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장면이 이훤의 시선 속에서 새롭게 배치된다. 카메라로 담거나 글로 풀어낸 이야기는 계속해서 쌓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팽창시킨다.

문학에 관심 있는 이라면 이훤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테다. 지난해 11월 그의 산문집 <눈에 덜 띄는>이 출간된 이후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았을 때,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함께 집필한 에세이 <고상하고 천박하게>와 시산문집 <청년이 시를 믿게 하였다>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이 시를 믿게 하였다>에 수록된 동시 ‘놀러와’는 방송인 김나영과 그의 두 아들 이준, 신우에게 선물하는 영상으로 먼저 공개됐다. “신우야 이준아/ 너희의 모국어가 될게/ 엄마라는 나라에 계속 놀러와/ (중략)/ 내가 제일 그리운 표정은 다 거기 삽니다/ 엄마도 여기 계속 놀러와/ 그냥 놀러와”. 시에 나오는 ‘놀러와’는 김나영이 과거 패널로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명인데, 단어가 거듭 반복되자 엄마와 아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목소리로 확장된다. 작품에 묻어난 이훤 작가의 세심한 관찰과 다정한 심성은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큰 화제가 됐다. 시인에게는 자신의 모든 작품이 귀하기에 어느 하나를 대표작이라 언급하기 어렵지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잘 표현한 시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사진 속 오린 문장들이 이 책의 구절이다.
사진과 시의 언어를 빌려
시에 등장하는 ‘모국어’라는 단어는 이훤 작가의 작품에서 여러 번 쓰인다. 타국에서 오래 생활한 그에게 모국어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바뀌었다. 그는 열아홉 살에 혼자 미국으로 이주한 후 1년간 학교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진만 찍었다. 일상에 스며든 단절감을 표현할 장면 앞에 자꾸만 멈춰 섰다. 당시 카메라에 담긴 풍경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10년 정도 지나니 한국어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다. 그러나 완전한 문장을 구사하기에는 언어 능력이 부족했고,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전부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파편적으로 끊어진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됐어요.” 시가 과거를 설명하고 현재를 받아 적었다. 현재 그의 직업이자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진과 시는 한때 그의 모국어였다.
이훤은 2014년 <문학과 의식> 신인문학상 공모전 시 부문에서 수상하며 시인이라는 또 다른 타이틀을 얻는다. 2년 후 시집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로 독자들과 처음 만나고,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양눈잡이>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 등에 사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사진과 시를 엮는 작업 또한 이어 간다. 하루에 한 편씩 읽도록 구성한 책 <청년이 시를 믿게 하였다>의 4월 16일 파트에는 단원고 학생들을 기리며 시인들이 써 내려간 시 모음집 <엄마. 나야.>에서 발췌한 문장과 이훤 작가가 촬영한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작별이 아니어서 인사하고 오지 않았어”라는 문장과 빛 번짐에 의해 사람의 형상이 가려진 사진을 나란히 배치하니 두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글과 이미지가 서로를 어떻게 보완하고 이야기를 부풀리는지 그의 작품을 통해 잠시 체험한다.

나의 안부를 전해주세요’ 시리즈 중 하나. 만나지 못하는 슬픔을 담았다.

