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마카모디가 경주에서 노는 법

2025년 11월 01일

  • WRITER 류현경(여행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김은주

작은 파동이 하나둘 모여 점점 큰 원을 그린다. 잔잔하던 도시의 수면이 일렁이면 고여 있던 일상에도 새로운 물길이 열린다. 즐겁게 살기 위해 지금껏 마카모디가 경북 경주에서 해 온 일이다.

마카모디가 감포의 오래된 목욕탕 건물을 개조해 오픈한 ‘1925감포’.
기억을 조망하는 방 콘셉트로 꾸민 ‘라이트룸’ 구석구석 주민들과 여행자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오랜 시간 경주는 물결 하나 없이 고요한 도시였다. 사방을 둘러싼 능과 유적,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천년 고도는 여행자에게나 아름다운 풍경일 뿐 정작 지역 청년들에겐 갈 곳도 놀거리도 마땅치 않았다. 많은 이가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고 또다시 떠나기를 반복하던 10여 년 전, 형광색 커튼이 드리워진 시내의 원 테이블 커리집에 매일같이 심심한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요즘 어디 재미있는 데 없어?” “너는 뭐 재미있는 일 없었어?” 입버릇 같던 대화의 결론이 끝내 “없다”로 귀결될 무렵, 이들은 직접 재미있는 일을 벌이기로 했다. 프리 마켓 현수막을 만들고 포스터를 복사해 아파트 게시판이며 버스 정류장에 붙이자 신기하게도 수면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능력자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그렇게 2014년 커리집 앞 공원에서 열린 경주 최초의 프리 마켓, 그것이 마카모디의 시작이었다.

지역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수집해 발행하는 ‘감포늬우스’.
가자미마을 프로젝트를 통해 매년 감포를 찾는 청년들과 폭넓은 로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마카모디

그저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
‘마카모디’란 경상도 방언으로 ‘모두 모여라’라는 뜻이다. 긴 인도 여행에서 돌아와 커리집을 운영하던 김미나 대표가 고향에서 만든 첫 커뮤니티이자 5년 뒤 창업한 로컬 콘텐츠 제작소 이름이기도 하다. “처음엔 뭘 하든 상관없이 일단 모여서 놀아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 출발점이 프리 마켓이었죠. 당시에 포스터 복사 비용 4만 원으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참여 팀이 서른 팀이 되고, 마흔 팀이 되고, 그렇게 계속 규모가 커진 거예요.”
처음엔 이런저런 오해도 많이 샀다. 당시만 해도 지역에서 프리 마켓이란 개념 자체가 낯선 탓에 정치 조직이냐, 왜 자꾸 사람들을 모으냐는 질문도 적잖이 받았다. 심심해서요, 재미있게 살려고요, 열심히 대답했지만 쉽게 설득이 되진 않았다. 창업으로 노선을 정한 건 그즈음이었다. 그는 프리 마켓에서 만난 지금의 이미나 공동대표와 의기투합해 회사를 차리고, 첨성대 앞 빈집을 빌려 원데이 클래스를 꾸려 나갔다. 기반은 지역과 사람, 동력은 ‘우리가 가진 재능’과 ‘우리에게 재미있는 일’이었다. 요가를 하는 친구가 있으면 요가 클래스를 열고, 민화를 그리는 친구가 있으면 민화 클래스를 열었다. 매달 청년들과 함께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 모임’도 시작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그저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실제로 무척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삶에 관한 여러 질문을 나눴어요. 행복이란 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 대화를 쭉 이어 가면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만든 질문 카드가 ‘스톤웨이브’인데, 잔잔한 일상에 돌을 던져 파동을 일으킨다는 의미예요.”
돌이켜 보면 모든 과정이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심심해하던 친구들과 재미있는 걸 찾다가 프리 마켓을 열었고, 창업을 했고, 그렇게 만난 청년들과 대화하다가 질문 카드를 제작했고, 그 홍보 영상을 찍으러 동쪽 바닷가에 왔다가 옛 목욕탕 건물을 발견했으니까. 지금의 주식회사 마카모디를 대표하는 ‘1925감포’ 프로젝트는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두 대표는 감포 지역의 고령화를 걱정하던 주민 단체와 손잡았고, 수십 년간 폐허처럼 방치돼 있던 어촌 마을의 작은 목욕탕은 2021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1925년은 감포항이 개항한 연도예요. 일제에 의한 강제 개항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무언가 변화가 시작됐다면, 우리도 이 공간을 통해 지역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이죠.”

