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그림으로 남기는 정연석 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동을 탐방한다. 일상적 풍경이 하나둘씩 작품 소재로 변신한다.

눈앞의 풍경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휴대폰부터 꺼내는 게 일상이 되어 버린 지금. 저장한 사진은 점점 늘어나지만 매 순간의 기억이 사진처럼 선명하지는 않다. 기록하기 쉬운 만큼 더 기억하기 어려워진 시대에, 사진 대신 그림으로 현장을 담는 사람들은 어떨까?
익숙한 동네와 낯선 여행지에서 2시간 내외로 그림을 완성하는 어번 스케처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자의 눈으로 스무 곳이 넘는 동네를 스케치해 에세이 <서울을 걷다>를 펴낸 정연석 작가에게 짧은 드로잉 여행을 청한 건 그래서였다. 무심히 흘러가는 하루를 소중히 간직할 방법을 알려 줄 든든한 동행자를 만나러 서울 성북동을 찾았다.


건축가 없는 건축 마을
어번 스케치 장소로 정한 성북동에는 사대문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달동네 북정마을이 자리한다. 성곽 아래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걷다 보면 색과 모양이 제각각인 지붕들을 만난다. 곳곳에 그릴 요소가 많은 건물이 빼곡해 어번 스케처에게는 반가운 동네다.
그러나 미술에 자신 없는 사람이 건축물을 그리기란 쉽지 않다. 초심자의 걱정을 솔직히 털어놓자 정연석 작가가 성북동 풍경이 담긴 콜라주 형태의 작업물 하나를 건넨다. “사실 그대로 묘사할 필요는 없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원하는 부분만 그려도 돼요.” 하루 동안 시선을 사로잡은 것들을 모아 그려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름하여 ‘북정마을 기억 모음집’. A4 크기 도화지 한 장에 짧은 여정이 담길 예정이다.
일제강점기 성북동에는 많은 예술가가 살았고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스케치 여행의 출발점으로 정한 곳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이름을 알린 소설가 박태원의 집터다. 여기서 몇 걸음 더 오르면 나타나는 심우장은 <님의 침묵>을 집필한 만해 한용운이 지어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대부분의 한옥이 남쪽을 바라보는 것과 달리 한용운의 집은 북향이라는 점이 독특한데, 독립운동가인 선생이 남쪽에 자리한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이렇게 설계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심우장을 느긋하게 살피다 보니 처마 끝에 설치한 낙수받이도 예사롭지 않다. 그 모양이 꼭 닭을 닮았다. “낙수받이를 발견했다면 그 아래 땅도 살펴보세요. 땅이 파이지 않도록 모래를 쌓아 두거나 돌을 놓은 흔적이 있죠.” 현장에서 배운, 옛 선조들이 실천한 생활의 지혜를 흰 종이 위에 옮기기로 한다. 나중에 어떤 용도인지 눈치챌 수 있도록 낙수받이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을 그려 넣었다. 따로 메모하지 않더라도 그림에 사물의 기능이 충분히 드러난다.
심우장을 나와 북정마을을 거니는 동안 정 작가가 익숙한 풍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귀띔해 준다. “자세히 보면 같은 지붕인데 부분 부분 자재가 달라요. 나중에 지붕이 무너지거나 손상돼 일부를 수리했을 거예요.” 설명을 듣고 나니 마을 모습이 일부를 확대한 것처럼 또렷하고 세세하게 다가온다. 건물에 연결된 초록색 사다리는 빈 공간에 항아리나 화분을 올려 두려고 설치했을까? 도로명 주소 판 아래 적힌 ‘휙’이라는 낙서는 그 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린 건 아닐까? 마을 주민들의 의도를 상상하며 걷는 과정도 즐겁다. 집에 드나들기 편하도록 담벼락을 뚫어 문을 하나 더 낸 것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걸 건축가 없는 건축이라고 표현해요. 살면서 필요한 요소를 하나둘 덧붙이다 보니 흡사 설치미술 같기도 한 독특한 건축물이 된 거죠.” 종이에 간직하고 싶은 장면이 많아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어번 스케처의 눈으로 보는 세상
이번에는 북정마을과 연결된 암문을 통해 한양도성 순성길 백악 구간으로 들어선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도읍지인 한성부를 방어하기 위해 태조 때 세웠다. 산 지형을 따라 성곽이 길게 이어지는데, 돌담에 뚫린 구멍에 자꾸만 눈이 간다. 두 눈과 코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이 구멍의 정체는 몸을 숨긴 채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총안이다. 가운데 구멍은 근거리 사격용이라 밖에서 보면 양쪽 구멍보다 길다. 구멍에 눈을 갖다 대니 틀 안에 마을 풍경 일부만 담긴다. 무엇을 그릴지 고민된다면 구멍 하나를 정해 그것을 통해 마주하는 장면을 그려도 재밌겠다.
성북역사문화공원으로 내려가면 성곽의 돌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이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축성 시기가 구별된다. 태조 때는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 사용했고, 숙종 때부터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의 돌을 쌓았다. 돌 색깔도 각기 다른데, 상대적으로 흰빛을 띠는 건 복구 작업을 하며 갈아 끼운 돌일 확률이 크다. “흑백 그림에 나뭇잎만 색을 칠한 것 같네요.” 펜 드로잉 위주로 작업한 뒤 포인트 컬러를 넣는 정연석 작가의 눈에는 잿빛 성곽과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단풍나무가 또 다르게 보이나 보다.
공원 벤치에 앉아 ‘북정마을 기억 모음집’이라 이름 붙인 도화지에 성곽의 일부를 옮겨 넣는다. 심우장의 낙수받이, 골목에서 본 초록색 사다리, 담벼락을 뚫어 만든 문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마무리 단계에서 머뭇거리자 다정한 조언이 들려온다. “잘 그리려고 하면 긴장하게 돼요. 결과물은 날씨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완성도에 연연하지 말고 그리는 순간을 즐기세요.” 돌이켜 보니 그동안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좋은지 싫은지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없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표현하는 즐거움을 탐색할 차례다. 연말에 사진 대신 그림 한 장 남겨야겠다. 묘사하기 어려워 주저하거나 잘 그리고 싶어 덧칠한 부분, 숨기고 싶었던 흔적 등 흰 종이를 가득 채우며 느낀 감정도 스케치북에 그대로 보관될 것이다.
정연석 작가가 알려 주는 여행 기록법

- 정동, 서촌, 후암동 등 이야깃거리가 많은 동네를 찾아가세요. 단, 너무 넓지 않고 밀도 높게 이야깃거리가 배치되어 있어야 해요. 걷는 재미를 위해 길이 예쁜 것도 중요하죠.
- 성북동에는 북정마을 외에도 둘러볼 곳이 많답니다. 길상사, 선잠단지, 최순우옛집, 성북구립미술관 거리갤러리와 소설가의 가옥에서 찻집으로 변모한 수연산방을 추천해요.
- 외곽선부터 먼저 그리세요. 대상을 정확하게 담으려고 하거나 디테일에 연연하기보다는 화면을 어떻게 분할하고 주요 요소를 어디에 배치할지 등 전체 구성을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본 뒤 본인에게 맞는 걸 정하세요. 골판지에 그리거나 자수로 표현하는 작가도 있고, 널빤지를 못으로 긁어 눈앞의 풍경을 묘사하기도 해요.
- 여행용 노트를 구매해 기차표나 비행기 티켓을 붙이고 꾸며도 좋아요. 여행지에서 들른 카페 로고가 담긴 냅킨을 잘라 붙이고, 그 옆에 케이크를 그려 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