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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여행자의 안식처 양산

2026년 01월 01일

  • EDITOR 고아라
  • pHOTOGRAPHER 안홍범

영남알프스의 수려한 풍광과 아득한 세월을 간직한 통도사를 걸으며 마음의 평온을 얻고, 이 땅에 기대어 일상을 꾸려 가는 원도심 사람들과 온기를 나눴다. 경남 양산의 겨울 풍경이 한없이 따스하다.

마음의 고요를 좇아

천성산의 타오르는 일출을 감상하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양산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마주한다.

경남 양산은 부산과 김해, 밀양, 울산과 맞닿은 지리적 요충지로 영남알프스에 속하는 영축산과 천성산, 대운산, 오봉산 등 해발 500미터가 넘는 웅장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도심 한가운데에는 온화한 물결의 낙동강이 가로질러 흐른다. 덕분에 양산은 예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꼽혔다. 물금읍 원도심에는 아담한 동네 책방과 빈티지한 가죽 공방, 낙동강 풍경을 품은 카페가 모여 있고, 맞은편 신도시에는 고층 건물과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상가가 즐비하며, 숲과 들판이 어우러진 원동면에선 미나리와 딸기가 쑥쑥 자란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의외의 매력이 발견되는 곳. 부산 옆 작은 도시로만 여겼던 양산의 재발견이다.

천성산 정상에는 원효봉 표지석과 평화의 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천성산
해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신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자취를 감춘 새벽, 천성산 일출을 맞기 위해 지극한 어둠을 헤쳐 원효암에 닿았다. 해발 922미터의 천성산은 울산 울주 간절곶과 함께 내륙에서 가장 먼저 동해의 일출을 맞이할 수 있는 해돋이 명소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전국의 해맞이꾼들이 칼바람을 뚫고 모여든다.
원효암에서 천성산 정상인 원효봉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 긴 코스는 아니지만 깊은 산에 내려앉은 어둠은 한 줌의 빛도, 온기도 허락하지 않기에 단단히 채비해야 한다. 야간 산행을 나서기 전 장갑과 목도리, 귀마개를 챙겼다. 다행히 등산로는 완만한 편. 랜턴 불빛이 간신히 어둠을 걷어 낸 자리를 따라 차근차근 걸음을 내딛는다. 막막한 시야로 엄습하는 두려움도 잠시, 하늘에 흩뿌려진 선명한 별빛과 포근한 흙 내음, 밀도 높은 고요함이 의외의 평온함을 전한다. 20분쯤 오르자 숲을 벗어나며 일순간 시야가 탁 트인다. 영남알프스의 하이라이트인 억새 평원이 시작된 것이다. 잘 닦인 등산로가 드넓은 억새밭을 가로질러 정상까지 쭉 이어진다. 지난가을 풍성한 은빛 머릿결을 흩날리며 장관을 이루던 억새는 메마른 몸으로 매서운 계절을 견디면서도 잔잔한 손짓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억새의 환대를 받으며 정상으로 오르는 길,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루를 시작한 이들의 불빛이 하나둘씩 도시를 밝힌다. 데칼코마니처럼 하늘과 땅에 찬란한 별 무리가 펼쳐진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천성산(원효봉)’이라 새겨진 거대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성산 정상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영남알프스에는 천성산을 비롯해 군지산, 봉화산, 정족산, 백운산, 망월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천성산은 그중에서도 해발고도가 가장 높아 유독 풍광이 빼어나다. 정상에 서서 발아래로 굽이치는 산세와 산허리를 감싼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웅장한 파도가 덮쳐 오는 듯하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서서히 어둠이 개는가 싶더니 곧이어 지평선 너머로 손톱 같은 해의 머리가 빼꼼 솟아오른다. 그 순간 세상은 단숨에 얼굴을 바꾼다. 검푸르던 하늘이 온통 붉은빛으로 일렁이고, 얼음에 갇혀 있던 흙과 풀잎이 촉촉해지면서 향긋한 냄새를 뿜어낸다. 귀가 아릴 만큼 차가웠던 공기도 한결 누그러진다. 어느덧 온전히 원형을 드러낸 태양이 아늑한 품을 열어 보인다. 추위와 어둠을 견디느라 고생했다며 토닥이듯이.
천성산은 일출 감상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오를 만하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만산홍엽을 이루고, 여름에는 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지며, 가을에는 은빛으로 일렁이는 억새 군락이 펼쳐져 사계절 내내 사랑받는 관광 명소다. 천성산은 해골 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신라 승려 원효대사와도 인연이 깊다. 천성산의 본래 이름은 원적산. 원효대사가 상봉에서 1000명의 승려에게 <화엄경>을 강론해 깨달음을 얻도록 이끌었는데, 이후 ‘1000명의 승려가 모두 성인이 됐다’는 뜻의 천성산으로 불렸다.

