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접하지 않은 유일한 내륙도인 충북은 햇빛과 바람, 땅과 시간이 빚어내는 자연의 맛을 두루 품은 곳이다. 서로 다른 맛을 지닌 제천, 영동, 청주 세 도시를 다녀왔다.
제천, 가스트로 투어
충북 제천의 도심 골목부터 의림지까지, 지역의 맛을 음미하고 풍경을 따라 걷는 ‘가스트로 투어’는 단순한 한 끼를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의림지 가스트로 투어 B 코스
11:00 의림지 공용 주차장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 방문할 음식점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11:10 오디향
‘건강한 자연 밥상’을 내는 한정식집. 오디를 올린 솥밥에 뽕잎나물을 포함한 각종 나물을 비벼 먹는다.
12:05 카페 피노
솔밭공원 옆 갤러리 같은 카페에서 홍차나 커피와 함께 의림지를 형상화한 디저트를 맛본다.
12:45 비룡담저수지
‘제2의 의림지’라 불리는 제천의 대표 산책 명소. 저수지 주변에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13:15 카페 꼬네
‘2024 블루리본 서베이’에 이름을 올린 로스터리 카페. 다양한 원두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13:55 약선재
한식 디저트 전문 카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에서 정성 가득한 다과를 즐긴다.

입안에 머무는 풍경
여행의 이유는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낯선 골목을 헤매기 위해 떠나고, 어떤 이는 지난 시간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 떠난다. 충북 제천으로 떠난 이유는 ‘맛’이라는 감각을 좇기 위해서다. 오래전부터 약초의 도시로 알려진 제천은 가스트로 투어(gastro tour)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미각의 지도를 넓혀 가고 있다. ‘가스트로’는 위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가스트로 투어는 음식을 매개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경험하는 미식 여행이다.
2020년 6월 제천 시내에서 처음 시작된 이 투어는 단순한 맛집 순례가 아니다. 지역의 식재료로 만든 음식에 더해 오랜 세월 제천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상 위에 오른다. 참가자들은 A, B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2~3시간 동안 도심의 골목과 전통시장을 걸으며 다섯 곳의 식당에서 다채로운 음식을 맛본다. 해설사는 음식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과 지역의 풍습 등을 들려준다. 덕분에 한 접시의 음식이 단순한 끼니를 넘어 삶과 문화를 배우는 경험이 된다.
가스트로 투어의 식당 선정 기준은 명확하다. 현지 주민들이 자주 찾는 단골집이자 관광객에게도 입소문 난 맛집만 골라 리스트를 완성한다.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한 ‘덩실분식’ 찹쌀떡은 오픈과 동시에 품절되기 일쑤지만, 투어 참가자에겐 기다리지 않고도 그 귀한 맛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내토전통시장에선 빨간 양념을 입힌 어묵이 침샘을 자극한다.
올해 4월부터는 새로운 코스로 의림지 가스트로 투어가 추가됐다. 제천의 대표 명소인 의림지를 시작으로 솔밭공원, 비룡담저수지 등을 산책하며 주변의 맛집들을 방문한다. 평일에도 긴 줄이 늘어서는 원조 크림 탕수육 식당인 ‘낭만짜장’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생곤드레밥이 소개된 뒤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호반식당’도 바로 입장할 수 있다. 근처 ‘약선재’에서는 명인의 손맛을 전수받은 주인이 직접 만든 궁중다과상이 정갈하게 차려진다. 제천의 가스트로 투어는 단지 먹는 즐거움만 주는 투어가 아니다. 음식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을 천천히 알아 가고 이해하는 시간이다.


