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라는 지명, 그리고 ‘김창수’라는 선구자의 이름을 내건 위스키가 탄생했다.
글을 읽는다고 작가가 될 수 없듯, 위스키를 좋아한다고 누구나 마스터 디스틸러가 될 순 없다. 그의 국적이 영국이나 미국이 아닌 한국이라면 애당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테다. 2020년 여름, 경기도 김포 통진읍에 증류소를 세우고는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붙인 전무후무한 위스키 생산자가 있다. 김창수. 미답의 영역에 깃발을 내리꽂은, 한국 위스키의 닐 암스트롱.
김포에서 위스키를
만든다는 것
누구도 만들지 않았으니 만들어 보기로 했다.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의 김창수 대표에게 어쩌다 위스키를 제조할 결심을 했느냐 묻자 날아온 답이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 한국 위스키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실은, 누군가 안 된다고 하면 더 해 보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같은 성미가 있거든요. 너는, 한국에서는, 이런 환경에서는 절대 못 한다고들 하니까 오히려 자극이 됐죠. 지난 10년간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 외롭게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 위스키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난 10월,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는 3년여의 숙성을 거친 ‘김창수 위스키 김포 더 퍼스트 에디션 2024’(이하 ‘김포’)를 완성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싱글 몰트위스키의 최소 숙성 기간인 3년을 넘긴, 이 증류소의 첫 정규 제품이다. 2500여 병 한정 수량으로 선보인 ‘김포’는 출시 1분 만에 품절을 알렸다. 완성도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으며, 출시가의 수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되팔기 거래가 성행했다.
못 한다고들 하니까 자극이 됐죠. 지난 10년간 외롭게 주장했습니다.
위스키를 만들어야 한다고.
다른 기후는 다른 위스키를 만들 뿐입니다.
제품명 ‘김포’는 위스키의 숙성 환경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위스키는 브랜드 제품명으로 지역 특성을 보여 줘요. 와인이나 탁주가 지역의 산물로 빚는 술이라면, 위스키는 숙성 환경이 고스란히 반영된 술이거든요. 김포라는 지역의 기후와 환경이 담긴 술이니까, 그걸 나타내기 위해 ‘김포’라 명명했죠.” 불과 20년 전만 해도 위스키 제조국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영국을 위시한 몇 개 지역에서만 생산했으므로 연교차와 일교차가 적고 습윤한 기후를 유지해 증발량이 극히 미미한, 즉 스코틀랜드 같은 환경에서만 훌륭한 위스키가 생산된다는 통념이 굳건하게 형성돼 있었다. 김 대표는 이것이 ‘위스키 사대주의적 관점’이라 단언했다. “다른 기후는 다른 위스키를 만들 뿐입니다. 특정 기후에서 좋은 위스키가 나온다는 건 스카치위스키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전 세계를 세뇌한 메시지예요.” 그는 타이완 위스키 브랜드 ‘카발란’을 언급하기도 했다. 타이완은 아열대 지역이니만큼 증발량이 많은 편이고, 연교차가 큰 한국 또한 연간 5~10퍼센트의 증발량을 기록한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증발량이 연간 1~2퍼센트임을 감안하면 이는 제법 큰 차이다. “증발량이 많다는 건 오크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학 반응이 그만큼 빠르다는 거예요. ‘다른 기후’의 장점을 이용하면 숙성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뜻이죠.”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는 앞서 다섯 차례에 걸쳐 저숙성 제품을 테스트 삼아 내놓았다. 여느 신생 크래프트 위스키 증류소처럼 소수의 팬을 대상으로 이벤트 형식의 제품을 출시해 제품의 변화, 혹은 진화 과정을 공유하며 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고, 열광은 컬트적으로 이어졌다. “위스키 애호가들은 제품의 역사에 가치를 두니까요. 누구도 진지하게 제 얘기를 듣지 않는 와중에 제 행보를 지켜보는 몇몇 분이 계셨어요. 한국 위스키 문화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차츰 응원을 보내는 분, 도움을 주는 분이 늘어났고요. 대기업이 자본을 들여 위스키를 만든다 한들 이런 스토리는 나올 수 없겠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모든 말에 결연함과 절실함이 배어 있다.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
김창수 대표의 지난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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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 정규 제품 ‘김포’ 출시
2023년 김창수 하이볼 출시
2022년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 첫 제품 출시
2020년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 설립 | 다케쓰루 마사타카 자서전 <위스키와 나> 번역
2018년 서울 영등포 CS바 개업
2015년 일본 지치부 증류소 연수 | NHK 방송 출연
2014년 영국 스코틀랜드 증류소 102곳 방문
오랜 세월 숙성한 꿈,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
2000년대 중반, 스무 살의 김창수는 한국 전통주를 빚는 일에 골몰했다. 막걸리나 청주 등 한국 술의 근간이 가양주, 즉 집에서 빚는 술이었으므로 흥미를 붙이고 손쉽게 연구하기 좋았다. 그러기를 3년, 전 세계 술을 섭렵한 그는 위스키에 매료된다. 각별히 끌린 것은 피트(이탄) 향이었다. 피트는 위스키의 원료인 몰트(보리)를 건조하고 훈연하는 과정에 쓰는 연료로, 스모키한 풍미가 특징이다. “피트 향이 두드러지는 위스키를 처음 마실 때 충격을 받았어요. 소독약, 타르, 나프탈렌. 흔히 피트 향을 논할 때 인간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화학 물질을 동원해 묘사하는데, 그런 특이함에 관심이 갔어요. ‘러브 오어 헤이트(Love or Hate)’. 피트 향은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해요.”