통도사 근처에 자리한 고택 차실, 몽유재의 고풍스러운 외관.
아침 햇살이 들자 ‘반야용선도’가 자세히 들여다보인다.

천년의 숨결이 깃든 통도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자 국보인 대웅전을 포함해 수많은 국가유산을 보유한 사찰, 1400년 동안 법등이 한 번도 꺼지지 않은 곳,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 종찰. 통도사가 지닌 묵직한 의미를 가슴에 품은 채 하북면으로 향했다.
영축산 자락에 위치한 통도사는 경남 합천의 해인사,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로 불린다. 삼보사찰이란 말 그대로 세 가지 보물을 품은 사찰을 이른다. 부처를 가리키는 ‘불(佛)’, 부처의 가르침인 ‘법(法)’,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를 뜻하는 ‘승(僧)’이 바로 그것. 이러한 이유로 삼보사찰은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뿌리를 상징한다. 그중 통도사는 부처의 몸인 ‘불’에 해당한다.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부처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것. 경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동이 틀 무렵, 얕은 개천을 건너 통도사 입구에 닿자 근엄한 자태의 천왕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1337년 취암대사가 초창한 국가유산 보물이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한눈에도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건물들과 삼층석탑이 차례로 등장한다. 아침 햇빛이 스며든 외벽에는 극락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중생들의 모습을 그린 ‘반야용선도’를 비롯해 빛바랜 그림들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펼쳐 낸다. 통도사 가장 안쪽에는 고즈넉한 목조 불전인 대웅전이 자리하는데 여느 사찰과 달리 불상이 없다. 건물 뒤편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옆 삼성각의 계단을 오르면 금강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종 모양 석조물을 중심으로 정사각형 구조의 단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한 수계 의식이 이뤄지는 장소로 신성한 분위기가 감돈다.
사찰을 나와 암자로 향하던 중 특별한 풍경이 시선을 끌었다. 널찍한 마당 가득 장독대가 빼곡하게 늘어선 서운암이다. 성파 스님이 20년 이상 도자를 구우며 만든 <팔만대장경> 도자 경판과 삼천불을 보관한 법당이다. 이곳에선 사라져 가는 한국 전통의 천연 염색 기법을 재현·계승하고 있으며, 생약재를 첨가한 전통 약 된장을 개발해 양산 특산품으로 만들었다.
통도사 근처에는 자연과 예술, 사람을 이어 주는 복합 문화 공간, 스페이스 나무가 자리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 위로 야외 전시장이 펼쳐지고 너른 정원과 모던한 갤러리, 아늑한 찻집 등이 어우러져 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갤러리 앞 고택 차실, 몽유재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몽유재가 자리한 고택은 경남 합천 출신인 남명 조식의 정신을 가르치던 서당 진의재와 안동 고택 세 채를 연결해 지었다.
오래된 목조 건물 특유의 향이 밴 다실에 앉아 몽유재의 시그너처 차를 주문했다. 귤껍질을 말린 진피와 생강, 영지버섯, 구기자, 쑥 등 건강한 재료를 블렌딩해 고소한 맛과 향이 나는 차가 몸을 따뜻하게 데워 준다. 맛만 좋은 게 아니다. 면역력 강화와 항산화 작용에 도움을 주며 카페인을 함유하지 않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다기는 양산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인데, 차 종류에 따라 그에 맞는 디자인의 찻잔을 제공한다. 다과 역시 차와의 조화를 고려해 곁들여 낸다. 어떤 차를 주문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몽유재 오늘의 차’를 추천한다. 계절과 날씨, 상황에 따라 차와 다과를 맞춰 내준다.