의림지도 식후경
의림지 가스트로 투어를 앞두고 A 코스와 B 코스 사이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생곤드레밥과 크림 탕수육, 궁중 쌍화차가 포함된 A 코스는 근사한 미식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감성적인 카페 탐방이 중심인 B 코스는 나들이하는 기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마음이 끌린 건 밥보다 빵, 식사보다 커피였다. 한 끼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여유로운 산책까지, 이 모든 경험을 2만 원대 후반에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투어는 오전 11시에 시작됐다. 의림지 주차장 건너편, ‘가스트로 투어’ 안내판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오늘의 동선과 음식점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고, 첫 번째 장소인 ‘오디향’으로 향했다. 오디향이라니 이름부터 건강한 느낌. 간판 옆에는 ‘제천시 인증 맛집’과 ‘의림지 대표 맛집’이라는 문구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곳의 특징은 직접 재배한 오디와 꾸지뽕, 아로니아를 식재료로 쓴다는 점이다. 상 위에는 이미 뽕잎 비빔밥 정식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오디를 곁들인 샐러드, 탱글탱글한 삼색 묵, 뽕잎 장아찌, 한 입에 먹기 좋은 두 종류 전도 식욕을 자극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솥밥 위에는 큼지막한 오디와 버섯이 올라가 있다. 밥을 푸고 뽕잎 나물과 함께 비벼 한 숟가락 크게 입에 넣었다. 재료 본연의 맛이 그대로 느껴지고, 씹을수록 오디의 은은한 단맛과 상큼함이 배어나온다. 속이 편안해지는 맛. 정성이 느껴지는 한 끼다.
다음 장소로 향하는 길에 배도 꺼뜨릴 겸 솔밭공원을 산책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솔향이 스치고, 발아래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10분쯤 산책을 즐긴 후 공원 끝자락에 위치한 카페 피노(Fino)에 도착했다. ‘피노’는 스페인어로 소나무를 뜻한다. 앤티크와 빈티지 스타일로 꾸민 카페에는 프랑스 자수로 만든 핸드메이드 작품과 소품이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자수 공방을 겸한 카페에선 의림지의 낮과 밤을 형상화한 디저트 티그레와 대파 스콘을 선보인다. 먼저 맛을 볼 건 대파 스콘. 성인 여자 주먹만 한 크기의 스콘에 대파가 콕콕 박혀 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스콘에서 대파의 단맛과 고소한 버터 향이 느껴진다. 이어 나온 티그레는 프랑스식 구움 과자로 아몬드 반죽 안에 말차와 초콜릿 두 가지 맛의 가나슈가 채워져 있다. 말차 맛은 의림지의 고요한 낮을, 초콜릿 맛은 그윽한 밤을 상징한다는 설명에 미소가 지어진다. 두 조각을 먹는 사이, 의림지의 낮과 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감 만족, 가스트로 투어
의림지 가스트로 투어의 진짜 매력은 식사와 디저트 사이, 숨을 고르는 산책 시간에 있다. 지그재그로 뻗은 덱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시야가 트이면서 비룡담저수지가 잔잔한 수면을 드러낸다. 저수지 둘레를 따라 난 비룡담길은 무장애 나눔길인 ‘제천 의림지 한방치유숲길’의 일부여서 경사 없이 평탄하다. 누구에게나 열린 둘레길을 걷다 보면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과 새소리만 존재하는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이 펼쳐진다.
목이 살짝 마를 때쯤 다음 장소인 까페 ‘꼬네’로 향한다. 2008년 문을 연 이 로스터리 카페는 ‘2024 블루리본 서베이’에 이름을 올렸다. 입구에 들어서자 고소한 원두 향이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박주성 대표가 직접 로스팅을 하는데, 묵직한 보디감이 특징인 다크 그린 라인 2종과 산뜻한 산미가 인상적인 오렌지 라인 3종, 화사한 꽃 향의 스페셜 라인 1종을 선보인다. 투어에 포함된 아메리카노는 브라질, 과테말라, 콜롬비아 세 가지 원두를 블렌딩해 단일 원두에서 경험하기 힘든 복합적인 향미가 느껴진다. 고소함과 단맛, 산미가 기분좋게 균형을 이룬다.
