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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명상의 세계로

2026년 01월 01일

  • EDITOR 김수아
  • PHOTOGRAPHER 김은주

우주선을 닮은 핸드팬이라는 악기가 하택후 연주가의 삶에 착륙했다. 오랫동안 소리의 길을 걸어온 그가 치유와 명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차임이 바람에 흔들려 경쾌한 소리를 낸다.

목표를 향해 질주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다.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친 데다 열정까지 잃어버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각자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에게 번아웃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잊을 만하면 감기처럼 찾아온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건 명상.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명상 악기를 연주하며 미세한 파동에 집중한다. 소리 명상을 돕는 치유 악기 중 하나인 핸드팬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소리를 내 웰니스 프로그램에 자주 활용한다. 평온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기 위해 10여 년간 핸드팬을 탐구해 온 하택후 연주가를 만났다.

오션 드럼 속 작은 구슬이 구르면서 파도 소리를 만든다.

마음을 채우는 악기, 핸드팬
2014년 사물놀이 공연을 하러 캐나다 밴쿠버를 찾은 하택후 연주가는 한 악기 상점에서 핸드팬을 발견했다. 쇼윈도에 전시된 낯선 악기는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던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운명적인 만남이 한 사람을 치유의 세계로 이끌었다. 15년간 꽹과리를 쥐고 사물놀이 공연을 하면서 에너지를 뿜어내다 보니 힘이 점점 떨어지는 걸 느끼던 때였다. 똑같이 쇠로 만든 금속악기인데 꽹과리와 핸드팬을 다루는 방법은 확연히 달랐다. 핸드팬을 연주하는 동안 관객에게 에너지를 주는 동시에 받는 것이 신기했다. 신이 난 그는 무대 위에서 쏟아 낸 에너지를 보상받는 기분으로 핸드팬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10여 년의 수련을 거쳐 전통음악 연주가이자 핸드팬 아티스트로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했다. 지금은 피아노, 거문고, 장구, 젬베 등 다양한 악기와 합주해 음악을 만들고 요가 프로그램과 연계해 수업을 진행하는 등 작업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워크숍도 자주 열어 연주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 악기를 소개하고 가르친다.
하택후 연주가가 워크숍과 공연을 연달아 진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경북 경주로 향했다. 경주와 서울에서 각각 한 차례씩 핸드팬이라는 악기를 배우기로 한 것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단체 워크숍에 참석하기 전, 생소한 악기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성공원에 도착해 나무 아래 러그를 펼치고 핸드팬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두 개의 솥뚜껑을 이어 붙인 듯한 모양의 핸드팬은 상판과 하판으로 구분된다. 상판 중심에 돌출된 부분을 ‘딩’, 딩 주위를 둘러싼 움푹 들어간 부분을 ‘노트’라고 한다. 노트는 저마다 크기가 다르고 음도 제각각이다.
간단한 설명을 마친 하택후 연주가가 가장 큰 1번 노트를 쳐 보라고 한다. 손가락이 악기에 붙었다 떨어졌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손가락에 힘을 덜 줬나 싶어 더 강하게 노트를 두드렸지만 악기는 묵묵부답이다. “핸드팬을 처음 배울 때 다들 소리가 안 나서 놀라요. 다른 악기는 우선 치면 좋든 나쁘든 소리가 나니까요. 그럴 땐 이렇게 얘기하죠. 고요히 잠들어 있는 악기를 깨워 주세요. 소리를 천천히 열어 보세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악기를 누르는 힘 대신 손을 떼는 힘에 집중하니 소리가 점점 열린다. 핸드팬이 명상 악기인 이유는 특유의 맑고 청아한 소리뿐 아니라 연주하는 과정에서 긴장이 풀리는 데 있구나 싶다. 쌀이나 구슬이 부딪혀 빗소리를 만드는 레인 스틱, 파도를 연상시키는 오션 드럼, 바람을 만나야 비로소 존재감이 드러나는 차임 등 자연과 닮은 명상 악기를 차례로 만나니 마음이 점점 더 편안해진다.

하택후 연주가는 아크로 요가 강사와 협업해 워크숍을 열기도 한다. 신아영 요가 강사와 TJ 아크로 요가 강사가 함께 동작을 시연하고 있다.
수강생들의 이해를 돕고자 핸드팬 상판 각각의 노트에 숫자 스티커를 붙였다. 악보에 적힌 숫자에 맞춰 해당 노트를 두드리면 된다.

저마다의 파동을 찾아서
며칠 뒤 워크숍 장소인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도모요가를 찾았다.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춘 수강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는다.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하택후 연주가가 먼저 핸드팬의 5번 노트를 점점 여린 소리가 나도록 쳐 보라고 한다. 처음에는 투박했던 소리가 맑고 깨끗하게 변하는 걸 들으니 몸에서 불필요한 긴장감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요가 수련을 시작하기 전 두 눈을 감고 깊게 호흡하며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키는 과정과 비슷하다. 생각 없이 두드리는 게 아니라 소리의 크기를 높이거나 낮춰 보고, 손가락에 힘을 풀고, 여음에 귀 기울이라는 조언에 집중한다. 어떤 손가락으로 해야 편하고 소리가 잘 나는지도 확인하라는 말에 검지와 중지로 번갈아 가며 연주해 본다. 악기와 호흡을 맞춰 가는 과정이다.
수강생들과 함께 연습한 곡은 캐럴 메들리. ‘징글 벨’ ‘창밖을 보라’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악보를 차례로 받았다. 정간보의 기본 양식을 차용해 만든 악보라 한 칸이 한 박자를 의미하고, 검은색 글씨는 오른손, 빨간색 글씨는 왼손으로 연주하라는 뜻이다. 각각의 칸에 적힌 숫자에 해당하는 노트를 두드리며 위치와 동선을 익힌다. 소리가 나다 말기를 반복하지만 수강생들의 입가에는 계속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다. 핸드팬은 실수해도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 울림이 크지 않아 하택후 연주가의 말처럼 의도된 화음이나 즉석 애드리브로 웃어넘기기 좋다. 그러니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같이 수강하더라도 긴장할 필요 없다. 새로운 취미로 악기 배우기를 시도했지만 연습할 시간이 없어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이기 마련인데, 핸드팬은 그런 걱정을 덜어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연주하는 데에서 성취감을 얻는 게 아니라 몸짓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에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초보자에게는 귓가로 전해지는 소리 하나하나가 힐링이 된다.
수업이 끝난 뒤 수강생들이 하택후 연주가에게 자작곡 연주를 요청했다. 강습실이 공연장이 되는 순간이다. 아티스트와 관객들의 표정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하택후 연주가는 핸드팬과의 만남이 자신의 삶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말한다. “한때는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삶의 척도일 만큼 중요했어요. 공연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타인의 평가가 더 신경 쓰였죠. 신비로운 핸드팬 소리를 많은 이들이 반겨 주니 이젠 제 연주에만 몰입하죠.” 이제 요가원은 소수의 관객과 교감하는 무대이자 마음을 회복하는 장소가 됐다. 기댈 구석이 필요하다면 각자의 에너지에 맞는 악기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악기가 들려주는 소리는 나의 동작에 대한 답변이자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모든 소리엔 공명이 있잖아요. 그 소리에 집중하는 게 바로 명상 아닐까요. 핸드팬의 울림이 잦아드는 끝을 바라보며 자기 소리를 찾아내는 거예요.” 내 안의 감정이 핸드팬을 통해 조금씩 흘러나오기를 가만히 기다려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