대운산 품에 안긴 숲애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숲애서
양산에는 천성산과 함께 꼭 한번 올라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다. 영남알프스 산군에 속하는 대운산이다. 울산 울주와 경남 양산에 걸쳐 있으며 낙동정맥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울산 12경 중 하나인 내원암계곡으로 유명하고, 원효대사의 마지막 수도지로도 알려져 있다. 2021년 7월, 수려한 자연경관을 품은 이곳에 특별한 공간이 문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공립 양방 항노화 힐링 서비스 체험관, 숲애서다. 이름이 어렵게 느껴지는데, 한마디로 ‘숲속 치유 센터’다. 대운산자연휴양림 인근에 1만 5000제곱미터 규모로 자리하며 힐링동, 숲치유길, 치유동으로 이뤄져 있다. 힐링동은 대운산 숲에 둘러싸인 숙소이고, 숲치유길은 자연 속에서 명상과 체조, 산책을 체험할 수 있는 숲이며, 치유동은 요가, 운동, 마사지, 테라피, 웰빙 식사 등의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다. 당일형과
1박 2일 또는 2박 3일 숙박형으로 나뉘어 있으며, 테마별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선택의 폭이 넓다. 짜여진 프로그램 외에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 힐링 시간도 주어진다.
대운산의 청정 자연 속에서 치유 요가와 해먹 명상, 맨발 걷기 등을 체험하다 보면 일상의 걱정과 고민이 눈 녹듯 사라진다. 소리의 파장이 몸을 이완하는 싱잉볼 사운드 테라피도 놓치지 말 것. 숲을 향해 큰 창이 나 있는 심신치유실에 앉아 눈을 감고 싱잉볼의 오묘한 울림에 귀 기울이면 잡념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평온해진다. 자유 힐링 시간에는 다양한 테라피 체험도 할 수 있는데, 그중 건식 수압 마사지 기기를 활용해 피로를 풀어 주는 아쿠아 테라피는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들어 더욱 인기가 많다.

도시의 리듬에 맞춰

원동 설향 딸기를 직접 수확해 보고 원도심의 카페와 숍을 누비다가 해가 지면 황산공원의 불빛정원을 거닌다.
양산의 숨은 매력을 오감으로 즐겼다.

새빨간 열매의 유혹, 딸기당
1월의 양산은 어딜 가나 딸기 향이 물씬하다.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가, 시장 구경을 하다가, 또 등산로 입구를 걷다가도 탐스럽게 익은 딸기를 만난다. 대부분 양산 특산품인 원동 딸기다. 양산 원동면에는 낙동강을 따라 딸기 농장 여러 곳이 늘어서 있다. 강변에 위치해 배수가 잘되고 땅이 비옥한 데다 기후가 온화해 딸기 재배에 최적의 환경을 갖췄다. 덕분에 원동 딸기는 유독 과육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다. 또 양산 지역의 청정 농산물 생산 정책에 따라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을 억제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해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다.
원동 딸기를 직접 수확하고 맛보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원동면 화제리의 딸기당으로 달려갔다. 딸기당은 국산 품종인 설향을 재배하는 농장. 딸기를 겨울 과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설향 덕분이다. 설향(雪香)은 ‘눈 속의 향기’란 뜻으로, 봄에 수확했던 딸기를 품종 개량으로 한겨울부터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딸기에 치명적인 흰가루병에 강해 친환경 재배가 가능하며 일반 딸기보다 과실이 크고 당도가 높다. 과즙도 풍부해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새콤달콤한 맛과 향이 퍼진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달콤한 딸기 향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널찍한 공간에 딸기 화단이 줄 맞춰 늘어서 있고 곳곳에 빨갛게 익은 설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침이 고인다. 원동면 화제리의 딸기 농장들은 직접 딸기를 수확해 보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딸기당은 무제한 시식이 가능해 특히 인기가 많다. 하우스 한 동당 15명으로 입장을 제한해 여유롭게 수확과 시식을 즐길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양 볼 가득 딸기를 먹으며 맛있다고 외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뿌듯해요. 열심히 딸기를 재배한 보람을 느끼죠.” 진영근 딸기당 대표가 그 순간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띤다. 진 대표는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젊은 농부. 10년째 딸기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며 노하우를 쌓고 홀로 서기 위해 농장을 시작했다. 새내기 농부에겐 힘든 순간도 많았다. 껍질이 없는 딸기는 병에 취약해 열매가 제대로 자라지 않을 때가 많았고, 판로가 확보되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딸기를 그냥 버려야 할 때도 있었다. “딸기 수확 체험을 통해 원동 딸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제가 농장을 운영하는 목표이자 원동력입니다.” 진 대표가 건넨 딸기를 한 입 베어 무니 과연 ‘원동 딸기’다. 과육의 밀도가 높고 단단하달까, 묵직한 식감부터 남다르다. 달콤새큼함이 적절히 어우러진 맛의 조화도 일품이다.