커피 한 잔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뒤 다시 길을 나선다. 15분쯤 걷다 보면 마지막 장소인 약선재에 닿는다. ‘약이 되는 음식’을 만들고자 2024년 문을 연 이곳은 강미경 대표가 전통 약선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공간이다. 강 대표가 손수 빚은 금귤정과와 콩고물을 묻힌 도라지정과 등이 식용 꽃과 함께 소반에 정성스레 차려진다. 도라지를 찌고, 당침하고, 다시 삶아 말린 도라지정과는 씹을수록 도라지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입안에 감돈다. 금귤정과는 투명한 껍질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듯한 색감을 지녔다. 입안에 넣으면 새콤함과 은은한 단맛이 순식간에 퍼진다. 약선재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다과를 맛볼 수 있는 건 강 대표의 남다른 노력 덕분이다. 그는 윤숙자 명인을 포함한 여러 전통 한과 장인을 찾아다니며 궁중병과를 배웠다. 겨울철 금귤을 대량 구매해 1년 치를 준비하고, 정과 하나에만 3~5일을 매달리기도 한다.
가스트로 투어를 마친 뒤에도 오래도록 입안에 남는 것은 특정한 맛뿐만이 아니었다. 저수지에서 느낀 평화로움, 공원의 소나무 향, 그리고 정성 어린 음식에서 전해진 손의 온기도 있었다. 가스트로가 단지 위장을 뜻하는 것만은 아닌, 감각 전체를 아우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영동, 와인 여행
충북 영동. 예부터 포도로 이름난 이 고장에서 비건 와인을 처음 맛본 뒤, 청수 품종의 화이트 와인에 매료되었다.
와인은 이 땅의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드는 한 모금의 서사다.

기다림으로 완성되는 예술
포도밭은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보여 주는 곳이다. 늦은 봄엔 연둣빛 새순이 얼굴을 내밀고, 초여름엔 포도나무 줄기가 하늘을 향해 뻗는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 아래 잎은 더욱 진해지고, 이삭처럼 맺힌 포도알이 하나둘 부풀어 오른다. 그러다 햇살이 부드러워지고, 바람에 약간의 서늘함이 감돌기 시작하면 수확의 시간이 찾아온다. 하나하나 손으로 딴 포도송이는 바구니에 담겨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 그 끝자락에 와인이 있다. 어두운 와인 터널 속에서 천천히 숨을 쉬는 와인은 침묵을 견디며 숙성의 시간을 보낸다.
충북 영동은 대한민국에서 포도를 가장 많이 재배하는 고장이다. 그 양이 전국 생산량의 12.7퍼센트를 차지하는 4만 1000여 톤에 이른다. 영동의 포도밭에선 캠벨얼리와 머스캣 베일리 에이, 충랑, 거봉, 샤인머스캣 등 식용 품종은 물론 청수, 청포랑, 델라웨어, 머스캣 오브 알렉산드리아 같은 와인 제조용 포도도 자란다. 영동의 포도는 향이 유독 진한 것이 특징. 둥글고 단단한 알갱이는 과하게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빛깔을 품고 있다. 밤낮의 기온 차가 큰 영동의 기후는 포도를 단단하게 키우고, 단맛과 신맛의 농도를 진하게 만든다.
영동에서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술을 ‘빚는다’기보다 ‘기다린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직접 키운 포도 열매 하나하나에 햇살을 입히고, 맛을 고르고, 다시 병 속에서 계절을 재운다. 사람의 개입이 적을수록 와인 맛이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 느림과 절제가 이 지역만의 맛을 완성한다.
영동 와인의 역사는 1960년대에 포도 농가에서 직접 포도를 으깨고 발효시켜 가족끼리 나눠 마신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995년에 본격적인 와이너리 육성이 시작됐다. 현재는 농가형 와이너리만 35곳인데, 농가마다 재배하는 포도 품종과 발효 기술, 숙성 기간이 달라 각기 다른 개성의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땅과 사람 그리고 계절의 합주. 한 병의 와인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영동 와인의 모든 것, 영동와인터널
영동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2018년에 문을 연 영동와인터널. 영동의 와인을 알고 싶은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다. 입구에 다가서자 오크 통을 닮은 외관과 커다란 와인병 조형물이 이곳이 와인을 주제로 한 공간임을 알려 준다. 터널 길이는 총 420미터. 실제 동굴이나 폐터널을 활용한 국내 다른 지역의 와인 터널과 달리 이 와인 터널은 인공적으로 조성됐다.
