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분노 어린 종이 인간, 신민

2025년 05월 28일

  • EDITOR 신송희
  • PHOTOGRAPHER 황필주

신민 작가가 만든 종이 인간은 하나같이 성난 눈썹을 가졌다. 그를 닮은 작품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약자를 향한 위로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지난 3월 28일 미술계를 들썩인 소식이 전해졌다.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 ‘2025 아트 바젤 홍콩’에서 전 세계 신진 작가 중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MGM 디스커버리즈 아트 프라이즈 첫 수상자로 한국 작가의 이름이 불린 것이다. 주인공은 신민. 수상작은 ‘유주얼 서스펙트’와 ‘세미(世美)’ 시리즈다. 작가는 과거 생계를 위해 패스트푸드점과 대형 카페에서 일하며 느낀 감정을 작품에 담았다. 검정 머리 망을 쓴 조각품들은 한국의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무리 꽁꽁 싸매도 머리 망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머리카락까지 막을 순 없다. 결국 머리카락을 떨어뜨린 범인을 찾기 위해 다 같이 모여 CCTV를 돌려 본다. 이러한 상황을 담은 작품 ‘유주얼 서스펙트’에선 ‘누구야?’ ‘너 아니야?’ 서로를 의심하는 불편한 시선이 가로지른다. 작가의 씁쓸한 경험은 국내를 넘어 머리 망을 쓴 채 일하는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에게 공감을 샀다. 18년간 정직하게 세상을 비추던 신민 작가의 작품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계와 인간이 다른 점 중 하나는 ‘털’임을 위트 있게 표현했다.

분노를 동력으로
신민 작가가 만든 커다란 종이 인간 작품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멈추는 곳은 ‘눈’이다. 하늘을 찌르듯 삐죽 올라간 눈썹과 금방이라도 흰자위가 튀어나올 듯한 날카로운 눈동자. 그 안엔 분노가 서려 있다. 신민 작가의 작업도 분노에서 출발한다. 그는 약자에 대한 수많은 혐오 범죄에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판검사와 가해자를 열심히 변호하는 변호사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 분노를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표출할 방법을 고민하다 선택한 것이 미술이다. 자신이 만든 형상에 메시지를 담아 일종의 퍼포먼스 형태로 보여 준다. 구멍을 낸 소녀상들의 눈 속에 향을 피워 성범죄 피해 아동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차별과 혐오에 맞서 당당히 ‘No’를 외치자는 의미로 ‘No’라고 적은 유토 원형 두상 300여 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지만 점차 애환, 동정, 기쁨 등 다양한 감정을 작품에 녹여 내고 있다. “익숙하지만 당연시하고 지나쳤던 분노의 여러 지점을 포착하고 질문하려 노력해요.” 신민 작가에게 작품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투명한 언어다. 분노로 시작한 작업은 부당한 현실을 알리며 질문을 던지고, 비슷한 분노를 느끼는 이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건넨다.

작품 ‘유주얼 서스펙트-민정(검은 머리 짐승들이여 두피에 힘줘 안 빠지게)’의 머리 망 속 머리카락을 연필로 그리고 있다.

종이 인간 속 겹겹이 깃든 염원
여성, 노동자, 약자의 이야기를 계속 수면 위로 떠올리기 위해 신민 작가가 택한 재료는 종이와 연필이다. 쉽사리 버려지고 찢기는 종이와 금세 지워지는 연필은 힘없는 소시민과 약자의 이야기를 표현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죠. 약한 종이도 겹겹이 쌓으면 견고해진다는 점에 위안을 얻어요. 쉽게 묵살되는 이야기도 계속 하다 보면 귀 기울이는 이들이 많아지고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 믿어요.”
단단한 인간의 형상을 만들기 위한 여정은 기도에서 출발한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시험 합격을 빌며 부적을 그려 주던 그는 작가가 되어서도 기도하며 작업을 이어 간다. 종이에 기도문이나 소원을 적고 구조물에 붙이기를 반복하는 식이다. 2022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조각충동>에서 선보인 작품 ‘우리의 기도‐나는 동료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껴안는다 나는 연대한다’는 머리 망을 쓰고 저임금·고강도의 감정 노동을 하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 기도하며 완성한 작품이다.
작가의 정성 가득한 손길과 간절한 염원이 깃든 종이 인간은 불굴의 의지를 담은 눈빛으로 당당히 태어난다. 종이 인간의 존재감 넘치는 자태는 작가 자신을 닮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음료 나가기 전에 이물 체크 또 체크’라는 작품명을 보고 공감하며 웃음을 터뜨리길,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자신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2025 아트 바젤 홍콩의 MGM 디스커버리즈 아트 프라이즈 수상을 축하합니다. 매일 바뀌는 작품 설치가 화제였어요.
작업 초기부터 자유롭게 작품 배치를 바꾸는 걸 재미있어했어요.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졌죠. 입체적인 작품은 각도에 따라 분위기와 맥락이 달라져요. 작품 ‘세미(世美)’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면 분노와 슬픔이 느껴지지만, 후면을 보면 머리 망이 주는 메시지가 강렬하거든요. 다양한 맥락을 전달하면 흥미로울 것 같아서 아트 바젤 홍콩에서도 작품 ‘유주얼 서스펙트’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 배치를 매일 바꿨어요.