국수와 김밥, 계절전 등 물금 기찻길의 정겨운 메뉴.

다정한 원도심의 초대, 물금 서리단길
양산 여행은 의외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고즈넉한 산길을 걷다 고층 빌딩이 병풍처럼 둘러싼 신도시를 마주하고, 고요한 사찰을 지나면 드넓은 딸기밭이 펼쳐진다. 물금역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 앞의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도시인 동부마을과 원도심인 서부마을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 서부마을은 한때 물금읍 행정복지센터와 물금역, 물금시장이 들어선 상업 중심지였으나 신도시 조성 계획에서 제외되면서 점차 쇠락했다. 낡은 주택과 텅 빈 상가가 많아 휑하던 이곳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독립 서점과 가죽 공방, 카페, 이탤리언 식당 등 감각적인 공간이 하나둘 들어서면서부터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다방이나 상회 간판과 허름한 주택을 개조한 상점은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MZ세대의 흥미를 끌었고, 중장년층에겐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서부마을은 ‘서리단길’이라는 새 이름도 얻었다.
물금역에서 서리단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옛 물금역을 닮은 식당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정표처럼 생긴 ‘물금 기찻길’이라는 간판에는 왼쪽 화살표에 ‘국수’, 오른쪽 화살표에 ‘김밥’이 적혀 있다. 간판 그대로 국수와 김밥을 주메뉴로 하며 떡국, 콩국수 등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요리를 낸다. 특별할 것 없지만 그래서 더 정겹다. 눈에 띄는 메뉴는 계절전. 제철 채소를 이용한 전인데, 겨울에는 늙은 호박과 부추를 넣는다. 특이한 점은 부침가루 없이 제철 채소만으로 전을 부친다는 것. 바삭하진 않지만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먹고 난 후 속이 편하다.
빨간 지붕과 나무 창문, 손 글씨 간판, 노란 우편함까지 마치 동화에 나올 법한 외관이 사랑스러운 기빙트리는 서리단길의 유일한 서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은영 대표가 선별한 다양한 장르의 도서와 아기자기한 소품이 빼곡하고, 안쪽에는 커피 한잔과 함께 조용히 독서하기 좋은 테이블이 있다. 판매하는 새 책과 손때 묻은 헌책을 같이 진열했는데, 새 책은 구매 후, 헌책은 음료를 주문하면 시간 제한 없이 머물며 읽을 수 있다. 바에서 보관해 둔 위스키를 찾아 마시듯 동네 주민들은 수시로 서점에 들러 자신이 보던 책을 이어 읽기도 한다. 건물 뒤편의 별채는 비밀스러운 독서 공간으로 꾸몄다. 쿠션 위에 엎드려 책을 읽을 수 있는 방과 일광욕을 즐기기 좋은 테라스,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독서 모임을 할 수 있는 장소까지 각기 다른 분위기의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는 드로잉이나 가드닝, 바느질 등의 원데이 클래스는 물론, 한 달에 한 번 환경 독서 모임도 열린다.
기빙트리 방 대표는 30년 직장 생활을 마친 후 인생 2막을 위해 서점을 차렸다. “카페 이용 시간이 무제한인 데다 구매하지 않아도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수익이 많지 않아요. 환경 독서 모임이나 원데이 클래스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워낙 책과 환경에 관심이 많아 하루하루 재밌게 꾸려 가고 있어요.” 서점에선 환경을 다루는 매거진을 무료 배포하고, 공정 무역 제품이나 친환경 상품을 위탁 판매하기도 한다. 정기적으로 마음 맞는 사람들과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활동도 이어 가며 서리단길을 넘어 양산 지역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대표의 취향이 오롯한 아지트가 어느새 지역의 환경 생태 거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패슬로우의 인기 메뉴인 레몬 소르베와 하우스 와인, 크림 핫초코, 라테, 뱅쇼 소르베, 피낭시에.