천천히 터널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장 먼저 만난 곳은 와인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와인 문화관. 영동 와인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영동 와인관과 전 세계 와인을 소개하는 세계 와인관, 실제 와인 저장고를 옮겨 놓은 듯한 와인 저장고도 차례로 만난다. 와인이 나오는 영화 장면을 보여 주는 전시관과 와인 레스토랑, 포토존 등 그 외의 볼거리도 다양하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와인의 역사와 제조 과정, 나라별 특징도 인터랙티브한 전시물 덕분에 흥미롭게 다가온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터널 벽면을 따라 와인병이 길게 늘어선 영동 와인관이다. 전시된 와인은 영동 지역 35개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것으로 레드, 화이트, 로제, 스파클링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와인의 맛이 궁금해 와인 체험관으로 향했다. 오늘의 시음 와인은 샤인머스캣으로 만든 소계리 와인과 깔끔한 맛이 매력인 르보까쥬 드라이 와인, 그리고 은은한 단맛의 봉황 스위트 와인 세 종류. 하나같이 향이 풍부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데다 타닌의 떫은맛도 적어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부담없이 즐기기 좋다.


1층 공간에서는 와인 시음과 와인 하이볼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비건 와인을 찾아서, 갈기산포도농원
와인 터널을 나와 갈기산 자락으로 향한다. 초록빛이 번지기 시작한 초여름의 포도밭 사이로 갈기산포도농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2022년 국내 최초로 비건 와인 인증을 받은 포엠 로제와 포엠 화이트를 생산하는 와이너리다. 비건 와인은 와인 생산 과정에서 동물성 재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와인을 말한다. 포도밭을 일구는 과정부터 특별하다. 동물성 퇴비 대신 식물성 퇴비를 사용하고, 병을 밀봉할 때 쓰는 왁스나 접착제도 식물성 원료로 대체한다. 가장 어려운 건 양조 과정이다. 보통 와인을 맑게 만들기 위해 동물성 청징제를 사용하는데, 이곳에선 자연 침전 방식이나 식물성 여과제만 고집한다.
“시아버지께서 1990년부터 무농약으로 포도를 재배했고, 2000년부터는 유기농으로 전환했어요. 아이들에게 믿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마음이 출발점이었죠. 비건 와인도 같은 이유예요. 수확한 포도에 비해 생산되는 와인의 양이 적고 관리도 까다롭지만,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이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요.” 한지현 갈기산포도농원 대표의 말이다. 덕분에 이곳의 비건 와인은 아시아와인트로피 골드상과 우리술품평회 과실주 대상 등 국내외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다.
갈기산포도농원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모두 다섯 종류. MBA 품종 포도와 토종 머루를 블렌딩한 포엠 레드 드라이와 포엠 레드 스위트, 킹델라웨어 품종으로 만든 포엠 로제, 청수 품종의 포엠 화이트, 그리고 2022 세계지식포럼 건배주로 선정된 ‘또 다른 시선’이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건 로제 와인이다. 국내에서 킹델라웨어 품종을 재배해 사용하는 곳은 갈기산포도농원이 유일하다. 병을 열자마자 과일 향과 꽃 내음이 은은하게 퍼지고, 한 모금 머금자 시트러스 계열의 산뜻한 산미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한 잔의 비건 와인에 땅을 지켜 온 시간과 세대를 이어 온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시나브로’ 매력에 빠지다, 불휘농장
영동 와인 여정의 종착지는 불휘농장이다.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에서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한 네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이곳은 말 그대로 ‘소믈리에 패밀리’ 와이너리다. 불휘농장의 이근용 대표는 와인의 힘은 품종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농장에서 재배하는 포도는 10여 종. 이 대표는 2007년 귀촌해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실험하고 있다.
