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혜 작가는 단발령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춘 말총공예를 동시대로 다시 길어 올렸다. 천연섬유로 빛을 머금은 말총 가닥은 그의 손을 거쳐 입체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말총공예가 정다혜 작가 이야기를 꺼낼 때면 말총이 무엇이냐는 질문부터 되돌아온다. 말총은 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일컫는데, 조선 시대 남성들이 쓰던 탕건, 망건, 갓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하다가 단발령 이후 수요가 크게 줄면서 말총공예 역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말총공예가 다시 주목받게 된 건 정다혜 작가가 말총으로 만든 작품이 국내외 공예상을 연이어 수상하면서부터다.


2 말총공예의 재료가 되는 말총 묶음.
말총공예를 동시대로
길어 올린 창작가
예술가가 자신의 분야에서 권위와 명성을 인정받는 상을 수상한 것은 분명 대단하고 축하받을 일이지만 우리는 대개 작품보다 수상 그 자체에 놀라고 또 빠르게 잊는다. 그러나 이 명예로운 순간에 닿기까지 작가가 어떤 인고와 성찰의 시간을 보냈는지를 묻고, 알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관심이 창작자가 그만의 세계를 계속 다듬으며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정다혜 작가가 말총공예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처럼 말이다. “학교 주관으로 열린 전시에서 처음 말총으로 만든 모빌을 선보였어요. 어떤 분이 모빌 10개를 구입하셨는데, 그때 저와 말총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죠.” 그도 그럴 것이 말총이 그의 삶에 뿌리내리기까지 숱한 내적 방황을 겪었다. 평면보다 입체를,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작업을 선호했던 정다혜 작가는 조소를 선택했지만 여러 부분에서 자신에게 맞는 옷이 아님을 깨달았다. 덕분에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 그래도 공예가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전통 섬유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졸업은 해야겠고, 그러자면 논문을 써야 했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리서치를 하던 어느 날, 말총공예를 접하게 된다. “답을 찾은 기분이었어요. 천연섬유인 데다 조소의 매력인 입체성을 접목할 수 있으니까요.” 다음에는 작업을 지속할 환경을 갖추기 위한 고민이 이어졌다. 생계 말이다. 말총이 입체가 되려면 그의 작품명처럼 ‘성실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매일 10시간 이상 앉아 평균 한 달에서 두 달 동안 말총을 엮어야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그래서 정다혜 작가는 겸업을 하기보다 작품의 가치를 높여 경제적 안정을 찾는 방법으로 공모전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국 청주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2020년 대한민국공예품대전 문화재청장상, 2021년 청주공예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공모전 대상, 2022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 수상은 정다혜 작가가 치밀한 분석과 준비를 바탕으로 이룬 성과다. “공모전은 작품 자체의 참신함과 완성도만큼 지원 방법을 철저히 따르고 이전 수상작을 분석하는 게 중요해요. 주최 측도 상을 줘야 할 이유와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요. 이런 점에 집중해서 생각하면 승산 있는 공모전이 보일 겁니다.” 글로벌 패션 하우스는 각 브랜드의 헤리티지와 부합하는 예술 분야의 작가를 선정해 지원하는 공모전을 매년 진행한다. 로에베의 경우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제정해 상을 수여하는데, 정다혜 작가는 ‘성실의 시간’으로 2022년 한국인 최초로 이 상을 수상하면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공예 시장에 진출하는 데 발판을 마련했다. 2025년 메종 & 오브제가 매년 특정 국가의 신진 디자이너를 가려 뽑는 라이징 탤런트 어워즈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최근 파리에 다녀온 그를 서울 작업실에서 만났다.

2023년 영국 런던 크래프트 위크 때 해외 첫 개인전을 열었죠.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우선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어요. 청주국제공예공모전 대상에 이어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한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 말총공예를 하면서 혼자 앓은 시간이 길었거든요. 그런데 수상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제 작품을 보러 와 주시더라고요. 그 기쁨에 제 안에 있는 모든 걸 쏟아 낸 시기였어요. 또 개인전이라 하면 관람객이 기대하는 바가 있잖아요. 스타일을 빨리 다듬어서 정형화하고 공예가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에 마치 제 자신과 경쟁하듯이 작품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2024년에 다시 런던 크래프트 위크에 참가할 때까지도 그랬고요.
