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놀이 인파로 붐비는 서울랜드 옆 ‘아더랜드’라는 또 다른 세상. <아더랜드 II: 와엘 샤키, 아크람 자타리> 전시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올여름 한시적 극장이 된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뜨거운 사막을 건너온 사내들이 있다. 아랍 출신의 두 작가 와엘 샤키와 아크람 자타리는 요즘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이름이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에서는 이들의 국내 미공개 작품이 절찬 상영 중이다. MMCA의 뉴미디어 소장품을 소개하는 <아더랜드 II: 와엘 샤키, 아크람 자타리>다.
2645제곱미터(약 800평) 규모의 과천 1원형전시실 내 상영작은 단 두 점. 미술관은 오직 이 둘을 위한 특별한 극장을 만들었다. 상영관 내부는 화면 속 영상의 일부처럼 재현되었으며, 객석 의자까지 통일된 시각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치 실험 무대극을 보는 것 같다. 각 작품의 러닝타임은 제법 길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최고 화제작 중 하나로 이집트 국가관 앞에 긴 줄을 서게 했던 와엘 샤키의 <드라마 1882>(2024)는 약 48분, 레바논을 대표하는 아크람 자타리의 <거부하는 조종사에게 보내는 편지>(2013)는 약 36분으로, 영화관을 찾을 때처럼 시간 여유를 두고 보는 게 좋다. 두 작품은 꼭 100년의 시간 차를 두고 1882년의 이집트와 1982년의 레바논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그곳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흡인력 있는 서사와 감각적 구성으로 흥미롭게 재해석한 이 작품들은 낯선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일제 강점의 역사나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며 묘한 기시감을 불러온다. 오전 10시 조조 영화부터 객석은 만원이었다. 아쉽지만 콜라와 팝콘은 반입 금지다.

와엘 샤키의 파스텔 톤 오페라
핑크색 카펫과 커튼으로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공간.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 숫자가 0이 되면 마침내 화면의 커튼이 걷히고 배우들이 등장한다. 마치 웅장한 오페라 공연처럼 말이다. 무대 세트는 종이로 만든 왕국처럼 아름답고 회화적이다. 배우들은 대사를 노래로 대신한다. 19세기 말 이집트에서 일어난 ‘우라비 혁명’ 과정을 총 8장의 오페라 형식으로 구성한 와엘 샤키의 <드라마 1882>는 지난해 베니스에서 공개된 후 모든 에디션이 빠르게 팔렸다. MMCA의 소장품은 그중 다섯 번째 에디션이다. 제국주의 열강에 맞선 우라비 대령의 저항은 실패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이 촉발한 앵글로-이집트 전쟁 이후 이집트는 무려 70여 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에 놓였다. 하지만 어디까지 사실일까? 기록된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는 당시 수에즈운하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익명의 당나귀꾼과 몰타인 사이의 다툼을 통해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오랜 시간 서구 중심의 관점에서 기술된 중동의 역사와 신화에 질문을 던진다.
와엘 샤키는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텍스트를 기반으로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는 고전 아랍어로 극본을 쓰고 무대미술과 연출은 물론 작곡까지 직접 해결한다. 이러한 작업은 모두 작가 자신의 뿌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1971년 북부 이집트에서 태어난 그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수께끼로 가득한 고대 문명사회의 유적과 가장 성스러운 도시를 오가며 살았던 셈이다. 시대적으로는 서구 대중문화가 홍수처럼 쏟아져 사막 전역에 범람하던 1980년대였다. 창밖으로는 신자들의 성지 순례(Hajj)가 이어지고 텔레비전에서는 왁자지껄한 미국식 코미디 쇼와 프로레슬링 경기가 벌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한 인터뷰에서 그는 “메카에서는 맨발로 캐딜락을 운전하는 베두인 남성과 당나귀를 타고 있는 그의 아들을 볼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종교 경찰이 있는 보수적 사회에서 다국적 사람들과 다른 문화, 서로의 이해관계가 부딪혔다. 이러한 융합될 수 없는 체제 간 모순은 상당 부분 그의 언어와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영상, 회화, 조각, 공연, 음악 등 다양한 매체를 혼합해 알려진 사실에 예술적 허구를 더하고, 이종(異種)의 세계가 뒤섞인 이야기를 만든다.
제목처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드라마 1882>는 실제 사건을 다루지만 분위기는 초현실적이다. 촬영과 리허설은 모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오래된 극장 ‘모하메드 압델 와하브’에서 진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파스텔 톤으로 예쁘게 포장된 무대 위에서 한 편의 동화가 되고,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움직이는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은 우스꽝스럽고 기묘하다. 작가는 진짜 같은 가짜의 구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는 가짜 같은 가짜 무대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전문 배우 대신 아이들을 기용하거나 배우들에게 가면을 씌움으로써 이야기의 객관적 실체를 기계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서 영화라는 형식은 실제 상황과 재현 무대, 현실 사이에 거리를 형성하고, 스크린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한다. 그는 묘사로서의 회화를 거부한 독일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사진에 기반한 회화 제작을 통해 순수한 실재 세계를 드러냈던 것처럼 영화를 이용한다. <드라마 1882>는 이례적으로 배우들의 얼굴을 보여 주지만 그들은 모두 무표정하다. 변색된 기억, 혹은 꿈과 같이 실제보다 더 환상적으로 묘사된 이 별나고 이상한 이미지들은 역사의 불확실성을 상기시키며, 작가는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해석을 창조한다.