국내 와이너리 대부분이 캠벨얼리 품종으로 레드 와인을 만들던 2000년대 후반, 그는 청포도 한 송이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청수. 청명하고 맑은 산미를 지닌 이 품종은 당시만 해도 양조용으로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는 청포도의 투명한 매력을 와인에 담아 내기로 결심했고, 2012년 ‘시나브로 청수 화이트’가 탄생했다. 청수로 만든 브랜디 ‘바야흐로’도 있다. 와인을 다섯 병 이상 증류해야 한 병이 나오는 귀한 술로 해마다 단 500병만 생산한다.
이 대표가 국내외 와인 전문가들에게 호평을 받은 청수 화이트 와인 한 잔을 권한다. 먼저 청포도의 싱그러운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뒤이어 잘 익은 과일의 단맛이 입안에 번진다. 차갑게 즐기면 상큼한 첫인상과 청량한 피니시가 ‘이것이 바로 여름 와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불휘농장에서 생산하는 와인 종류는 시나브로 청수 화이트를 포함해 레드 3종, 화이트 2종, 스파클링 4종이다. 스파클링 라인업은 이 대표의 아들 이병욱 씨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사과, 샤인머스캣, 나르샤, 청수와 모스카토 블렌딩까지, 매년 새로운 조합이 등장하며 불휘농장의 와인 세계가 넓어지고 있다. ‘2020년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된 뒤로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와인 족욕, 뱅쇼·샹그리아 만들기, 소규모 양조 체험은 사전 예약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순우리말처럼 불휘농장은 오늘도 부지런히 와인을 빚고, 한 병 한 병에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청주, 쌀을 찾는 여정
소로리 들녘에서 발견한 한 줌의 볍씨. 충북 청주는 인류가 수확한 가장 오래된 야생 벼의 출토지다. 쌀의 도시 청주에서 쌀로 빵을 굽고, 술을 빚는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 모든 벼의 고향
1만 5000년 전 땅속 깊은 곳에서 발견된 볍씨 하나. 충북 청주 소로리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야생 벼인 소로리 볍씨가 있다. 쌀 한 톨에서 시작된 이야기, 그 시간을 따라 충북대학교 박물관으로 향했다.
1970년에 개관한 충북대학교 박물관은 보물 김길통 좌리공신교서를 포함한 국가유산과 매장유산 등 5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1전시실 가장 안쪽 진열장에 인류가 수확한 가장 오래된 야생 벼인 소로리 볍씨가 있다. 그 시기가 중국 후난성 옥섬암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볍씨보다 무려 4000년이나 앞섰다. 소로리 유적 A 지구 토탄 Ⅱ구역에서 출토된 고대 벼 18알, 유사 벼 41알 등 총 59알은 충북 일대에서 다양한 야생 벼가 자라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볍씨와 함께 출토된 홈날연모(돌칼)에는 벼를 자른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사람들이 벼를 수확했음을 알 수 있다.
박물관을 나서면 자연스레 소로리마을로 발길이 향한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소로리쌀상회는 이 작은 곡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마을에서 수확한 쌀로 빵과 디저트를 만들어 판매하는 카페는 베이커리를 넘어, 쌀의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 주는 전시장에 가깝다. 쌀의 또 다른 모습은 장희도가에서 만날 수 있다. 청주의 초정리 약수, 생명력을 간직한 쌀, 그리고 장인의 기다림이 어우러진 양조장에서는 약주와 탁주가 탄생한다.
술잔을 비운 뒤, 청주 외곽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 ‘공간’을 찾았다. 거대한 정원에 자리한 이 카페의 테마도 쌀이다. 쌀과 홍국을 반죽해 구운 식빵, 쌀가루로 빚은 쫄깃한 단팥빵이 인기 메뉴다. 소로리 볍씨에서 출발한 여정은 1만 5000년 전 누군가가 베어 낸 벼 한 포기, 쌀 한 톨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 준다.

