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7년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열일곱 살에 한양을 떠나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생애 마지막 넉 달 동안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곳에 새겨진 애달픈 역사를 되짚어 본다.
전국이 단종앓이로 들끓고 있다. 지난 2월 4일 개봉해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여파다. 한국 영화 최초로 유배를 떠난 단종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은,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엄흥도에 대한 짧은 기록에 상상력을 덧입힌 픽션 사극이다. 영화에 깊이 몰입한 관객들은 N차 관람으로 애정을 드러냈고, 여운을 달래기 위해 작품의 배경이 된 영월을 찾는 발걸음도 부쩍 늘었다. 영화를 본 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극적인 상상을 걷어 낸 역사 속 단종은 생애의 마지막 넉 달을 어디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영월로 향했다.


유배길에 오른 어린 왕
1441년(세종 23년) 7월 23일 왕실이 오래도록 기다린 적통 후계자가 태어났다. 문종과 세자빈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홍위, 훗날의 단종이다. 그의 삶은 출생 직후부터 순탄치 않았다.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산후병으로 눈을 감았고, 다섯 살 때 할머니 소원왕후 심씨가 숨을 거뒀다. 손자를 금쪽같이 아끼던 할아버지 세종에 이어 아버지 문종마저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 곁에는 그를 보호해 줄 왕실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홀로 남겨진 어린 왕은 나약했고, 국정은 자연스레 대신들의 손에 넘어갔다.
정세가 위태롭던 1453년 계유년, 피바람이 불었다. 숙부 수양대군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이다. 황보인과 김종서 등 어린 왕을 보필하던 대신들이 죽음을 당하자 무력감에 짓눌린 단종은 끝내 왕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수양대군은 곧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조정 안팎에서 단종 복위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이어졌지만, 병자년에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1457년(세조 3년) 단종은 결국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그해 6월 유배길에 오른다. 목적지는 남북으로 태백산맥이, 동서로 소백산맥이 둘러싼 산간 고을, 영월이었다.
험난한 유배길 도중 그의 발걸음을 붙든 것은 눈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이었다. 칼날처럼 깎아지른 돌기둥 사이로 서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 *단종의 눈에는 돌기둥이 마치 신선이 서 있는 모습 같았다 하여 ‘신선암’ 또는 ‘선돌’이라 불린다. 선돌은 약 5억 년 전 고생대에 형성된 석회암 지층이 오랜 풍화와 침식을 거치며 남겨진 기둥 모양의 기암괴석이다. 절벽 곳곳에 뿌리 내린 나무와 꽃이 계절마다 다른 빛깔의 풍경을 펼친다. 장엄하고도 신비로운 절경에 매료된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절벽 사이를 나는 새도 그 풍경에 반해 바위틈에 내려앉아 잠시 쉬어 간다.



자연이 만든 감옥에 갇히다
선돌에서 서강을 따라 내려오면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에 닿는다. 서강이 동·남·북 삼면을 감싸 흐르고 서쪽은 육육봉 절벽이 막아선, 육지 속 섬과도 같은 땅. 선돌에서 청령포까지 거리는 차로 7분 남짓에 불과하지만, 유배길에 오른 단종은 배와 가마로 번갈아 이동하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지금도 청령포에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1~2분가량 짧은 뱃길을 건너 자갈밭을 지나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온다.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하늘을 가린 나무들이 햇빛을 막아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담장 너머 기와집과 초가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단종이 머물던 어소, 궁녀와 관노가 지내던 행랑채다. 어소 안을 들여다보니 창가에 앉아 서책을 읽는 단종과 그 곁을 지키고 선 신하를 재현한 밀랍 인형이 놓여 있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자 강대길 문화관광해설사가 말을 건넨다. “단종 어소는 <승정원일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건물이에요. 단종의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했는데, 그 뒤로 주변 소나무들이 하나둘 어소 쪽으로 몸을 기울이기 시작한 겁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울어진 소나무들을 빙 둘러보니 담장을 받침대 삼아 몸을 완전히 누운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임금에게 배알하는 신하의 모습과 닮아 ‘엄흥도송’이라 불리는 소나무다. “청령포로 유배 온 단종은 밤마다 통곡했다고 해요. 그 소리를 들은 엄흥도가 관군의 눈을 피해 강을 헤엄쳐 건너와 밤새 단종 곁을 지키며 위로했다고 전해지지요. 그가 임금을 배알하던 자리에서 자란 소나무가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나무가 휘면 뿌리가 들리기 마련인데 꼿꼿이 버티고 있으니 참 신기한 일이에요.”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한 기묘한 현상이다. 엄흥도송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숲을 올려다본다. 세상과 단절된 어린 왕을 나무도 가엽게 여긴 걸까. 소나무들이 단종 어소를 향해 일제히 몸을 기울여 에워싼 채 말없이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어소를 나와 나무 덱을 따라 걷다 보면 출입 금지를 알리는 금표가 나타난다. 1726년(영조 2년) 영월 부사 윤향래가 청령포 훼손을 막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석회암이 섞인 돌이라 부식되기 쉬웠지만, 한 백성이 금표 위에 큰 돌을 얹어 보호한 덕분에 세월이 지나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청령포에는 단종의 유일한 친구로 전해지는 나무도 있다. 관음송이다. 그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봤다 하여 ‘볼 관(觀)’, 슬픈 목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 자를 붙였다. 큰 키와 함께 두 갈래로 갈라진 줄기가 눈길을 끄는데, 단종이 그 사이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 나무에는 단종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라에 재앙이 닥칠 때마다 나무 색이 변해 이를 알렸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바로 나무에 깃든 영묘한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밑동부터 가지까지 새까맣게 변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본래 색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관음송 둘레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생겼다. 나무를 천천히 돌며 소중한 이의 안녕을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단종의 손때가 묻은 유일한 흔적이 있다는 말에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숨이 가빠질 즈음 작은 돌탑 하나를 마주한다.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단종이 절벽 부근의 돌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이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유배 행렬을 바라보며 눈물 짓던 왕후의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마음에 남았을까. 납작하고 새까만 돌들이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단단히 맞물려 있다. 망향탑을 뒤로하고 다시 배를 타러 가는 길, 자갈밭에 크고 작은 돌탑이 수없이 많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둘 쌓아 올린 것이다. 어린 왕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이 자갈밭의 돌탑처럼 조용히 쌓여 간다.