대학 시절 주류 동아리를 만들어 지역 내 음주 문화 개선 캠페인을 열기도 한 김 대표는 이미 위스키 생산자로서의 윤리와 책임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스물여덟 나이에 졸업 후 허겁지겁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영 맞지 않는 옷이었고, 10개월 만에 퇴사해 바텐더가 됐다. 돈 벌면서 위스키를 배울 수 있는 곳이란 2010년대 초·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싱글 몰트위스키 바뿐. 이렇게 간신히 1000만 원을 모아 중고 텐트와 자전거를 구입한 그는 위스키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스코틀랜드 증류소 102곳을 반년 동안 모두 돌아볼 심산이었다. “여행이 아니라 일을 구하러 간 거였어요. 위스키 학교에서 유학할 돈은 없었으니까요.”
4 로고는 태극 문양을 본떠 제작했다.
여정 막바지, 취업에 실패한 채 102번째 증류소를 둘러보고 바에 가서 위스키를 마시다가 우연히 만난 동양인이 김 대표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그와의 인연으로 일본 지치부 증류소에서 일주일간 제조 연수를 받고, 증류소를 세우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위스키 여정을 기록하고 공유하기 시작한 김 대표는 귀국 후 면세점과 외국계 주류 회사에서 근무하며 위스키 업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타성에 젖어서는 안 된다고 몸부림쳤다. “먹고살 만해서, 너무 안정적이어서 다시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리고 배수진을 치는 마음으로 서울 영등포에 바를 연 거예요. 공간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모이더라고요. 위스키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공유하고 구체화할 수 있었어요. 이런 식이라면 혼자서도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까지 모은 돈과 빌린 돈을 합쳐 2020년 7월 김포에 건물을 계약했어요. 그때부터 달리기 시작했죠.”
다시 ‘김포’로 돌아온다.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의 첫걸음 ‘김포’는 피트 향이 강하게 피어오르는 위스키다. 김 대표가 처음 위스키를 만들겠다 결심하게 한, 바로 그 피트다. “위스키란 태생적으로 애호가를 위한 술이지만, 이번엔 대중의 기호를 함께 충족하고 싶었어요. 유러피언 와인 캐스크나 아메리칸 셰리 캐스크 등 다양한 캐스크를 조합해 더 복합적인 맛을 추구한 이유예요. 반걸음쯤은 대중적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해요.” 이 모든 여정의 결실인 ‘김포’는 그에게 어떤 기쁨을 안겼을까.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걱정과 시름에 휩싸여 있고, 좀처럼 만족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요. 다만 위스키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기분이 좋아요. 외국의 평가 기관이든, 한국의 소비자든, 어느 누구에게든요. 그때가 제겐 최고의 순간이에요.”
애주가를 위한 김포 여행법
위스키 ‘김포’ 즐기기 김창수 대표는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물만 곁들여 마시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했지만, 음식을 함께 먹는다면 뜨겁지 않고 간이 세지 않은 회를 추천한다. 한강에서 조업을 하는 마지막 포구인 전류리 포구, 인천 강화와 마주한 대명항 수산시장에 들러 갓 잡은 해산물을 즐겨 봐도 좋겠다. 구래동의 ‘몰트 바 글렌루나’에서는 위스키 ‘김포’를 만날 수 있다.
김포 양조장 투어 비옥한 토양과 거대한 한강 물길을 낀 김포에는 근사한 양조장이 여럿이다. 특등급 김포 금쌀로 감각적인 막걸리를 빚는 ‘팔팔양조장’, 꿀과 물과 효모로만 발효한 술 미드를 빚는 ‘메들리양조장’, 김포도시철도 운양역 3번 출구에 위치한 도시형 양조장 ‘백형양조’, 김포 하성면으로 이전해 한층 진화한 맛을 선보이는 ‘독브루어리’를 주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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