잔잔한 일상을 깨워 누구나 자신과 여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개발한 질문 카드.
가자미를 비롯한 감포 바다의 주요 어종을 모티브로 책과 양말, 티셔츠, 에코백, 열쇠고리 등 다양한 굿즈를 제작했다.

변화의 시작, 1925감포
1925감포가 카페 형태를 띤 것은 ‘문턱이 낮은 공간’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휴대폰 조작이 익숙지 않은 동네 어르신부터 로컬 맛집을 찾아 헤매는 여행자까지, 누구나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랑방 같은 커뮤니티 카페다. 감성을 자극하는 소품,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감각적인 인테리어도 눈길을 끌지만, 주민들의 삶과 추억이 깃든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건물 안팎을 리모델링하며 탕과 흙벽, 타일, 사물함 등 기존 형태를 최대한 보존한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명절이나 김장철에 자녀와 함께 카페를 찾은 주민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도슨트로 변모한다. 이 탕이 얼마나 깊었는지, 물은 또 얼마나 뜨거웠는지 천천히 과거를 더듬다가 반짝거리는 추억이라도 한 줌 길어 올리면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여기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이었거든요. 대략 30년 전까지 손님을 받았고요. 그래서 모든 감포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어요.”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기억, 서로 다른 시대의 궤적이 지금은 카페 한편의 방명록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엄마 손 잡고 오던 목욕탕에 손녀 손 잡고 커피를 마시러 온’ 어르신들은 과연 옛 시간을 되짚으며 어떤 감회에 젖었을까. 이 공간의 부제는 ‘기억을 담는 목욕탕’이다.
마카모디의 역할은 단순한 카페 운영만이 아니다. 1925감포를 거점으로 공연, 전시, 강연 등 문화 행사를 기획하는 한편, 지역의 이야기를 모으고 기록해 다양한 로컬 콘텐츠로 소개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22년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출발한 가자미마을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다. 일대의 특산물인 가자미를 콘텐츠와 접목해, 지역살이를 꿈꾸는 청년들이 일정 기간 머물며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을 기획해 왔다.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한두 달 동안 외지 청년들과 함께 감포의 여러 자원을 이용해 이런저런 실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첫해에는 식재료와 레시피를 발굴해 ‘가자미식탁’과 ‘가자미식당’을 열었고, 다음 해에는 이야깃거리를 수집해 ‘가자미여행사’를 차렸죠. 작년에는 기념품을 만드는 ‘가자미상사’를 운영했어요.” 1925감포와 청년들의 등장은 쇠락해 가던 어촌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외지인이 점점 늘어났고, 가자미마을은 지난해 말 성공적인 청년마을 만들기 사례로 장관 표창을 받았다.
잇따른 프로젝트로 변화한 건 지역 분위기만이 아니다. 청년 유입에 대한 마카모디의 관점도 달라졌다. 초기만 해도 무조건 ‘정착이 우선’이었다면 이제는 ‘생활 인구의 확장’에 좀 더 집중하는 식이다. 이를테면 ‘오도이촌(五都二村)’처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행자를 향한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경주에 여행을 오면 보통 일정이 1박 2일, 길어야 2박 3일 정도거든요. 그렇지만 도시 동쪽에 바다가 있고, 또 다른 경주의 모습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좀 더 오래 머물거나 한 번 더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의 경주는 그가 그토록 심심해하던 옛 고향과는 사뭇 다르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아졌고 젊은 여행객도 눈에 띄게 늘었다. 다만 아직도 인파가 몰리는 지역은 도시 전체 중 극히 일부다. “매년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4000만 명이래요. 근데 그 4000만 명이 황리단길과 첨성대만 보고 가는 거예요. 그들에게 조금 다른 여행법을 제시한다면, 그리고 그걸 기회로 ‘나도 이렇게 살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결국은 정착까지 이어지지 않을까요?” 그는 감포를 시작으로 도시 구석구석 숨겨진 매력적인 공간과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오늘날 마카모디가 선보이는 지역살이 콘텐츠는 그래서 경주의 산과 들, 바다를 아우른다.

