했다. 19세기에 무역 산업이 쇠퇴하면서 옛 부호와 거상이 세운 거대 창고와 상점은 지역 상인들이 차지했다. 그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전통 음식점과 빵집, 골동품 가게와 시장이 카라쾨이의 옛 모습을 여전히 지키는 가운데 현대적인 갤러리와 부티크, 화려한 네온사인과 포스터로 행락객의 발길을 끄는 바와 레스토랑, 카페들이 미로 같은 거리를 사이좋게 공유한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기념사진을 남기는,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하늘을 수놓은 호자 타흐신(Hoca Tahsin) 거리 아래 노천카페와 바클라바(baklava, 견과류로 만든 튀르키예 디저트) 맛집 귈뤼올루(Güllüoğlu)의 유혹을 뿌리치고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릿한 짠내를 따라 부두로 걸어갔다. 19세기 오스만제국 시절의 은행 건물을 개조한 복합 문화 공간 살트 갈라타(SALT Galata) 안을 한 바퀴 돈 후 밖으로 나오니 이스탄불 현대미술관(Istanbul Museum of Modern Art)이 걸음을 붙든다. 보스포루스해협의 물빛을 그대로 품은 아름다운 파사드가 특징인 이 건축물은 렌초 피아노의 역작으로도 유명하다.
그날 미술관 안까지 들어가 시간을 보낼 계획은 없었지만 일행과 함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로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붉은 실을 엮어 만든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설치 미술가 치하루 쇼타와 튀르키예 사진계의 거장(이라고 소개된) 이제트 케리바르의 전시를 지나 올라퍼 엘리아슨의 개인전이 한창 열리는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빛과 물, 공기와 색 같은 자연 요소로 만든 그의 시적인 작품들을 제치고 내 마음을 훔친 건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을 즐기는 이스탄불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선명한 스카프를 히잡으로 두른 채 SNS에 올릴 쇼츠와 기념사진을 ‘예술적으로’ 남기는 일에 열중하는 여대생들. 그 얼굴 뒤로 아른거리는 비잔틴제국의 유산, 갈라타 타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스탄불의 ‘모던’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보수와 전통 위에서 자기만의 ‘현대’를 쌓아 가는 이스탄불 사람들 말이다.
EAST
동쪽에서 만나는 로컬의 일상



“모다(Moda)는 튀르키예어로 ‘패션, 유행, 스타일’ 등을 뜻해요. 19세기 말 이스탄불에 거주하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상류층이 이 지역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맨션을 지어 살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집과 생활양식, 패션 등이 모다를 중심으로 유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전해지죠.”
모다 선착장(Moda Iskelesi)의 부두 끝에 등대처럼 선 20세기 초 신고전주의 건축물 앞에서 사키스가 바다를 등지고 유창하게 설명을 잇는다. 이스탄불의 부촌으로 불리는 모다의 일요일 아침은 휴양지처럼 느긋하고 평화롭다. 길에서 만난 산책자 열 중 일곱은 온갖 멋을 다 부린 반려견과 함께였고, 바다에선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한 조정 클럽 회원들이 활기차게 노를 젓고 있었다. 과거 유럽인의 사교 클럽으로 쓰였던 이 건축물은 이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공 도서관이 됐다.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2층의 도서관으로 올라가면 창밖으로 마르마라해(Marmara Sea)의 수평선을 한 품에 안을 수 있는 책상과 고소한 새 책 냄새가 진동하는 책장, 그걸 다 공짜로 누리는 이스탄불 사람을 만난다. 그 옆에 앉아 ‘바다 멍’을 즐기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누르고 다시 길을 나섰다. 동네 분위기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모다 거리(Moda Cd.)의 풍경을 눈과 카메라에 서둘러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카페가 즐비한 이 길에서 동네 사람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공간은 크로노트롭(Kronotrop). 튀르키예 전역에 지점을 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로 모다 지점엔 바와 이터리, 로스터리가 함께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족, 강아지, 친구, 연인과 함께 찾는 이들로 북적인다. 커피 향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크로노트롭의 노천 테이블에 눌러앉았다. 갓 구운 애플파이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가는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와 잡담을 나누며 로컬이라도 된 양 호사스러운 휴식을 즐겼다. 모다가 속한 카드쾨이(Kadıköy) 지구는 한국의 명동 같은 지역. 주말이면 밥과 차, 영화, 공연, 쇼핑을 즐기기 위해 쏟아져 나온 이스탄불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란 뜻이다. 그 안을 비집고 들어선 카드쾨이 바자르에서 장미 오일, 꿀, 말린 과일, 견과, 올리브 절임 따위를 잔뜩 산 후 서둘러 차에 올랐다.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쿠즈군주크(Kuzguncuk)는 ‘이스탄불 MZ들이 사랑하는 동네’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 내게 튀르키예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건넨 이름이다. “이곳은 1970년대, 이스탄불의 동과 서를 잇는 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진 하루에 단 한 대만 운항하는 배로 겨우 닿을 수 있던 외진 지역이었어요.” 금요일 오후 6시의 충무로역만큼이나 인파가 넘치는 이자디예 거리(İcadiye Cd.)에서 사키스가 말하는 ‘쿠즈군주크의 옛 시절’은 현실감이 떨어졌다. 온갖 아름다운 건물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민 카페, 베이커리, 다이닝, 갤러리, 상점이 즐비한 이 거리에서 나는 이스탄불에 품었던 선입견을 완전히 거뒀다. 고백하건대 모다와 쿠즈군주크에 닿기 전까진 이 도시를 ‘언뜻 세련되고 말쑥하며 멋스러워 보이지만 약간의 예스러움과 순박함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건축가 니코고스 & 카라펫 발리얀 형제가 설계한 19세기 바로크 &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 안에 들어선 나일 키탑에비 & 카페(Nail Kitabevi & Café), 프레디 머큐리를 쏙 빼닮은 주인이 직접 선곡한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바이닐 숍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같은 공간을 배회하다가 전날 만난 카페 벨벳의 오너, 육셀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이스탄불은 사는 사람에게도 낯선 도시예요. 그래서 새로운 동네에 갈 때마다 몰랐던 걸 발견하고 찾아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죠.” 이스탄불은 그런 곳이다. 정의하는 순간 진의에서 멀어지는, 자주 예측을 벗어나며 예상치 못한 순간에 놀라운 장면을 보여 주는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