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사라져 가는 원도심의 풍경을 기록하는 곽은비 작가를 따라 동인천 배다리를 걸었다. 발걸음 닿는 곳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풍경의 연속이다.



나고 자란 동네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그 상실감은 얼마나 클까. 곽은비 작가가 맞닥뜨린 상황이 바로 그랬다. 인천 토박이인 그는 유년 시절을 보낸 학익동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록을 시작했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뛰놀던 기억을 되살려 잊힐 뻔한 동네의 풍경을 사진과 영상에 담았다. 더 많은 이와 추억을 나누고자 ‘학익동지킴이’라는 이름의 SNS 계정도 만들었다. 그곳엔 인천의 재개발 구역과 빈집 등지를 포착한 학익동에 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사라져 가는 풍경에 주목하는 곽은비 작가를 따라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동인천 배다리를 거닐었다.

오래된 동네를 여행하는 법
서울역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동인천의 한적한 마을, 배다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모여 있다. 이곳의 첫 번째 목적지는 조흥상회 건물. 허름한 외관과 명조체로 눌러쓴 간판에서부터 오랜 세월이 느껴진다. 1948년 12월, 미군 노브 파예가 촬영한 배다리 시장 사진에는 ‘조흥상회’라 적힌 간판과 그 앞에 늘어선 좌판, 분주히 오가는 상인들의 모습이 또렷하다. 한때 인천에서 가장 북적이던 시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조흥상회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조흥상회를 끼고 돌면 헌책방 거리 초입에서 서점 건물에 부착된 지도가 눈길을 끈다. 바로 곽은비 작가의 작품 ‘나의 사적인 배다리 지도’다. 어린 시절부터 드나든 배다리에 대한 기억을 모아 만든 것으로, 금곡쌀상회 간판과 옛 우물터, 색이 바랜 맨홀 등을 찍은 사진을 배다리 지도 위에 붙였다. 바로 옆에 전시된 또 다른 작품 ‘배다리 도시화석 보고서’는 오래된 표식에 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담아 완성했다. “배다리에는 옛 도시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도시화석’이 많이 남아 있어요. 대문 앞 표찰, 보안등 표식, 맨홀 휘장 등으로 설치 연도를 추정하면서 도시의 역사를 천천히 알아 가는 거죠.” 동네를 걸으며 도시화석을 꼼꼼히 살펴보고 그 너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작가의 시선을 통해 익숙한 동네를 새롭게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작품이 전시된 장소는 작가에게 특별하다. “원래 아벨서점이 있던 자리예요.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동화책을 보러 오던, 제겐 추억이 서린 곳이죠.” 지난해 아벨서점이 한미서점 옆으로 이전하면서 쓰임을 잃은 공간은 작가의 손길이 닿아 따스한 온기로 채워졌다. 그의 지도가 배다리를 찾는 여행객을 골목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새로운 쓰임을 찾은 배다리 공간
배다리엔 발길을 붙드는 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건물 안쪽으로 발을 들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헌책방 거리를 걷다가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인 골목 깊숙한 곳에서 ‘진도 여인숙’이라 적힌 간판을 발견한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인숙이 아닌 미술관이다. 전시, 강연, 영상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리는 공간을 지나 건너편 문으로 나가면 산불 피해목으로 만든 설치 작품 ‘숲의 정령’이 전시된 작은 정원을 마주하고, 발길은 자연스레 카페로 이어진다. 이 미로 같은 구조에는 사연이 있다. 2020년 동구청이 진도 여인숙과 성진 여인숙, 길조 여인숙 부지를 매입해 각각 미술관, 정원, 카페로 리모델링하면서 세 여인숙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재탄생한 것이다. 특히 길조 여인숙은 원래 ‘길조 카페’로 이름 지을 예정이었으나, 공사 중 1920년대 빨래터가 발견되면서 상호를 ‘빨래터 카페’로 바꿨다. 카페 내부에 전시된 자료들은 과거 이곳에 빨래터가 있었음을 생생히 증언한다.
골목을 빠져나가던 중 곽은비 작가가 “다음은 로봇이 서 있는 곳이에요”라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거대한 깡통 로봇이 위병처럼 서 있는 건물 벽면에는 한자로 ‘仁川釀造株式會社(인천양조주식회사)’라고 새긴 세로형 간판이 자리한다. 한때 인천의 대표 막걸리인 소성주를 빚는 양조장이었던 이곳은 현재 전시와 공연 등이 열리는 복합 문화 공간 ‘스페이스 빔’으로 변모했다. 2층 높이의 탁 트인 공간에는 ‘품질 향상’ ‘안전 주의’ 같은 옛 간판과 발효실, 시험실, 숙성실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미로처럼 얽힌 스페이스 빔을 탐험한 뒤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머릿돌에 ‘1973. 10. 25’라고 또렷이 새겨진 이 건물은 ‘문화상점 동성한의원’. 50년 동안 자리를 지켜 온 동성한의원 간판 옆엔 ‘문화상점’ 간판이 나란히 놓여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한 지붕 아래 책방, 뜨개 공방, 제로 웨이스트 숍 등 다섯 가게가 모여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무인 운영이라 부담 없이 여유롭게 둘러보기 좋다. 안쪽에 놓인 긴 테이블과 넉넉한 의자들이 언제든 편히 쉬어 가도 좋다고 말해 주는 것 같다.