세계의 범위를 넓히는 작업물
이훤 작가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 중국, 캐나다, 스코틀랜드에서 서른 번 넘게 사진전을 열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는 전시를 멈췄다. 기계적으로 활동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시 형태로 발표해야 하는 작업물이 생기면 재개하려고 미뤄 왔다가, 얼마 전 좋아하는 기획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에서 5년 만에 전시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회화 작가 김보민과 함께 공간을 꾸릴 예정이라고 한다. 타 장르의 예술가와 협업하며 영감을 주고받을 생각에 설렘이 크다.
그는 누구든 사진을 볼 때 해석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단 사진에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말과 행동이 느린 이방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선 안에서 외로웠기에 사람들이 서로를 기다리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다양한 의견을 반기는 이유도 같다. 하나가 아닌 수많은 정답을 탄생시키며 궁극적으로 그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가 천천히 쌓아 올리는 세상을 눈을 감고 그려 본다. 긴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많이 들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해요.” 하나의 장면도 허투루 보지 않는 이의 감사 인사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진이 본인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매체였다고요. 처음에는 카메라로 어떤 대상을 많이 찍었나요?
그때도 비인간을 찍는 걸 선호했어요. 인간의 표정을 직접 포착하는 일도 즐겁지만, 인간이 부재한 곳에서 은유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모으는 걸 좋아했나 봐요. 흔적을 찾는다고 할까요. 대상을 한번 경유해서 볼 때 새로워지기도 하고요. 사진 작업 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이 바로 이거예요. 기획해서 찍는 시리즈도 있지만, 어떤 사진은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찍었음에도 궤를 같이하거든요. 하고 싶은 말이 사진으로 옮겨졌구나, 깨닫죠. 찍은 후에 의미를 발견하는 형태의 작업이에요. 무엇을 받아 적을지 모른 채 탄생한 작품들 사이에서 일관된 화두가 있다는 점은 사진을 찍는 일 자체가 그 사람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행위라는 걸 뜻하죠.
원래 사진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보다, 낯설게 느꼈던 사람들이 작업물에 관심을 가졌을 때 더 반갑다고 했어요.
이 이야기를 정말 하고 싶었어요. 저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좋아하는데, 전시장에서만 만날 수 있다 보니 다들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이미지를 본인의 방식으로 읽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진 한 장에도 풍성한 내용이 담기지만, 두 장 이상의 사진을 연이어서 보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이에요. 텍스트나 다른 부연 설명 없이 사진들로 꿰어서 만든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체험해 보는 거예요. 독자들이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해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연결점이 다 달라요. 참 신기해요. 본인 모습을 투영해서 읽기도 하고, 사진 속 인물의 입장을 상상해 보기도 하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미지 대신 능동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많아지면 삶이 윤택해져요. 영혼을 건드리거든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랑 마음도 당연히 달라지고요. 사진이 시각언어이기 때문에 그런 힘이 강하죠.
이전에 출간한 시집 <양눈잡이>의 제목이 ‘나라 또는 직업이 한 가지가 아닌 사람’을 의미하잖아요. 각각의 눈에 어떤 사람과 장면을 담고 싶었나요?
당시에는 제가 각각의 눈으로 한국 또는 미국을 주시하고, 사진 또는 시를 보니까 비슷한 사람을 조명하자는 의미로 썼어요. 그런데 이주하지 않고, 직업을 여러 개 가지지 않은 사람도 두 눈으로 다른 대상을 관찰하더라고요. 그때마다 골몰하는 주제가 다르니까요. 아마도 우리 모두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겠죠. 요즘은 한쪽 눈으로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잘하는 창작자를 주목하고, 나머지 눈으로는 다른 장르에서 빛나는 동료를 보면서 배우고 있어요.
동료란 같이 공연을 준비하는 배우들이겠죠? 연극 <엔들링스>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무척 반가웠어요. 참여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고등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 연극 수업을 들었어요. 무대에 관심이 있어서요. 다만 배우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죠. 두 달 전쯤 이래은 연출가가 캐스팅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어요. 경험이 없다 보니 혹여 누가 될까 봐 망설였는데 본인도 배우가 아니지만 무대에 섰고, 장면을 같이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분명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자신을 믿고 따라오라는 확신에 찬 말에 용기를 냈습니다.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 계속 새로워지고 싶었어요. 북 콘서트에서 독자를 만날 때마다 다른 발화자가 되고, 섬세하게 몸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기존 작업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을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함께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요.
보통 글을 쓸 때는 혼자잖아요. 연극은 여러 명이 논의하며 만드니까 엄청 풍요로워요. 모두가 다른 속도로 말하고, 다른 형태로 움직이고, 다른 표정을 지으니까요.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방식도 시도해 보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고요. 활자 속 인물을 자신의 톤으로 흡수해서 표현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글쓰기도 제 안에서 변화하는 중이죠. 오랫동안 여러 화자가 되어 본 동료들이 각각의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시선을 나누는 시간이 소중해요.
낭독회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듯해요. 때론 노래도 부르죠. 활자 안에 있던 시인이 독자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독자들이 시간 내어 방문한 이 공간이 무대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작가와 특별한 시간을 공유했다는 인상을 남길 방안을 고민해요. 혼자 책을 읽을 때와는 차별화된 지점을 만들려고요. 작가들도 본인이 쓴 글이지만 여러 사람 앞에 꺼내 놓을 때 낯설게 느껴져요. 특히 처음으로 소리 내어 읽는 순간, 그제야 진짜로 마주하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가끔 눈물이 나나 봐요. 시를 읽고 이야기하는 동안 독자분들 표정을 한 번씩 봐요. 내 언어가 어떻게 도착하는지 궁금해서요.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어 기쁘고, 결코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아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자본이 시간인데, 그걸 내주셨으니 저도 최대한 많은 걸 드리고 싶죠. 음악가가 아니라서 노래 실력이 미흡하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부르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신작 제목을 언급하고 싶어요. ‘청년이 시를 믿게 하였다’. 한 청년을 스쳐 지나간 많은 존재가 결국 청년이 시를 믿도록 만들었어요. 그렇다면 그 청년이 시에 관해 가진 믿음은 무엇인가요?
시를 읽는 사람이 더 먼 곳까지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다고 믿어요. 훨씬 많은 사람을 궁금해하고, 세계를 깊이 파악하고자 노력하거든요. 기본적으로 시를 해석하는 독자는 비밀을 공유해요. 시인이 작품에 녹여 낸, 그만 아는 관계성이 있잖아요. 여러 권의 시집을 펼치고 덮는 동안 나와 타인이, 혹은 나와 세계가 관계를 맺고 쌓아 가는 방식을 폭넓게 이해하죠. 그게 우리를 더 넓어지게 만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