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거의 모든 관광 인프라가 집결한 중심 대로, 스트립 바깥쪽이 궁금해진 건 이 말 때문이다. “라스베이건들은 스트립에 잘 안 와요.” 그럼 그들은 어디서 살고, 놀고, 즐길까? 다운타운과 후버댐의 미드 호수에서 그 답을 찾았다.

라스베이거스의 스트립을 걷다 보면 조금씩 혼돈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자유의여신상에서 파리의 에펠탑, 개선문, 베르사유궁전을 지나 곤돌라가 두둥실 떠다니는 베네치아의 운하가 약 2.6킬로미터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지구 밖에서도 보인다는 거대한 구체가 도시 한복판에 상륙해 이곳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스피어(Sphere)라는 이름의, 한국 돈으로 약 3조 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이 미래형 콜로세움은 눈동자, 토성, 이모지, 미식축구공 같은 물질과 물체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스트립 산책자의 정신을 교란한다.
스트립이라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달궈진 뇌와 몸을 식히기 위해 오프 스트립으로 통칭되는 지역으로 나가 본다. 전 세계의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 있는 골동품 가게가 즐비하며 196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에서 본 풍경이 펼쳐지는 다운타운(DTLV), 그리고 네바다주를 삶의 터전으로 바꿔 준 오아시스, 후버댐의 숨은 매력을 소개한다.


다운타운, 라스베이거스식 ‘쿨’을 만나는 동네
모두가 들뜨고 설레며 상기된 얼굴로 유흥을 즐기는 스트립에 오래 머물다 보면 슬슬 눈과 귀, 뇌가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한다. 눈치 없이 날뛰는 아드레날린 대신 평온과 고요로 이끄는 세로토닌이 필요한 시간이다. 라스베이거스 관광청에서 일하는 크리스틴과 점심을 먹다가 그럴 때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대부분 다운타운에서 시간을 보내요. 커뮤니티 문화가 발달해서 친절하고 정다운 분위기거든요. 낮에는 빈티지 숍에서 쇼핑하거나 갤러리에 가고, 해가 지면 바나 펍 호핑을 즐기곤 하죠.” 그에게 받아 든 ‘크리스틴의 최애 장소’ 목록을 들고 아츠 디스트릭트(Arts District)를 찾았다.
금요일 오전의 메이커스 & 파운더스(Makers & Founders)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커피 머신과 원두 몇 봉지, 유리 진열장에 몇 가지 샌드위치와 디저트를 적당히 갖춘 카페인 줄 알았던 이곳에서 마주한 장면은 다음과 같다. 아침부터 불을 밝힌 네온사인, 진열장 가득한 칵테일 원료, 바리스타보다는 바텐더에 가까워 보이는 직원, 그리고 나초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그 사이에 아보카도와 사워크림, 잘게 찢은 바비큐 소고기 그리고 각종 채소를 푸짐하게 끼워 넣은 ‘가장 인기 있는 아침 메뉴’. 로컬들이 ‘꼭 가야 하는 맛집’으로 꼽는 메이커스 & 파운더스는 많은 사람이 세련됐다고 여기는 브루클린이나 샌프란시스코식 감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침부터 밤까지 누구나 편하게 들러 식사와 커피, 단 음료와 디저트, 술과 안주를 시켜 놓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랑방에 가깝다. 20퍼센트 이상의 팁을 받기 위해 꾸민 친절을 베푸는 스트립 레스토랑의 (일부) 서버들과는 다른, 다정하고 여유 넘치는 직원들을 보며 라스베이건이 생각하는 ‘쿨’이란 이런 걸까 생각했다.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에스터스 키친(Esther’s Kitchen)’은 그 쿨의 최전선에 있는 식당이다. 누구보다 다운타운을 사랑하는 셰프 제임스 트리스가 운영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최근 이전한 후 새 단장을 마쳐 더욱 많은 사람이 찾는다. 맛도 가격도 호화로운 스트립 파인다이닝에 피로감을 느낀다면 반드시 이곳으로 향할 것. 여기서 식전 빵으로 나온, 나흘 동안 발효한 반죽으로 구운 사워도를 이탈리아산 올리브 오일에 듬뿍 찍어 먹은 후 동행에게 이런 말을 했다. “시판용 김치 먹다가 우리 할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먹은 느낌이에요.”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태어나는 곳
배를 채운 후 산책에 나선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골동품점과 갤러리 투어다. 오래된 물건들의 이야기를 탐색하고 싶은 이라면 매장 안에 65개의 점포가 들어선 앤티크 앨리 몰(Antique Alley Mall)이나 책, 레코드판 등 블랙 컬처와 관련된 다양한 컬렉션을 갖춘 아날로그 도프(Analog Dope), 수천 벌의 빈티지 옷과 패션 액세서리, 소품이 가득한 더 레드 캣 빈티지(The Red Kat Vintage)에서 주머니 속 현금을 속절없이 빼앗길 것이다. 그 가게들을 다 둘러보며 쓸모는 없지만 갖고 싶은 것 몇 개를 기어이 산 다음 더 아츠 팩토리(The Arts Factory)로 향한다. 30개 이상의 갤러리와 스튜디오, 공연장, 서점, 카페가 모여 있는 이곳은 다운타운의 부흥을 이끌어 낸 행사 ‘퍼스트 프라이데이(First Friday)’가 펼쳐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블록 파티와 아트워크가 함께 열리는 멋진 동네 잔치를 구경해 볼 수 있을까 살짝 기대했지만 내가 찾아간 날은 아쉽게도 둘째 주 금요일이었다. 퍼스트 프라이데이는 매달 첫째 주에 열린다.
이제 크리스틴이 준 목록에 있는 마지막 장소로 향할 차례다. 이스트 프리몬트 거리(E. Fremont St.)에 자리한 퍼블릭어스(PublicUs)는 커피에 심취해 있는 이들을 위한 카페다. 바리스타가 내려 준 플랫 화이트 한 잔과 계핏가루 가득 뿌린 애플파이도 물론 좋았지만 내 마음을 빼앗은 건 창밖 풍경이다. 웨스 앤더슨과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영화 세트장 같은 모텔들, 온갖 화려한 디자인의 네온사인, 결혼하러 가는 게 틀림없는 잘 차려입은 커플과 붉은 캐딜락을 타고 달리는 노인이 쉼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길. 다운타운은 그런 동네다. 머무는 내내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곳. 노트북을 꺼내 하루 종일 시놉시스 한 편 끄적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본다.