소쩍새 울음이 흐르는 누각
자연이 만든 감옥, 청령포에서의 유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배 온 지 두 달쯤 지나 여름 장마가 들면서 강물이 불어났고, 결국 영월 관아의 동헌이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영월 읍내 한복판에 서면 기와지붕을 얹은 정문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야트막한 돌담 너머로 관풍헌 건물과 동쪽의 누각 하나가 남아 있는데, 단종이 이 누각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고 한다. 바로 ‘자규시’다. 자규는 소쩍새를 이르는 말로, 단종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비통한 심정을 소쩍새에 빗대어 노래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쫓겨나/ 짝지을 그림자도 없는 외로운 몸 산속을 떠도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들지 못하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없어라/ 자규 울음소리 끊길 듯 가늘게 이어지는 새벽 산마루엔 어스름 달빛이 비치고/ 봄 골짜기엔 피 흘린 듯 떨어진 꽃잎만 붉구나/ 하늘은 귀가 멀어 이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 수심 많은 사람의 귀에만 이리 또렷하게 들리는가.”
시 속 절규가 마음을 파고든다. ‘자규시’가 전해지면서 후대에 누각 이름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뀌었다. 지금도 누각 앞뒤에 ‘매죽루’와 ‘자규루’ 두 개의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관풍헌은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생을 마감한 곳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은 서로 엇갈린다. <세조실록>에는 금성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선조실록>에는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 조선 후기의 야사 총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단종을 모시던 통인 하나가 활줄로 목을 졸랐다고 한다. 진실은 끝내 알 수 없지만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니 그 한이 얼마나 깊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저릿하다. 소쩍새 울음에 빗대어 남긴 단종의 절규가 지금도 이곳 어딘가에 맴도는 듯하다.


241년 만에 왕릉이 되다
관풍헌을 나서면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영월 장릉으로 향한다. 조선 왕릉 가운데 가장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단종 능이다. 본래 조선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임금이 능행을 갔다가 변고가 생겨도 하루 안에 대궐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영월은 한양에서 500리가 훌쩍 넘는 곳에 위치한다. 단종이 이곳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권력 다툼 속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은 단종의 시신은 영월 읍내를 흐르는 동강과 청령포 앞 서강이 만나는 남한강 발원지에 버려졌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이 내려졌기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때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두어 선산에 가매장했다. 묘의 높이는 겨우 60센티미터 남짓이었다. 영월 백성들은 이후 오랫동안 누군가 묘를 훼손할까 염려하며 몰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41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묘는 왕릉의 격식을 갖춰 영월 장릉에 자리 잡았다.
영월 장릉은 일반 왕릉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완만한 구릉 대신 가파른 산비탈에 봉분이 자리하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직선이 아닌 기역(ㄱ) 자로 꺾여 있다. 엄흥도가 급히 암장한 묘 자리와 산세를 그대로 살려 능을 조성하다 보니 기존 관례를 벗어났다. 이곳에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단종의 충신을 위한 건조물도 존재한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과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 대표적이다. 비극적 운명의 어린 왕을 끝까지 지킨 백성의 충심이 끝내 이곳을 왕릉으로 만들었다.
발걸음을 옮겨 능역을 오른다. 양옆으로 왕을 호위하듯 늘어선 소나무를 따라 걷다 보면 ‘정령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1999년 정순왕후 능인 사릉에서 옮겨 심은 나무로, 사후에라도 두 사람이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정령송을 지나 봉분을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작고 소담하다. 숙종이 장릉을 정비할 때, 조선 왕릉 중에서도 석물 규모를 매우 작게 두는 후릉 양식을 따르도록 지시했기에 단종릉에는 생략된 것이 많다. 석호와 석양이 각각 4기씩 놓인 다른 왕릉과 달리 단종릉에는 각각 한 쌍만 있고 병풍석과 난간석, 무인석도 없다. 대신 이곳에는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들고 가장 늦게까지 머문다. 형태는 없지만 온기를 지닌 햇살이 어린 왕의 곁을 따스하게 지키고 있다.
단종이 왕으로 복위된 뒤 영월 장릉에서는 해마다 제향을 올린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왕의 넋을 위로하고, 그를 지킨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단종문화제로 이어졌다. 올해로 59회를 맞는 축제는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사흘간 열린다. 단종 국장 재현을 비롯해 단종 제향, 가장행렬 등 단종의 삶과 가치를 되새기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올해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못다 한 인연을 기리는 가례 재현을 처음 선보인다. 이번 축제를 계기로 어린 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시 장릉을 찾아와 한마음으로 그의 넋을 기릴 것이다. 그 마음이 570년 세월을 건너 단종에게도 전해져 조금은 평안해지기를 바라 본다.