신민 작가에게 미술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또 다른 언어라고 느껴져요. 분노를 미술로 표현한 첫 순간이 기억나나요?
중고등학생 시절 학교의 주입식 학습 방식이 불편했어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학교가 마치 감옥 같았죠. 어느 날 가정통신문 뒷면에 목이 졸린 채 숨이 막혀 가는 여학생을 그렸어요. 답답하고 해소되지 않는 분노를 미술로 표현한 첫 순간이었죠. 내재된 분노가 배설되는 기분이 들었어요.

한껏 치켜뜬 눈과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날카롭고 거센 눈동자. 종이 인간의 표정이 하나같이 살아 있어요.
종이를 스무 겹 이상 붙이다가 마음 놓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지면 그때부터 숨을 참고 눈, 코, 입을 거침없이 그려요. 작품의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에서 바람이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 때까지 표정을 이리저리 바꾸죠. 그제야 작품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아요. 관객도 제 작품의 눈과 마주쳤을 때 코에서 나오는 바람을 같이 느끼면 좋겠어요. 작품에 바리게이드를 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제 작품의 생생함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거든요.

민주, 평화, 정희, 미진, 유진, 민정, 찬미 등 사람 형상의 작품을 만들 때마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이름을 지어요.
소설 <82년생 김지영>처럼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서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평범한 이름도 나름의 뜻을 고심해서 지어요. 미진은 ‘아름다울 미(美)’에 ‘보배 진(珍)’, 유진은 ‘흐를 유(流)’에 ‘보배 진(珍)’ 자를 썼죠. 각각 ‘우주의 아름다운 보배’ ‘우주를 흐르는 보배’라는 뜻이에요. 작품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진짜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아서 평상시에도 친구처럼 “미진아” “유진아”하고 불러요.

손에 잡히는 크기부터 전시장 천장에 닿을 정도의 크기까지 크고 작은 인간 형상을 만들어요.
작업을 할 때마다 이 작품을 누가 볼지 생각해요. 2022년 개인전 때 선보인 작품 ‘세미(世美)’는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봐 줬으면 했어요. 세미는 프랜차이즈 노동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닉네임이라 비슷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으면 했죠. 언제든 침대 머리맡에 놓거나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한 손에 잡히는 크기로 제작했어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형 미술관에 작품을 설치할 때는 강렬한 메시지와 오라를 전하기 위해 크게 만들고요. 각각 매력이 있지만 규모가 큰 작품이 확실히 존재감이 있어요. 늘 작게만 표현됐던 노동자가 서비스 지옥의 문을 지키는 사자처럼 서 있으니 위계가 전복돼서 통쾌하더라고요.

작품을 보면 통쾌함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성찰까지 하게 만들어요. 전시 <으웩! 음식에서 머리카락!>에선 노동자들이 당연시하는 머리 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했죠. 어느 정도 의도된 부분인가요?
작업을 하며 이런저런 맥락을 섞다 보니 성찰까지 나아간 것 같아요. 한때 미술 비평계에서 “은유가 드러나지 않고 일차원적이다” “미술적 언어가 결여되어 있다”는 피드백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문제시하고 싶은 이야기는 직설적으로 전달해야 했어요. 지나가던 어르신이 봐도 단번에 작품의 의도를 알아채고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게 저만의 전략이에요.

드래그 아티스트 모어(모지민)와 함께 했던 서비스 노동자의 애환을 춤과 연기로 펼치는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어요. 직접 퍼포머가 되어 작품과 연계된 퍼포먼스를 계속 선보여요.
연극과 무용을 좋아해요. 조각 작품은 정제되어 있고 시간성을 보여 주기 어렵지만, 몸을 움직이고 대사를 읊으면 조각 작품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맥락을 더 풍성하고 다양하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로 퍼포먼스는 조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메시지를 표현하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화난 표정의 조각 작품을 보기만 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대사를 격정적으로 내뱉고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를 마주할 때 ‘정말 화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요.

작품을 만들고 발표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작가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앞으로 만들고 싶은 작품과 향후 계획이 궁금해요.
처음으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작업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지금은 기도와 관련한 작업을 준비 중이에요. 기도문과 경전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지금 시대에는 어떤 모습과 존재로 바뀌어 있을까 상상해 보는 거죠. 전북도립미술관에선 ‘혐오’를 주제로 한 어린이 전시 <아이스크림 똥>이 10월 26일까지 열리니 어린이들이 와서 즐겁게 놀다 가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