유독 볕이 잘 드는 비행기모드 실내. 잠시 일상을 멈추고 나를 느끼며 돌보는 공간으로 꾸몄다.
김미나 대표와 함께하는 싱잉볼 사운드 테라피.

지역과 사람을 연결하는 콘텐츠
1925감포가 ‘경주의 바다’를 위한 사랑방이라면 ‘경주의 들’ 프로젝트의 거점은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비행기모드다. 대릉원을 지척에 둔 골목 안쪽에 잠시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아늑한 명상 공간이 숨어 있다. 티 명상과 싱잉볼 사운드 테라피, 향 리추얼 같은 기본 프로그램은 물론 ‘능능요가’ ‘뒷골목 세계 여행’ ‘엄마랑 경주, 명상 여행’ 등 기획력이 돋보이는 이색 클래스도 진행한다. 떠들썩한 감포 프로젝트와 달리 정적인 느낌이 강한데, 사실 마카모디가 새롭게 도전하는 분야다. “저희는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기획자잖아요.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원래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게 뭐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사실 지자체나 정부 사업은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고, 저희의 시작은 즐겁게 살고 싶은 욕구였으니까요. 그걸 여태껏 쌓아 온 커리어 안에서 뭘로 이어 갈 수 있을까 싶었죠.” 결론은 웰니스였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는 차와 명상의 시간은 산책하기 좋은 거리, 초록이 가득한 이 도시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한편 ‘경주의 산’을 품은 핵심 프로젝트는 마카모디의 원천이나 다름없는 프리 마켓이다. 현재는 ‘생산자마켓’이란 간판을 달고 산내면 작은 산골의 폐교에서 1년에 두세 번 열린다. 이름과 장소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견고한 원칙은 ‘내가 만들거나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물건만 판매한다’는 것. 덕분에 맷돌로 갈아 만든 초콜릿, 수제 재생 종이, 경주 팥을 넣은 블렌딩 차 등 개성 강한 핸드메이드 제품이 가판대를 가득 채운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의 레모네이드 부스와 황리단길의 잘나가는 수제 맥주집 팝업이 공존하는 공간, 시내에서 차로 40분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야 도착하는 폐교는 매년 축제의 열기로 뜨겁다. “아직 창업은 두렵지만 뭐든 좋아하는 일을 찾아 도전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시작하는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커요. 실제로 ‘배리삼릉공원’처럼 저희와 함께 성장해 황리단길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브랜드도 많고요.”
결국 김 대표가 정의하는 자신의 역할은 지역과 사람, 공간과 이야기를 이어 주는 연결자에 가깝다. “지금은 저희 활동이 도시 동쪽에 좀 치우쳐 있잖아요. 내년에 감포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되면 다시 중심부에서 바다로 가는 친구들, 산으로 가는 친구들을 연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웰니스를 통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관해서도 좀 더 이야기해 보면 좋겠고요.” 최근 비행기모드를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콘텐츠를 실험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사실 경주에는 ‘유일한’ 것이 많다. 너무 오래되어 낡고 익숙해 보이는 풍경들 너머, 오직 이 도시에만 존재하는 특별함이 깃들어 있다. 그는 마카모디가 그러했듯 누구라도 경주의 넉넉한 자원을 활용해 자신만의 유일한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원하는 삶을 고민하고 도전하고 선택하면서 살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저희가 좋은 롤 모델로 존재하고 싶고요. 결과적으로 로컬에서 찾을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증명하는 선례가 되는 셈이죠.” 그래서 마카모디는 ‘일단 우리부터 잘 먹고 잘 살기’를 실천한다. 커뮤니티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이끌어 가기 위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기획자로서, 연결자로서, 창작자로서 지역 곳곳에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키는 이들의 여정은 지금 경주를 그 어느 때보다 활기 넘치는 도시로 가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