후버댐 미드 호수, 네바다의 야생 속으로
라스베이거스 가이드북에서 후버댐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남의 나라 댐을 뭐 하러 구경해? 우리나라 소양강댐도 안 가는데.’ 물론 미국인에게는 아주 의미가 큰 명소다. 후버댐 안팎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미드 호수(Lake Mead)에서 유람선을 끄는 선장님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고도화된 건축공학 기술이 적용된 세계에서 가장 큰 콘크리트 구조물, 사막에 자리한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에 물과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발전소, 대공황 시대를 극복하게 해 준 프로젝트, 거대한 자연재해로 이어질 수 있는 홍수를 조절하는 인프라. 후버댐의 대단한 스펙을 과시하는 온갖 수치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따분한 얼굴로 넋을 놓고 있던 그때, 멀리 암흑같이 어두운 절벽의 주상절리 사이로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꿈틀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렌즈를 바짝 당겨 보니 놀랍게도 캠핑 체어 하나 덩그러니 펼쳐 놓고 은둔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였다.
이후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저 ‘댐 안에 있는 작은 저수지’에 불과하다고 얕잡아 본 곳이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협곡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실시간 번역기 앱을 켜 선장님이 따발총처럼 내뱉는 얘기에 집중했다. “미드 호수는 콜로라도강(Colorado River)에 속하는 면적 640제곱킬로미터의 세계 최대 인공 호수입니다. 이 호수를 둘러싼 저 절벽은 블랙캐니언(Black Canyon)의 한 자락이고요. 약 17억 년이란 세월이 깎고 빚어낸 장대한 협곡이죠.”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까는 안 보이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절벽이 겹치는 비좁은 물길 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 돌무지에 작은 텐트를 치고 야생 속 캠핑을 즐기는 청년들, 반짝이는 물비늘 위 카약에서 부지런히 노를 젓는 소녀들. “이 물줄기를 따라 쭉 내려가면 윌로 비치(Willow Beach)가 나와요. 저기 보이는 카약들이 대부분 거기서 출발하죠. 카약을 타다 보면 강물이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에메랄드 케이브(Emerald Cave)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요.”
모두의 ‘멍 때리는 시간’을 위해 선장님이 설명을 멈췄다. 시속 20킬로미터로 달리는 고무보트 위로 차가운 강물이 세차게 튀어 올랐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후버댐을 등지고 선미에 자리를 잡았다. 시야에 인간과 인공이 없는 곳에서 아주 잠깐, 자연 속에 혼자 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선글라스가 없다면 눈이 멀 것처럼 반짝이는 윤슬, 바위 위에서 날개를 말리는 가마우지, 엉덩이를 허공으로 추켜세우고 물속에 고개를 푹 박아 가며 먹이를 쫓는 물닭의 한때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30분. 오전 11시에 배를 탔는데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다고? “아, 이 호수는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에 걸쳐 있거든요. 지금 우리는 네바다보다 한 시간 빠른 애리조나에 있어요. 이제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들 준비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