서리단길의 상점과 식당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는 늦은 밤, 홀로 아늑한 불빛을 밝히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곳이 있다. 밤 12시까지 운영하는 가죽 공방 겸 카페 & 바, 패슬로우다. 유럽의 오래된 바를 연상시키는 이곳은 외관에서부터 주인의 남다른 감각이 엿보인다. 서울에서 가죽 다루는 법을 배운 대표는 고향인 양산에 내려와 가죽 공방을 열었다. 처음엔 공방만 예약제로 운영하다가 가죽에 대한 관심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1층은 카페, 2층은 공방으로 꾸렸다. 고풍스러운 나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는 가죽 소파와 원목 가구, 빈티지한 카펫으로 꾸며 아늑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다. 여기에 가죽 가방과 가죽 지갑, 가죽 재킷 등을 인테리어 소품처럼 배치해 패슬로우만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덕분에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들도 자연스레 가죽 제품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음료와 디저트 또한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올 만큼 훌륭하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라테부터 달콤한 크림 핫초코, 상큼한 레몬 소르베 등 각기 다른 매력의 다양한 메뉴를 선보인다. 최근에는 겨울 시즌을 맞아 뱅쇼 소르베를 새롭게 출시했는데, 따뜻하게 마시던 뱅쇼를 시원한 소르베로 즐길 수 있어 찾는 이가 많다. 기다란 피낭시에에 솔트 초코나 아몬드를 입힌 디저트도 커피와 잘 어울려 인기가 많다. “물금역에는 밤 11시가 넘어서도 기차가 다녀요. 막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서리단길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자정까지 운영합니다. 덕분에 마지막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고 있어요.” 늦은 시간까지 커피를 내리는 대표의 손이 분주하다.

영화공장은 여유롭게 앉을 수 있는 그라운드 좌석과 프라이빗한 룸인 스카이박스 좌석으로 구성돼 있다.

세상에 없던 극장, 영화공장
OTT의 확산으로 극장을 향한 발길이 뚝 끊긴 요즘, 영화 산업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공간이 등장했다. 양산시 덕계동에 문을 연 영화공장이 그 주인공. 외관은 이름처럼 컨테이너와 쇠 파이프로 이뤄져 공사장을 연상시키지만,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오페라하우스를 방불케 하는 화려함이 반전 매력을 선사한다. 좌석 구성도 독특하다. 의자가 가로로 길게 나열된 일반 극장과 달리 1층 그라운드 공간에는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을 수 있는 1인 소파가 놓여 있고, 그 뒤로 오페라극장처럼 스크린을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된 26개의 룸이 3층까지 이어진다. 편안하게 앉아 영화 감상을 하고 싶다면 그라운드 좌석을,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식사를 즐기며 영화를 보고 싶다면 룸으로 된 스카이박스 좌석을 선택하면 된다. 스카이박스 좌석은 1~2인실의 체어형과 2~4인실의 매트리스형으로 나뉘며 조도와 볼륨, 온도를 개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방음 부스로 제작해 연인이나 친구, 가족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감상하기에도 좋다.
배가 출출했던 터라 스카이박스 좌석을 예약하고 극장에 들어섰다. 2~4인실은 웬만한 성인 서너 명이 누워도 넉넉할 만큼 공간이 여유롭다. 방 전체에 푹신한 매트와 등받이가 깔려 있고 중앙엔 아담한 테이블과 조명이 놓여 있어 아늑한 분위기다. 음식은 티켓 발권 시 결제하거나 극장 내 테이블에 비치된 QR코드로도 주문할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치킨. 갈릭 소스와 고추 마요, 치즈 등 다양한 종류의 치킨과 튀기지 않고 구워 낸 로스트 치킨도 있다. 주문한 음식은 조리 후 직원이 가져다준다.
룸 내부는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스크린이 한눈에 들어오고, 볼륨과 조도 조절이 가능해 몰입감을 높여 준다. 극장에서 친구와 함께 푹신한 매트리스에 기대어 치킨을 먹으며 보는 영화라니. 이런 극장이라면 방구석 영화관의 편안함도 견주기 힘들다.

