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사람이 눈에 쉽게 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타인을 위해 예민함을 드러내지 않는 HSP의 정체를 파헤친다.

다양한 논쟁을 빚어낸 MBTI 시대를 거쳐 최근 HSP 검사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HSP는 ‘Highly Sensitive Person’의 약자로 매우 예민한 사람을 가리킨다. 미국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이 1990년대 중반에 이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가 개발한 검사표에 따르면 23개 문항 중 13개 이상 해당되는 경우 HSP 기질일 확률이 높다. 전 세계 인구의 약 16퍼센트에 해당하는 이들은 다음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HSP의 첫 번째 특징은 초감각이다. 감각을 처리하는 기관이 모든 자극을 흡수하려고 하기에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두 번째 특징은 초감정.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나의 감정에 깊이 빠져드는 경향을 보인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는 능력도 뛰어난데, 이는 ‘섬세하다’며 장점으로 여겨지거나 ‘눈치를 많이 본다’고 단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드라마 속 인물이 처한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해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에서 영상을 멈추는 일도 생긴다. 마지막으로 HSP는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 즉 심미안이 뛰어난 편이다. 미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어 세심한 부분까지 살피고 창작물을 통해 영감을 자주 얻는다.
그런데 ‘예민하다’는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상대의 표정, 태도, 몸짓 등이 지나치게 공격적일 때 예민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민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타인에게 비난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 단어가 예민한 행동을 뜻한다면, 심리학에서는 예민한 감각을 가리킨다. HSP는 상황과 상관없이 불만을 표하고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매우 예민한 사람은 겉으로는 누구보다 무던해 보인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가 상대와 갈등이 생길 경우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 최대한 마음을 숨긴다. 실제로 폴란드 실레지아 대학교 심리학자들이 관련 연구를 진행했는데, 예민성을 표출하는 것과 HSP는 무관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HSP들은 예상 가능한 모든 충돌을 막기 위해 행동 억제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계속 억누르다가 타인의 눈에 곰처럼 둔감해 보이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의 저자 최재훈은 HSP가 가진 ‘순한 곰 페르소나’와 실제 자아 간의 괴리를 꼬집는다. 그는 사람이 영원히 가면을 쓴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고성능 안테나를 탑재한 이들은 주변 상황을 빠르게 읽고 친구와 가족을 섬세하게 챙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짧은 시간에 지쳐 충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저자는 HSP에게 자신이 속할 집단과 환경을 신중하게 택한 다음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조절하라고 충고한다. 또한 과부하가 걸리기 쉬운 신경 체계를 타고난 만큼 자주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충분한 회복 기간 없이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경계 조절 장애가 생겨 작은 스트레스 요인에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신경계 조절 장애를 겪었던 <예민해서 힘들 땐 뇌과학>의 저자 린네아 파살러는 감각 유형 목록을 둘로 나눠 작성하기를 권한다. 안도감을 주거나 반대로 괴로움을 주는 감각이 무엇인지 기록하는 동안 자신의 욕구에 귀 기울이라는 뜻이다.
낯선 상황에 적응하려 너무 애쓰다 보면 정체성을 잃고 휘청거리기 쉽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취약점을 지녔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든든한 내 편을 하나 얻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둘도 없는 친구를 바라보며 이제 무거운 가면을 내려놓을 차례다.
참고 도서
최재훈,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서스테인, 2024)
린네아 파살러, <예민해서 힘들 땐 뇌과학>(현대지성, 2025)
나도 HSP일까?
□ 주위에 있는 미묘한 것들을 인식하는 것 같다.
□ 다른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받는다.
□ 통증에 매우 민감하다.
□ 바쁘게 보낸 날은 혼자 있을 만한 장소로 숨어 들어가 자극을 진정시켜야 한다.
□ 카페인에 특히 취약하다.
□ 밝은 빛, 강한 냄새, 사이렌 소리 등에 쉽게 피곤해진다.
□ 풍요롭고 복잡한 내면세계를 지녔다.
□ 큰 소리가 불편하다.
□ 미술이나 음악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 양심적이다.
□ 깜짝깜짝 놀란다.
□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해야 할 때 당황한다.
□ 사람들이 불편해할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 안다.
□ 한 번에 많은 것을 요구받으면 짜증이 난다.
□ 실수를 저지르거나 뭔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 폭력적인 영화와 드라마 장면을 애써 외면한다.
□ 주변에서 여러 종류의 일이 일어날 때 긴장한다.
□ 아주 배가 고프면 강한 내부 반응이 일어나 집중이 안 되고 기분이 저하된다.
□ 생활 변화에 동요된다.
□ 섬세하고 미묘한 향기, 맛, 소리,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즐긴다.
□ 소란스럽거나 당황할 만한 상황을 피하려고 자신의 생활을 정돈한다.
□ 경쟁을 해야 하거나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불안하거나 소심해져 평소보다 훨씬 일을 못한다.
□ 어렸을 때 부모님 또는 선생님에게 민감하고 숫기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