어수리로 차린 영월의 밥상
영월에서 단종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그의 삶과 얽힌 이야기가 자연스레 들려온다. 그중에는 단종이 즐겨 먹었다는 어수리나물과 관련된 야사도 있다. 영월 백성들이 산에서 캔 어수리로 만든 나물을 단종에게 올리자 단종이 그 맛을 보고 정순왕후의 연한 분 향을 떠올리며 자주 찾았다는 이야기다. 어수리는 3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깊은 산에서 자라며, 조선 시대 임금 수라상에 오르던 진상 나물로도 알려져 있다. 어린 왕의 사연이 깃든 이 나물은 오늘날 영월을 찾는 여행객들이 즐겨 먹는 향토 별미가 되었다.
어수리나물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 박가네를 찾았다. 영월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이 식당은 원래 곤드레나물밥으로 유명했는데, 박금순 대표가 오랜 연구 끝에 2020년 어수리나물밥을 선보이면서 영월을 대표하는 특화 음식점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 메뉴는 ‘어수리 더덕 정식’. 가마솥에 어수리나물을 넣고 지은 밥에 더덕구이를 곁들인 상차림으로, 막장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각종 산나물 반찬이 상 위를 빈틈없이 채운다. 박가네의 어수리나물밥은 말린 것이 아닌 생나물을 사용해 향과 식감이 더욱 또렷하다. 무쇠솥의 뚜껑을 여는 순간 초록빛의 어수리나물밥이 시선을 압도하고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곤드레나물밥보다 부드럽고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싸래한 뒷맛이 은은하게 올라와 매력적이다. 특제 양념간장 한 숟갈을 넣어 고루 비빈 뒤 고추장 양념이 잘 밴 더덕구이를 얹어 먹으면 풍미가 한층 깊어진다. 어수리나물밥은 어떤 반찬과도 궁합이 좋다. 특히 반죽에 어수리를 갈아 넣어 부친 어수리전과 시금치 대신 어수리를 넣은 잡채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삼잎국화나물, 곰취, 두릅, 가죽나물, 고사리 등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물 반찬을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수리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강둔치에 자리한 우리빵에서는 어수리를 활용한 이색적인 빵과 음료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의 시그너처 메뉴는 영월산 어수리와 꿀을 넣어 구운 ‘어수리 카스텔라’. 우리빵의 최종권 대표가 성원진 제빵사와 함께 1년 넘게 연구해 최상의 맛을 구현해 냈다. 설탕 대신 꿀을 사용해 덜 달고, 어수리 특유의 향긋함이 스며들어 먹을수록 그 맛에 빠져든다. 단면에 선명한 녹색이 드러나고, 윗면에는 가례복을 입은 단종과 정순왕후 캐릭터가 나란히 찍혀 있다. 이름은 ‘꽃길만카스텔라’. 두 사람이 하늘에서라도 꽃길만 걷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한 손님의 요청으로 탄생한 ‘어수리 소금빵’도 인기 메뉴다. 카스텔라보다 어수리 향이 은은하고, 다음 날 먹어도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다. 최근에는 ‘어수리 라테’도 선보였다. 싱그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기분까지 산뜻해진다. 어수리에 담긴 봄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자연이 빚은 절경, 한반도지형
10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이후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를 찾는 이가 크게 늘었지만, 본래 영월은 자연이 빚은 절경으로 사랑받아 온 여행지다. 그중에서도 한반도지형은 서강을 대표하는 풍경으로 손꼽힌다.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된 이 지형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울 만큼 한반도와 꼭 닮았다. 이처럼 독특한 형상은 서강이 오랜 세월 굽이치며 흐르는 동안 침식과 퇴적을 거듭한 끝에 만들어졌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한반도지형은 영월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고, 명성에 힘입어 행정구역 명칭도 ‘서면’에서 ‘한반도면’으로 바뀌었다.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지금도 땅이 조금씩 깎이고 쌓이며 지형이 변하고 있다. 가장 또렷한 한반도지형을 보고 싶다면, 바로 지금이 적기다.
주소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한반도로 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