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샛길 유랑, 여행가 박성호

2025년 12월 01일

  • WRITER 이미선(문화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황필주

높은 곳을 향해 살았다. 정상에 오르면 멋진 풍경이 펼쳐질 거라고 모두가 말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성실하게 걸어 정상에 다다랐을 때 함께 오르던 몇몇이 낙하했다. 그들에겐 날개가 없었다. 숨이 가빴다. 모두 부러워하는 곳에서 벗어나 샛길을 유랑하기 시작했다. 카이스트 출신 여행가 박성호 이야기다.

글을 쓰고 사진과 영상을 편집하는 것도 여행가의 일. 공유 오피스에 작업실을 차렸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만난 퍼슨 카멜레온.
조지아 산골 마을에 사는 당나귀.

엄마 친구 아들의 비범한 선택
지난여름, 한 여행가가 쓴 동물 여행 에세이 <여행가의 동물수첩>을 읽었다. 북극의 순록과 사하라의 사막여우, 아마존의 카피바라, 페로제도의 퍼핀, 나미브사막의 겜스북, 페루의 콘도르 등 야생에서 만난 17종의 동물 이야기가 동화처럼 펼쳐졌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작가 박성호를 검색했다. 대치동 키드, 자사고 진학, 세계창의력올림피아드 한국 대표,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수석 졸업. 전형적인 ‘엄마 친구 아들’이 완벽하게 디자인된 삶을 뒤로하고 여행가가 된 사연이 궁금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 계정과 유튜브 채널을 보며 박성호 작가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카이스트에 입학한 박성호는 학우들이 연이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걸 지켜봤다. 처음으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의문이 들었고 도망치듯 입대했다.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길, 그 길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했던 삶. 기존의 목표와 방식에 의문이 들자 근본적인 삶의 목적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살아온 삶 바깥쪽을 탐험하고 싶어졌다. 군 제대 후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고등학교 조기 졸업 후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위를 수료한 뒤 전문 연구 요원으로 대체 복무하는 보통의 카이스트 학생들과는 다른 선택이다.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는 말에 주위에서는 학교나 정부 제도를 통한 유학이나 교환학생 신청을 권했지만, 그가 원한 건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여행하는 나라의 소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필수 표현을 메모지에 적어 벽에 붙여 뒀다.

카이스트 출신의 여행가
지구 반대편의 풍경은 낯설지만 포근했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동물과 함께 사는 삶에 익숙해질 무렵 뉴질랜드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호주와 비슷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구나! 그는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호주로 돌아왔다.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지옥의 일터’라 불리는 바나나 농장에 제 발로 갔다. 100일 동안 1000만 원 모으기를 목표로 컨테이너 박스에서 스파게티만 먹으며 버텼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1년 동안 20개국 90개 도시를 여행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시 성실한 학생의 삶을 살았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친 후에는 어렵게 강당을 빌려 여행 강연을 했다. 직접 포스터와 티켓을 만들고 지방 언론에 초청 메일도 보냈다. 그렇게 돌연변이 카이스트생의 이야기가 언론에 소개됐고, 박성호 작가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여행가가 되려고 쌓은 스펙은 아니지만 성실한 삶의 궤적은 여행가로 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카이스트 출신 여행가’,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2017년에는 여행하면서 틈틈이 블로그에 업로드한 포스트를 다듬어 여행 에세이 <바나나 그 다음,>을 출간하면서 작가라는 타이틀도 생겼다.
2019년 다시 장기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좀 더 본격적이었다. 꼼꼼하게 계획하고 성실하게 기록했다. 여행 작가라는 수식의 무게 때문인지 온전히 여행을 즐기지는 못했다. 그러다 스페인에서 촬영 장비를 모두 도둑맞았다. 여행을 중단할 것인가, 장비를 구매해 여행을 지속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작가는 은둔 생활을 택했다. 조지아 산골 마을에서 인터넷을 끊고 책을 읽으며 몇 달을 보냈다. 자발적 고립과 의도한 고독, 여행의 본질과 멈춤에 대해 성찰한 기록을 엮어 2020년 <은둔형 여행 인간>을 출간했다. 말하자면 <여행가의 동물수첩>은 작가의 세 번째 에세이라는 얘기다.

<여행가의 동물수첩> 잘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동물은 무엇인가요?
안데스 콘도르요! 4년 전 여행에서 만난 동물 얘기를 책으로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무조건 안데스 콘도르를 마지막에 넣고 싶었어요.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계곡인 페루의 콜카 캐니언은 콘도르를 보기 위해 찾는 포인트예요. <라이언 킹>에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관객처럼 관광객들이 한 방향으로 앉아 콘도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죠. 매일 출현하는 것이 아니니 조금 긴장하면서요. 그러다 갑자기 5미터가 넘는 날개를 편 거대한 비행체가 머리 위를 지나가는데,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콘도르는 날갯짓 없이 멀리 나는 새예요. 바람을 가르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는데 정말 자유로워 보였어요.