아크람 자타리의 홈 비디오
또 다른 상영관에서는 샹송이 흘러나온다. 1960~1970년대를 풍미한 패셔니스타 프랑수아즈 아르디가 멜랑콜리한 목소리로 세르주 갱스부르가 써 준 가사를 읊조린다. “어떻게 너에게 이별을 말할까?(Comment te dire adieu?)” 한때 드라마와 광고에 단골로 삽입되었던 익숙한 노래는 오래된 필름 같은 흑백 화면과 만나 낭만적인 감성을 더한다. 영상 속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어느 건물 옥상에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고, 조용한 바다에서는 폭죽처럼 폭탄이 터진다.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아크람 자타리의 <거부하는 조종사에게 보내는 편지>다. 전쟁은 자타리가 아홉 살이던 1975년에 시작되어 15년간 이어졌다.
1966년 레바논 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베이루트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뉴욕에서 미디어 연구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에는 19세기 말부터 중동에서 제작된 약 15만 장의 초상 사진을 모은 사진 유산 공개 협회 ‘아랍 이미지 재단(AIF)’ 설립에 참여했다. 영화는 당시 그가 살았던 레바논 남부 소도시에 떠돌던 소문에서 출발한다.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 하나가 사이다 외곽의 건물을 폭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게 학교라는 사실을 알고는 학교 대신 인근 바다에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얼마 후 학교는 또 다른 조종사에 의해 폭파되었지만 이 소문은 평화로운 일상의 회복을 바라던 이들에겐 희망의 단서가 되었다. 자타리의 아버지는 이 학교 교장이었다. 집에 갇혀 온종일 카메라와 녹음기를 갖고 놀았던 그는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 형과 함께 폐허가 된 현장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레바논의 역사와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기록하는 작가가 되어 당시의 내용이 포함된 책자를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자타리는 ‘명령을 거부한 조종사’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를 직접 만난다. 여러 사람의 운명과 숙명, 우연이 겹치며 완성된 거짓말 같은 실화다. 윤리적 갈등 속에서 올바른 판단으로 무고한 생명을 구한 작은 영웅들의 서사가 지닌 힘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에서도 유효하며, 우리 역시 그러한 이들을 알고 있다. 부당한 명령에 불복한 군인들, 권력에 대항한 사람들···. 두려움에 맞서 싸운 평범한 개인의 선택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때로는 역사를 바꾸는 결과로 이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작가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의 가치를 묻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목을 따오면서 <어린 왕자>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필름과 사진을 한 편의 영화로 묶었다. 상영관에는 ‘거부하는 조종사에게 보내는 편지’ 외에도 폭격 당한 도시 사진으로 전쟁의 흔적을 보여 주는 ‘1982년 6월 6일, 사이다’라는 영상이 객석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배치된다. 옛날 텔레비전 앞에 놓인 붉은색 일인용 소파에는 누구나 앉을 수 있다. 영상의 흐름에 따라 실내 조명도 연동되어 더욱 영화관 같은 분위기다. 작가는 사진 아카이브와 필름 제작을 통해 집단의 기억을 재평가하고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공식화된 역사와 야사, 사담, 공적인 역사와 사적인 이야기 사이의 위계는 허물어지고 현재는 새롭게 쓰여진다. 영화는 미술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8월 17일까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진다. 입장료는 3000원. OTT 서비스 구독료보다 저렴하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 보자. 물놀이 인파로 붐비는 서울랜드 옆 ‘아더랜드’라는 또 다른 세상. 꽤 괜찮은 피서지가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극장의 인포메이션 데스크처럼 꾸민 MMCA 과천 1원형전시실 중앙 로비에는 작가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코너가 있다. 중세 이슬람 세계와 서구 기독교 국가 사이의 갈등을 꼭두각시 인형극으로 만든 <십자군 카바레> 3부작(2010~2015)은 와엘 샤키의 주요 작품 중 하나다. 작가는 최근 한국의 판소리와 전래 동화를 소재로 한 <러브 스토리>(2024)를 선보이기도 했다. 2018년 MMCA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아크람 자타리: 사진에 저항하다> 도록과 <거부하는 조종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처음 공개한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레바논관에 비치되었던 팸플릿도 볼 수 있다. 관람객들은 조종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다른 이들의 편지를 읽을 수도 있다. 전시를 기획한 전유신 학예사에 따르면 이 편지의 내용은 작가에게 전달되며, 준비 중인 작가의 책에 실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