쌀 한 톨에서 시작된 이야기, 소로리쌀상회
소로리마을에 도착하자 모내기를 앞둔 논두렁 사이로 아담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쌀을 주제로 한 카페이자 마을 재생 사업의 거점, 소로리쌀상회다. 3년 전 24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인 망종(芒種, 수염이 있는 곡식의 씨를 뿌리기 좋은 시기로 6월 6일 무렵)에 문을 열었다. 소로리쌀상회는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마을 주민과 지역의 청년들이 모여 함께 만든 로컬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쌀 두 알이 겹친 모양의 소로리쌀상회 로고는 이 공간의 특징을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드러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소로리마을에서 수확한 쌀로 만든 빵과 간식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입에 넣자마자 바삭하게 부서지는 볍씨 쿠키, 쫀득하게 씹히는 쌀 식빵, 담백한 향이 입안에 오래 남는 치아바타, 그리고 촉촉한 쌀 바게트까지, 쌀로 이렇게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중 지난해 청주시를 대표하는 관광 기념품으로 선정된 빨간 쌀 식혜는 꼭 맛봐야 한다. 햅쌀과 유기농 발효 보리 새싹으로 만든 엿기름, 직접 담은 생강청에 빨간 쌀가루를 더해 고운 붉은빛의 식혜를 완성했다. 은은한 생강 향이 퍼지고, 혀끝에선 달콤함과 구수함이 뒤섞인다.
카페의 인테리어 소품도 온통 쌀이다. 소로리마을에서 수확한 쌀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고, 한쪽에는 커다란 쌀 리스와 볏단도 걸려 있다. 더 인상적인 건 카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빵을 굽는 이도, 커피를 내리는 이도 모두 마을의 어르신들이다. 느리고 서툴지만 빵을 담아 주는 손끝에서 정성이 느껴진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이정하 대표가 있다. 그는 소로리가 볍씨의 출토지라는 점을 기반으로 마을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늘 고민한다. 2029년 소로리의 옛 옥산초등학교 소로분교 자리에 선사박물관이 들어선다. 소로리 마을 사람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소식. 박물관에는 소로리 볍씨의 출토 과정과 선사 유물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빵 굽는 정원, 공간
청주에서 쌀 카페를 언급할 때 ‘공간’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홍국쌀빵. 붉은 누룩인 홍국과 쌀로 구워 낸 식빵은 칼로 자를 필요가 없다. 손으로 툭툭 뜯어 한 조각 먹으면 담백한 곡물 향이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진다. 쌀 단팥빵도 빼놓을 수 없다. 쌀가루로 만들어 쫀득하고, 단팥 소는 달지 않고 구수하다. 찰기 있는 식감도 재미있다.
쌀 메뉴 외에도 바삭한 결이 살아 있는 소금빵, 부드러운 플레인 수플레, 돌돌 말린 페이스트리에 시럽을 듬뿍 뿌린 몽블랑, 계절 과일을 가득 담은 케이크 등이 대표 메뉴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차도 있다. 정원에서 자라는 소나무 순을 따서 청으로 담근 솔순차인데, 매년 봄에 3개월만 한정 판매한다. 소나무 순이 듬뿍 담긴 주전자 뚜껑을 열자 향긋한 솔향기가 풍긴다. 첫 모금은 쌉싸래한 풀 향이 돌고, 다음 한 모금은 입안에서 은은한 숲 향이 번진다.