자유롭게 나는 콘도르가 부러웠나 봐요.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자유로움에 있어요. 여행은 모든 선택지가 열려 있어요. 매 순간 나의 선택이 절대적이죠.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자연이 그리우면 자연을 찾아가면 돼요. 일상은 많은 외부 요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은 내일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와 달리 여행 중엔 제 선택에 따라 오늘과 내일이 바뀔 수도 있어요. 자유롭죠.

여행하면서 발견한 취향이 있나요?
부유한 나라의 신도심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회일수록 자신의 삶 바깥을 경험할 기회가 많고, 트렌드를 좇는 경향이 있어요. 대도시의 신도심은 서울 강남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반면 구도심에는 시간의 흔적과 축적된 이야기가 있죠. 평범해 보이지만 100년이 넘은 빵집, 유명 화가가 살았던 저택, 세계적인 소설가의 단골 술집 같은 것들이요. 서울도 강남보다는 옛 정취가 남아 있는 종로와 경복궁 주변을 좋아해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좋아요. 오지보다 작은 단위의 마을을 선호하고, 기왕이면 관광지는 피하는 편이에요. 관광지는 관광객을 위해 정돈되거나 과장된 얼굴을 하고 있으니 ‘평범’하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여행가는 놀러 다니면서 돈 버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놀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여행가에게 공부는 꼭 필요해요. 가령 남미 여행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식민지 개척 시대를 연 스페인 레콩키스타부터 다시 공부할 정도로, 이미 아는 것도 꼼꼼히 점검하는 편이에요. 배우고 익히고 기록하고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아요.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고통이 되지 않느냐고 묻는데, 여행가는 축복받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갈수록 그 생각이 더 강해지고요. 20대 때부터 10여 년 동안 전 세계 90개국을 여행했어요. 한국인 기준에서는 별일 아닐지 몰라도 세상에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라 밖으로 나간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하는 사람들. 저는 젊은 나이에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요. 힘든 순간도 있지만, 육체적 고통일 뿐 정신적 고통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여행은 경험이라기보다 사치의 영역일까요?
사치죠.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돈 쓰면서 놀러 다니는 건 사치의 영역이 맞아요. 그래서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을 겪어도 힘들어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내가 원해서 아프리카에 갔는데,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건 잘못이죠. 사실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요. 그러나 이것도 제 기준일 뿐이에요. 저는 만족감을 느끼는 기준선이 낮아요. 낙후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위생을 문제 삼으며 호텔이나 레스토랑 평점을 낮게 주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냥 그 지역의 위생관념이 이렇구나, 하고 넘기는 편이에요. 불평을 하다 보면 여행하기 어려워요.

사치스러운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는 혼자 여행하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외로움을 견디는 힘, 나아가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태도는 정말 중요해요. 여행은 외로움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자발적으로 외로움에 대처할 수 있는 훈련을 하는 거죠. 실제로 조지아 산골 마을에서 몇 개월 동안 지내다 서울로 돌아오니 외로울 일이 없더라고요. 마음을 평온하고 차분하게 만들어 삶이 외려 단출하고 편안해졌어요.

여행하면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사건이나 현상을 마주하는 태도가 유연해진 건 사실이에요. 이제는 뭔가 특이한 사람을 만나도 이상하게 여기기보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강의하면서 학생들을 자주 만나는데, 늘 저는 “나와 다른 환경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라”고 말해요. 제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요.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두려움을 느끼고요. 문제는 정답이라 여기는 일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거예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가 이해되지 않으면 결국 내가 힘들어지거든요.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자주 접하다 보면 인간관계는 이해가 아닌 인정의 문제란 걸 알게 돼요.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일상’의 범위가 넓어져 나와 비슷한 일상을 사는 모두가 이웃처럼 느껴지죠.

내 삶의 바깥쪽을 여행하면서 결국 자신의 삶이 유연해지는 거네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디자이너나 학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공부한 건 잘 써먹고 있어요. 책을 쓰거나 강연할 때 수많은 에피소드 중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선별해 내야 하는데, 그 기술을 디자인 공부하면서 배운 것 같아요. 쓸모없는 배움은 없어요. 열심히 공부해 카이스트에 진학했고, 카이스트 출신 여행가란 수식어 덕분에 저를 찾는 곳이 많을 거예요.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교수가 됐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어요. 저는 여전히 세상을 방랑 중이고요. 부럽지는 않아요. 공부를 안 해 봤다면 막연히 부러워했을지 모르지만, 한때 같은 길 위에 있었고, 제가 그 길에서 벗어난 후에도 그들의 삶을 지켜봤기에 감히 부러워할 수가 없어요. 제가 재미있게 여행하는 동안 친구들은 기숙사와 랩을 오가며 공부만 했으니까요.

작가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더 유명해져야 하는 건가 고민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 좋아요. 여행하면서 적당히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적당히 안정적인 환경에 만족해요. 더 이상 바빠지고 싶지도 않아요. 큰 목표도 없어요.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이미 하고 있으니까요. 여행에서 파생된 일들도 재미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서 여행하고 사람들에게 저의 경험을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