불안함이나 조급함은 누구나 얼마간 지닌 채 살아가잖아요. 그런 감정을 인지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작품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말총공예를 장인 선생님에게 배우잖아요. 결코 저를 개인적으로 엄격하게 대하시지는 않지만, 어쨌든 전통과 역사를 기반으로 한 기법이기에 그만의 기준이 있거든요. ‘성실의 시간’에 고스란히 녹아 있죠. 작품 하나를 만들 때 한 가지 색상만 쓰고 무늬와 무늬 사이 간격도 철저하게 지키려 했고요. 저도 모르게 제가 정한 규칙 안에서 완벽하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2024년 작품을 보면 두 가지 색이 섞인 것도 있는데요. 관람자 입장에서는 색 하나 더 넣은 작품으로 볼 수 있지만, 저에게는 큰 변화였어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두 가지 색을 엮는 과정에서 또 규칙을 만들었더라고요. 올해 메종 & 오브제에서 선보인 신작 ‘라운디드 셰이프(Rounded Shape)’는 이 모든 긴장감을 내려놓자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토기 형태도 변주하고 싶어서 공중에 띄우는 스타일을 시도했고요. 그러면서 저도 작품도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해진 것 같아요. 비로소 해방감도 느꼈고요.
말총을 한국적인 소재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제주 지역만의 특수한 소재라고 봐야 할까요?
한국적인 소재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공부한 바에 의하면 조선 초기부터 말기에 걸쳐 전국에서 말총으로 만든 모자를 썼는데, 제주도는 말총의 주요 생산지였고, 기초 작업을 해서 육지로 보냈다고 해요. 이후 신분제에 동요가 일어나고 말총 모자를 쓰고 싶어 하는 중인 계급이 늘어나면서 수요가 급증했어요. 나중에는 제주나 경남 통영 등지에서 아예 완성품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럼 단발령 시행 후 말총공예 수요는 확연히 줄었겠네요.
맞아요. 하지만 지방에서는 여전히 탕건, 망건을 고수하는 양반이 있었고, 그렇듯 수요가 있으니 제주에서는 적게나마 계속 만들어 온 거죠. 한때는 전국적으로 말총공예 장인이 있었지만 결국 제주에 몇 분만 남으니 제주에서만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고요.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으나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말총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부담이 컸을 것 같아요.
말총공예의 전통이나 역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조소를 전공하고 공예로 넘어온 저는 초반에 전통을 고귀하고 엄숙한 영역으로 여겨서 작품화하기까지 두려움이 컸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선대의 방식이나 규칙에 얽매이기보다 소재 고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겠다는 열망도 컸죠. 깊이 들여다보니 말총공예가 모자를 만드는 데만 쓰인 게 아니더라고요. 충분히 변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시간만 들이면 어떤 형태로든 표현할 수 있는 저만의 방식을 찾아냈어요.
말총공예 작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나요?
먼저 어떤 형태를 만들고 싶은지 머릿속으로 대략 그려 봅니다. 그리고 말총을 엮는 틀인 삼나무를 깎죠. 제주에 사시는 부모님이 제주 방풍림인 삼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셔서 어릴 적부터 흔하게 삼나무를 보아 왔어요. 그렇게 친숙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삼나무로 작업을 시작했죠. 게다가 삼나무는 무르고 가벼워 깎기 쉽고 서울 작업실로 가져오기도 수월해요. 다음으론 말총 가닥을 고릅니다. 한 묶음당 10퍼센트 정도만 작품에 쓸 수 있는데, 100퍼센트 제주산 말총이면 좋겠지만 요즘은 공급량이 적어서 몽골산을 써요. 초기에는 재료에 대한 강박도 있었어요. 전통 공예를 하는데 수입산을 쓰는 게 과연 옳은가 싶어서요.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말 종자부터 100퍼센트 제주산인지 따져봐야겠죠. 말 자체가 품종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고 난 후엔 저도 노선을 정했어요. 재료의 순수성에 함몰되기보다 우선 이 작업을 이어 가는 데 집중하기로요.
‘성실의 시간’은 대영박물관 소장품이 되기도 했죠. 또 기억에 남는 컬렉터가 있나요?
영국에서 제 작품을 본인 환갑 선물로 구입한 분이 기억나요. 승마를 하는, 말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었는데 제 작품을 둘 공간을 이미 마련해 두고 전시에 찾아오셨더라고요. 이후에는 제 작품이 놓인 공간 사진을 찍어 보내 주셨고요.
마지막으로 올해 전시 계획과 차기작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5월에 런던 크래프트 위크에 단체전으로 참여할 예정이에요. 차기작을 계획적으로 구상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규모가 큰 작품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때 좋은 점은 단가보다 창의성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난 몇 년간은 물리적 시간을 고려하면서 전시에 내놓을 작품을 만들다 보니 작품 크기에도 한계가 있었어요.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이제 저의 오래된 꿈을 실현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