카페 공간은 2019년 충북 민간정원 3호로 등록된 ‘공간 정원’ 안에 자리한다. 부지 면적은 축구장 다섯 개 크기인 약 4만 제곱미터. 이 거대한 정원은 허춘일 공간 정원 대표가 1998년부터 20년 넘게 손수 조성했다. 150여 종의 수목, 9000주 이상의 나무가 자라며, 수억 원을 호가하는 소나무 군락과 여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수국이 볼거리다. 정원을 둘러볼 수 있는 산책로도 있어 찬찬히 걸으며 풍경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지역 식재료로 빚은 약주, 장희도가
청주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는 예부터 탄산 약수로 유명하다.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조선 시대 세종대왕의 병을 치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 곳곳에 자리한 샘터에선 지금도 사람들이 약수를 받고, 그 물로 술을 빚는다. 바로 이곳 초정리에 자리한 장희도가는 장정수·김주희 부부가 2011년에 귀촌해 문을 연 양조장이다.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장희도가라 이름 지었다. 이 공간에서 부부는 조선 시대 궁중의 술을 현대적으로 재현한다. 세종대왕 재위 시절 어의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의 ‘주방문(酒方文)’을 바탕으로 복원한 세종대왕 어주(약주, 탁주)가 장희도가의 대표 술이다. 청주에서 나는 쌀과 초정리 약수로 빚은 약주는 맛이 맑고 섬세하다. 산뜻한 단맛과 함께 배꽃과 풋사과 향이 은은히 감돈다. 목을 타고 흐르는 감촉이 부드럽고, 입안을 채우는 향은 그윽하다.
술이 지닌 깊이와 개성은 철저한 공정 관리에서 비롯된다. 스무 번 이상 깨끗이 씻은 쌀로 고두밥을 지은 뒤 이를 찌고 누룩을 섞어 중저온에서 천천히 발효한다. 이후 60~90일간 저온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한 병의 술이 완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부부가 오롯이 해낸다. 기계보다 손의 감각을, 양보다 질을 중요시하는 양조법이다. 그러니 연간 생산량은 많지 않다. 장희도가의 술은 언제 마셔도 변함없는 맛을 유지한다. 부부의 오랜 연구 덕분. 양조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이수한 이들은 원하는 맛의 술을 만들 때까지 탐구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부부가 처음 술을 빚을 당시, 살균하지 않은 전통주의 유통기한은 보름 남짓에 불과했다. 이들은 미생물 실험을 통해 유통기한을 90일로 늘려도 술맛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맛이 더 깊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해당 결과는 식약처에 제출한 유통기한 설정 시험 성적서를 통해 입증됐다.
장희도가는 술을 통해 배움을 나누기도 한다. ‘2021년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된 이후 제철 농산물로 빚는 막걸리 체험, 발효 식초 만들기, 체질에 따라 술을 빚는 사상체질 전통주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체험실 벽면에는 술의 재료가 되는 곡식과 약재, 허브, 향신료가 빼곡히 놓여 있다. 방문자는 직접 손으로 고두밥과 누룩을 섞고, 술과 지게미를 천천히 분리해 가며 술이 완성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내년에는 장희도가의 이름을 내건 소주도 선보일 예정이다. 술을 사랑하는 부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한 달간 영동군 레인보우힐링관광지와 국악체험촌 일원에서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가 개최된다. 이번 엑스포는 ‘국악의 향기, 세계를 물들이다’를 주제로 25개 기관과 180여 개 단체가 참여할 예정이다. 행사 기간 동안 국립국악원을 비롯한 국공립 국악관현악단의 공연과 국악 버스킹, 30여 개국의 해외 초청 공연 등 총 200여 개의 무대가 펼쳐진다. 국악기 전시 및 제작 체험, 무형유산 시연, 주제 전시, 이벤트, 학술 회의 등 다양한 부대 프로그램을 통해 국악과 전통문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경험할 수 있다.
문의 www.yeongdongexpo2025.or.kr

2025 제천국제한방천연물산업엑스포
충청북도와 제천시는 9월 20일부터 10월 19일까지 제천시 한방엑스포공원에서 2025 제천국제한방천연물산업엑스포를 개최한다. ‘천연물과 함께하는 세계, 더 나은 미래를 만나다’를 주제로 한 엑스포는 천연물 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하고 관련 기술 및 제품을 전시·판매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할 예정이다. 약초를 활용한 심신 안정 프로그램, 아로마테라피 체험, 자연 재료를 활용한 아트 센터 등 천연물의 치유력을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도 마련한다.
문의 www.jcexp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