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수묵水墨의 대화

2025년 11월 01일

  • WRITER 이미혜(미술 칼럼니스트, 독립 기획자)
  • PHOTOGRAPHER 서송이

동서양 거장들이 ‘수묵’의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기간 동안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빛의 고장에 그윽한 묵향이 번진다.

전통과 서구 미술 사이에서 정체성을 모색해 온 이응노는 1970년대에 이르러 인간 형상의 붓놀림과
서체 속에서 해체되고 융합되는 독특한 시각적 패턴을 형성했다. ‘주역 64괘 차서도’(1974).

곧은 볕이 내리쬐는 밝은 땅, 전남 광양(光陽)에는 예부터 예인이 많이 배출됐다. 넉넉한 백운산 자락과 섬진강의 느긋한 강물이 만나는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은 이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근원이었다. 2001년 옛 광양역 터에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은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국내외 미술 기관과 교류하며 지역의 예술성을 적극 소개하고 있다.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기념해 열리는 전시 역시 남도 수묵의 정신과 추상 미학을 기획의 뿌리로 삼는다. 한국의 단색화와 서구의 블랙 회화를 하나의 큰 줄기로 잇는 이번 전시는 공재 윤두서, 소치 허련 같은 한국 회화사의 서두를 장식하는 조선의 화가들부터 동양적 추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이우환·이응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미술의 중심지로서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던 1950년대 파리 화단의 주요 이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이응노의 ‘군상’ 연작은 인간 존재의 집단성과 시대적 아픔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조선의 수묵과 파리의 추상
먹의 농담으로 명암과 공간감을 표현하는 수묵화에서 빛은 어둠을 통해 드러난다. “블랙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생명과 빛을 머금은 여백의 공간이다. 여백은 결핍이 아니라 생동하는 존재이며 그것이 블랙에 숨결을 부여한다”라는 프랑수아 쳉의 문장(그의 책 <공허와 충만(Le Vide et Le Plein)>에서)으로 시작되는 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탄생한 70여 점의 작품을 통해 동아시아 미술과 서구 미술의 예술적 상호작용을 재조명한다. 내부를 블랙홀처럼 검게 칠한 전시장에서 국내외 작가 20여 명이 선보이는 회화와 도자기, 미디어 아트 작업은 장대한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빛과 어둠처럼 조응을 이루는 동서양의 이 블랙 회화들은 그저 연대기순으로 나열되지 않는다. 남도 수묵 남종화가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예술적 사유와 철학은 수묵화의 자유로운 붓놀림처럼 시대와 문화를 넘나든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은 공재 윤두서의 17세기 산수도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 화가인 그는 전통 남종화의 문맥 속에서 회화의 사실주의적 전환을 이끈 인물이다. 조선 팔도의 산세와 인물들을 생생히 담아낸 그의 회화는 단순히 현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 옆에는 남도의 풍광과 기운을 거침없는 필치와 절제된 담채로 구현한 소치 허련의 그림이 긴 족자 형태로 걸려 있다. 그는 조선 후기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근현대 호남 화단의 구심점이 된 인물로, ‘소치’라는 호는 특별히 그를 아끼던 스승 추사 김정희가 지어 준 것이다. 국보급의 이 조선 산수화들은 1950년대 전위예술의 한 축을 이룬 프랑스의 추상회화 운동 앵포르멜을 대표하는 앙스 아르퉁·피에르 술라주의 작품과 만난다. 아르퉁은 폭발적이고 즉흥적인 선, 스크래치 같은 파괴적인 흔적을 통해 전후 유럽 사회가 겪은 실존적 불안을 강렬한 작품으로 선보인다. 또한 ‘검은색과 빛의 화가’로 불리는 술라주는 흑경처럼 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화면을 통해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경계를 탐구한다. 캔버스 한가득 두껍게 쌓아 올린 검은 물감을 긁고 다듬어 완성한 2미터 크기의 작품 ‘회화’는 빛의 각도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은 남도의 수묵화가 머나먼 서구 작가들의 블랙 회화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전한다. 표현의 자유와 행위의 흔적을 통해 실존적 미학을 구현한 앵포르멜 작가들의 작품에서 수묵의 여백과 먹빛의 농담이 보여 주는 기(氣)의 흐름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파리를 중심으로 아시아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추상적 표현 방식과 물질성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출신의 화가 자오우키 역시 그 매개자 중 하나다. 1921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서예와 동양화를 익힌 후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피카소, 마티스의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흡수한 뒤 중국 서화의 정신과 서구의 실험적 표현을 융합했다. 1960년대에는 이응노·이우환 같은 한국 작가들이 파리 화단에 등장하며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들은 동양 사상과 서예적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최전방에서 독창적 미학을 구축해 나갔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와 깨진 도자기의 설치 작품이 조응을 이루는 정광희의 ‘나는 어디로 번질까’ 연작.
조선 시대 대표적 문인 화가 공재 윤두서의 ‘윤두서필 산수도’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주요 작품이다. 비단에 금니로 그린 이 산수화는 화면 전체를 먹빛으로 채운다.