근대건축물을 관찰하는 세 가지 방법
문화상점 동성한의원을 지나 창영동 거리를 걷다 보면 의외의 장소에서 근대건축물을 마주한다.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와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인천 구 여선교사 합숙소가 그 주인공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 교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에는 작은 비밀이 숨어 있어요. 창문을 여닫는 방식이 특이하죠. ‘오르내리창’이라고, 옛날 도르래를 올리는 원리처럼 위아래로 맞물린 창 두 개를 수직으로 움직일 수 있어요.”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창문을 여닫는 장면을 상상에 맡긴 채 바로 옆에 자리한 영화초등학교 본관동으로 향한다.
민트색 지붕과 새파란 정문이 인상적인 영화초등학교 본관동에서 주목할 부분은 벽돌이다. “벽돌을 가로와 세로로 번갈아 쌓은 게 보이죠? 오래된 근대건축물에서 자주 쓰던 방식으로, 벽돌을 이렇게 쌓으면 건물이 튼튼하다고 해요.” 건물을 빙 둘러보다 보니 창문 아래 톱니처럼 툭 튀어나온 벽돌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건물의 장식적 요소이자 빗물이 벽을 타고 흐르지 않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저마다 다른 쌓기 방식에서 옛 선교사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골목을 누비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목적지인 인천 구 여선교사 합숙소에 닿는다. 세모난 지붕과 둥근 창, 붉은 벽돌 굴뚝, 아담한 정원까지, 독특한 외관의 이 건물은 소설 <빨간 머리 앤>에 등장하는 초록 지붕 집을 닮았다. 출입문 위에 가로로 길게 짜 넣은 채광창도 아름답다. 촘촘한 별 모양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장식이 독특한데, 햇빛이 이 창을 통과하면 건물 안에 무수한 별 그림자가 만들어질 테다.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인천 구 여선교사 합숙소. 세 건물은 멀리서 보면 얼핏 닮은 것 같지만 곽은비 작가가 건넨 돋보기로 창문, 벽돌, 문양을 하나하나 세심히 관찰하니 건물마다 다른 표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근대건축물을 바라보는 눈이 한층 새로워진 기분이다.

배다리의 새로운 미래
100여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배다리에 새로운 바람이 분 건 2021년, 젊은 문화기획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다. 그 중심에 패치워크가 있다.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 금곡동에 자리한 패치워크는 배다리를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 예술 콘텐츠를 만드는 로컬 크리에이티브 기획사다.
여행객의 발길을 배다리로 이끈 것은 김해리 패치워크 대표가 2023년 개최한 ‘언노운 북 페스티벌’이었다. 책을 매개로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여행하는 콘셉트. 헌책방 운영자가 주인공이자 안내자로 축제를 이끌었다. “처음 이 축제를 만들 때 헌책방 주인 한 분 한 분을 만나 청해 들은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드렸어요. 그 마음이 그분들에게도 닿았는지 기꺼이 축제에 함께해 주셨죠. 언노운 북 페스티벌은 책방 문화를 오랫동안 지켜 온 주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축제를 찾은 사람들은 헌책방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낯선 헌책방의 매력을 알아 가고, 곽은비 작가를 따라 마을을 탐방하며 배다리의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배다리를 경험한 이들은 이제 이곳을 ‘엉뚱하고 재미있는 일을 벌이는 동네’로 기억한다. 패치워크의 활동을 통해 원도심의 내일을 그려 본다. 지역의 유산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이들의 애틋한 마음이 있어 배다리의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곽은비 작가가 알려 주는 배다리 관람 포인트

조흥상회 배다리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에요. 한때는 배다리 안내소와 책방 나비날다가 자리했지만, 현재는 국가유산 등록을 앞두고 국가유산청이 내부 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라 비어 있어요.

배다리 헌책방 거리 초입의 대창서림을 시작으로 집현전, 아벨서점, 한미서점, 삼성서림까지 헌책방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책값이 궁금하다면 밑면에 적힌 가격을 살짝 확인해 보세요.

배다리 여인숙 골목 빨래터 카페 옆 작은 미술관 2층에 오르면 평소 보기 힘든 상량문이 있어요. 그곳엔 건물을 지은 연도가 적혀 있죠.

스페이스 빔 정해진 동선은 없어요. 미로 같은 공간을 탐험하다 보면 과거 양조장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답니다. 가끔 재미난 행사도 열리니 미리 일정을 확인해 보고 가면 더 알찬 투어가 될 거예요.

문화상점 동성한의원 고양이를 좋아한다면 이곳을 지나칠 수 없을 거예요. 책방 주인 대신 반달이가 손님을 반기는 무인 공간이랍니다. 한쪽 벽면이 고양이 관련 책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요.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이자 인천 3·1운동 발상지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에요. 외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시멘트로 덮은 흔적이 보이는데, 6·25전쟁 당시 생긴 탄흔을 메운 자리랍니다.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선교를 목적으로 신식 교육을 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에요. 근대건축물 대부분은 내부 출입 금지지만, 이곳은 지금도 학생들의 예체능실로 사용하고 있어요.

인천 구 여선교사 합숙소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의 건물로 과거 여선교사의 합숙소였어요. 용자살과 교살을 혼용한 창호도 이색적이에요. 1993년에 국가유산으로 지정됐죠.

패치워크 1층 동양가배관에선 배다리 헌책방에서 영감을 받은 원두 ‘고서’를 맛볼 수 있어요. 오래된 종이에서 풍기는 향이 짙게 올라오죠. 배다리의 매력을 담은 굿즈를 소장하고 싶다면 2층 패치워크 스테이션에 들러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