황산공원의 자전거도로는 부산과 밀양을 잇는 국토종주 자전거길이다.

안온한 빛을 품은 황산공원
여행지에서 공원만큼 현지인의 삶과 문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가 또 있을까. 공원은 일상 속 쉼터이자 놀이터로, 꽃이 만개하는 계절에는 축제의 장으로, 공연이 열릴 때는 문화와 예술의 무대로 변모하며 사계절 내내 시민과 함께한다. 뉴욕에 센트럴파크, 도쿄에 요요기 공원이 있다면 양산에는 황산공원이 있다. 양산 12경 중 하나로 꼽히는 황산공원은 국화, 댑싸리, 불빛정원 등 계절마다 다른 풍경으로 시민과 여행객의 발걸음을 이끈다.
물금역 바로 앞에 자리한 황산공원은 2012년 낙동강 수변 공원으로 조성됐다. 규모는 187만 3000제곱미터로 서울 여의도 절반에 달한다. 공원 내에는 마음정원, 문주광장, 황산정, 축구장, 야구장, 배구장, 농구장, 배드민턴장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특히 양산 지역 최대 규모의 캠핑장은 사시사철 인기가 많은 황산공원의 명소다. 일반 캠핑장과 오토캠핑장 모두 있어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하며 샤워장, 취사장, 야외 테이블 등 편의 시설도 꼼꼼하게 갖췄다. 여름이면 캠핑장 근처 이색광장에 물놀이장이 들어서고, 가을에는 캠핑 페스티벌이 열려 캠핑을 하는 내내 심심할 틈이 없다.
찬바람에 코끝이 시려 오는 이 계절에도 황산공원 풍경은 한없이 아늑하고 평화롭다. 은빛 억새가 너른 공원을 포근한 이불처럼 뒤덮고, 겨울 철새들의 노랫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잔잔히 울려 퍼진다. 낙동강과 맞닿은 곳에는 양옆으로 메타세쿼이아가 곧게 뻗은 자전거도로가 이어진다. 부산과 밀양을 잇는 국토종주 자전거길이다. 바람을 가르는 라이더의 질주를 보고 있노라면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깨어나는 듯하다. 자전거도로 옆 산책로에는 연인이나 친구, 반려견과 나란히 걷는 시민들이 눈에 띈다. 그 일상적이고도 다정한 모습에 이끌려 산책에 나섰다. 평탄한 길을 따라 한쪽에는 황금빛 물결의 낙동강이, 다른 한쪽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가 마중을 나온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그저 걸었을 뿐인데 황산공원이 품은 겨울의 황홀한 풍경을 온전히 누리게 된다.
이 겨울, 황산공원을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공원 중심에 자리한 중부광장에 250여 점에 달하는 빛 조형물을 설치해 알록달록한 불빛정원으로 꾸민 것. 공원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겨울을 테마로 한 형형색색 조명이 어두운 밤을 화려하게 밝힌다. ‘2026년 양산 방문의 해’의 관광 캐릭터 ‘호잇’과 ‘뿌용’을 비롯해 하늘의 별을 잔디밭에 풀어놓은 듯한 정원과 양산 통도사를 닮은 조형물, 앙상한 나뭇가지에 나뭇잎 대신 매달린 초록색 조명까지, 마치 동화 속 환상의 세계로 들어온 듯하다. 황산공원 불빛정원은 오는 3월 2일까지 이어진다.
겨울은 세상 만물이 안식처를 찾는 계절이다. 곰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땅을 파고들 듯, 사람에게도 쉬어 갈 안식처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다정한 사람이 주는 온기. 양산은 한겨울에 숨어들고 싶은 여행자의 집이다.