남도의 화맥과 오늘의 한국 미술
맑은 수묵을 거울 삼아 동서양의 예술이 서로를 비추는 이번 전시는 수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흐름으로 잇는다. 전통 필묵의 미학을 현대 추상회화와 접목해 독특한 시각적 패턴을 구현한 이응노의 ‘문자 추상’ 시리즈가 자리한 공간에는 그의 수묵화를 디지털 기술로 재해석한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이 함께 놓여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 박정선의 ‘풍죽, 바람 부는 대나무 숲’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나무 숲은 화면 앞에 선 관람객의 몸짓에 따라 바람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흔들린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몽유도원의 푸른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크리스털이 별처럼 박힌 황인기의 ‘오래된 바람-몽유’ 또한 수묵을 동시대적 표현 양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조선 시대의 공재 윤두서와 소치 허련 그리고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남도 수묵의 전통과 함께 소개하는 남도 수묵의 정신을 계승한 작품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시 기간 중 재미있는 영화제도 개최했다.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전남도립미술관을 비롯해 광양 일대에서 열린 ‘남도영화제 시즌2 광양’이다. 배우 최수종이 집행위원장을 맡은 로컬 영화제로 영화를 통해 남도의 다양한 문화 자산을 알렸다. 전남도립미술관을 방문한다면 걸어서 15분 거리인 인서리공원도 꼭 들러 보길 바란다. 전남도립미술관과 광양역사문화관 사이에 자리한 인서리공원은 14채의 한옥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개조해 구도심의 매력을 제대로 살렸다. 곡식 창고이자 병아리 부화장이었던 옛 건물에서는 크고 작은 전시가 열리고, 폐차고와 100년 묵은 한옥은 귀여운 소품 숍과 북 카페, 숙박 공간으로 변모했다. 잠시 쉬어 가는 이곳은 수묵화의 흰 여백과도 같다. 빈 공간 사이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작은 붓놀림처럼. ‘블랙’이라는 공통 언어가 전하는 예술적 교감은 미술관 밖에서도 유효하다. 은 오는 12월 14일까지 열린다. 가을빛으로 물든 광양에 그윽한 묵향이 번진다.

박정선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작품 ‘풍죽, 바람 부는 대나무 숲’. 화면 속의 대나무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에 흔들리듯 이리저리 움직인다.
동양의 수묵화와 닮은 앙스 아르퉁의 작품들. 전후 파리 앵포르멜 운동을 이끈 그는 형식을 해체하고, 직관적 제스처와 우연적 물질성을 강조한다.

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땅끝마을 해남의 고산윤선도박물관부터 전남 일대를 아우르는 예술 축제,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올해의 주제는 ‘문명의 이웃들 – 황해를 넘어서’다. 여기서 황해는 탈영토적인 중립적 공간으로 동아시아 민족들의 문명이 피어난 곳이다. 이번 비엔날레는 공재 윤두서의 작품을 중심으로 수묵의 뿌리와 근간을 확인하고, 소치 허련의 맥을 잇는 한국화 거장들의 작품과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 수묵의 여러 유형과 흐름을 살펴본다. 전남도립미술관의 과 함께 수묵의 역사와 블랙의 미학을 두루 탐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