INTERVIEW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행의 특별함

양산 여행은 특별한 관광지를 찾는 것보다 시민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삶과 문화를 경험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2026년 양산 방문의 해, 신기영 양산시청 관광과 과장이 양산의 평온한 일상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 양산시청

양산을 찾는 여행객이 늘고 있습니다. 양산은 어떤 도시인가요? 양산은 자연과 도시, 사람이 잘 어우러지는 도시입니다. 방문객은 인위적인 관광지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이 여행의 매력으로 연결되는 지점을 먼저 느끼죠. 가족 단위의 체험과 소규모 여행, 계절 산책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객이 양산의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오랫동안 지역을 지켜 온 시민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양산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행객들이 특히 좋아할 만한 양산의 명소를 소개해 주세요. 황산공원을 추천합니다.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지만 직접 걸어 보면 도심과 자연이 이어지는 흐름이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운동하는 시민과 산책하는 가족, 피크닉을 즐기는 여행객이 한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계절마다 다른 풍경도 매력 포인트입니다. 봄 벚꽃 축제, 가을 국화 축제, 2025년에 새롭게 개최한 달걀 축제까지, 방문 시기에 따라 색다른 경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캠핑장과 파크골프장, 자전거 길 등 체험 요소도 다양해 가족 여행객과 소규모 여행객 모두 만족하는 명소죠. 주변 상권과 가까워 이동이 편리하고, 물금역과 연결돼 접근성도 뛰어납니다. 겨울철 양산에서 꼭 찾아야 할 장소와 먹거리를 추천해 주세요. 겨울에는 낙엽이 진 산 능선과 계곡, 숲길이 담백하고 차분한 풍경을 펼쳐 보입니다. 천성산을 걸으면 맑은 겨울 햇살과 고요한 자연 속에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등산 후에는 따뜻한 국물 요리가 좋습니다. 양산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돼지국밥은 겨울철 필수 코스입니다. 추운 날씨에 식당 문을 열었을 때 퍼지는 국물 향과 김이 포근함과 반가움을 동시에 불러오죠. 지난해 유튜브 채널 <로컬콜링>에서 양산의 돼지국밥 맛집을 소개했는데, 영상만으로도 그 따뜻함과 깊은 맛에 매료되어 찾는 이가 많아졌습니다. 남부시장을 비롯해 물금 서리단길과 북정·평산동 먹자골목 등에 로컬 식당이 즐비해요. 선택지가 너무 많아 ‘오늘은 어디로 갈까’ 고민에 빠질 정도입니다. 전망이 좋은 곳에 트렌디한 대규모 카페도 많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겨울 풍경을 감상하기도 좋습니다. 2026년 양산 방문의 해에 양산을 찾으면 무엇을 즐길 수 있나요? 도시 곳곳에서 자연, 일상, 문화를 두루 체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관광 프로그램이 펼쳐집니다. 먼저 물금역 일대는 3~4월 벚꽃 시즌을 맞아 ‘양산프렌즈 웰컴센터’로 꾸밀 예정입니다. 꽃길 산책을 비롯해 미니 게임, 캐릭터 굿즈 체험, 인증 사진 포인트 등을 마련하고 참여자에게는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합니다. 황산공원에서는 3월부터 6월까지 야외 스토리형 방 탈출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공원 곳곳의 숨은 공간을 탐험하며 미션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놀이와 자연을 함께 즐기는 참여형 콘텐츠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는 10월에는 2025년에 처음 선보인 달걀 축제 ‘에그야 페스타’를 더욱 확대된 규모로 개최합니다. 달걀을 활용한 요리 체험과 게임, 이벤트 등 온 가족이 함께 즐길 거리와 먹거리를 풍성하게 마련할 것입니다. 양산 여행 주간에는 지정 숙소 예약 시 할인 혜택을 제공해 여행의 접근성을 높일 예정입니다. 이처럼 테마별·계절별 프로그램을 통해 단순한 관광을 넘어 양산의 자연과 일상, 체험과 축제가 어우러진 풍부한 여행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양산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양산을 여행할 때는 ‘특별한 명소를 찾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고 도시의 일상과 자연, 사람과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보기 바랍니다. 마을의 작은 골목과 영남알프스의 깊은 산, 물결이 잔잔한 강, 지역 주민의 소소한 생활 모습까지 모두 여행의 풍경이 됩니다. 통도사에서 천년고찰의 위엄을 느끼고, 로컬 식당에서 따뜻한 한 끼를 즐기며, 카페에서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낙동강 산책로와 황산공원 체험, 숲애서 치유 프로그램 등 여행 중 마주하는 순간순간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겁니다. 양산은 ‘일상과 여행이 만나는 도시’입니다. 잠시 머물러 걷고, 보고, 맛보고, 숨 쉬며 각자의 방식으로 양산을 경험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