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를 품은 장소에 가면 왠지 예의와 형식을 갖춰야 할 것만 같다. 김서울 작가는 가벼운 발걸음과 편안한 마음으로 궁궐을 걸어 보길 제안한다.

궁궐을 안내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고 가정하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를 신뢰하는 우리는 귀를 쫑긋 세우기 마련이다. 중간에 질문이라도 받으면 시험 범위를 숙지하지 못한 학생처럼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김서울 작가는 우선 눈으로 보라고 말한다. 궁궐을 탐색하는 건 정보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시선으로 좇는 일. 쉽게 말해 공부 대신 산책을 하라는 뜻이다.


창덕궁에는 돌이 많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의 저자 김서울 작가는 <유물즈>를 출간하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기존의 유물 관련 서적과는 접근 방식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유물의 탄생과 기원은 상관없다는 듯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이 가득했다. 국가유산인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보니, 어릴 적 학습지 과제를 끝냈지 못했을 때 엄마가 자신을 부르는 모습과 닮아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는 둥 유머러스한 내용이 빼곡했다. 이후 궁궐에 대해서도 책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사실 궁궐은 그에게 풀지 못한 숙제 같았다. 전통 회화를 전공하고 보존 처리 일을 하며 유물과 친해졌지만, 궁궐은 자주 찾는 장소가 아니라 낯설었다. 심사숙고 끝에 우선 사계절 동안 서울의 5대 궁,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을 돌아보기로 다짐했다. 익숙한 유물을 바라보듯 천천히 훑었다. 조금씩 궁궐에 빠져들었고, 매력 포인트를 샅샅이 찾아냈다. 그렇게 김서울의 궁궐 탐방기를 담은 에세이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이 탄생했다. 그의 추천을 받아 서울의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창덕궁에는 궁 하면 흔히 떠올리는 요소가 많다. 정전과 내전을 포함해 건물이 많고, 시기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후원이 조성되어 ‘궁궐 입문자’에게 제격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이후 왕실 사람들과 관료들이 창덕궁으로 옮겨 살아 조선 시대의 생활 흔적도 남았다. 나라의 중요 행사를 치르던 인정전에 들어서기 전, 석수가 먼저 눈길을 끈다. 부정한 기운을 막고자 궁 곳곳에 설치한 돌 조각은 위압감을 주기 위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마모된 탓에 귀여운 돌 짐승에 가까워 보인다. 김서울 작가는 계단에 털썩 앉아 익숙하게 돌을 쓰다듬는다. “석조 유물은 이렇게 만져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다들 궁금한 포인트가 비슷했는지 이목구비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유독 매끈하죠.”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보기도 하고, 이빨은 얼마나 뾰족한지 확인하는 그의 모습이 흡사 동물을 살피는 수의사 같다.
인정전에 들어서니 처마 너머로 드러나는 선정전의 청기와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주로 집무실로 사용하던 선정전의 기와는 화약과 탄약 제작에 쓰던 비싼 염초로 만들었다. “염초를 활용하면 건물의 위엄이 높아지지만, 그 비용을 아껴 국방력에 보태는 방법도 있으니 청기와를 올릴지 말지가 첨예한 주제였어요.” 유약을 입혀 구운 기와는 햇볕이 강할 때, 구름이 지나갈 때, 비가 올 때 등 날씨에 따라 빛깔이 변해 궁궐에 방문할 때마다 다른 인상을 준다. 치열한 논쟁 끝에 올린 청기와는 김서울 작가가 창덕궁을 자주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주거 건물인 낙선재는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없다. 이를 두고 김서울 작가는 “자극적인 함흥냉면 사이 슴슴한 평양냉면”이라 일컫는다. 대신 화려한 무늬를 강조했고, 색이 적어 디테일이 돋보인다. 돌담에 새긴 문양도 신기한 벽지를 보듯 찬찬히 살피게 된다. 김서울 작가의 발길을 좇으니 유독 돌 앞에 자주 선다. 유물을 재질별로 분류하는 보존 처리 일을 했던 그에게 돌은 여전히 친근한 대상이다. 동행하는 이에 따라 마주할 풍경이 바뀐다.

고즈넉한 산책 공간, 창경궁
사람도 건물도 많아 북적거리는 창덕궁과 달리 창경궁에 들어서자 차분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일제강점기에 내부 건물을 대부분 헐고 공원으로 바꾸어 적막하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뺏는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에서 한 차례 만났던 백송이다. 흰빛을 띠는 줄기가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일명 카무플라주 패턴이 반복되는데, 옆 나무도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있다. 나무껍질이 부분 부분 떨어져 여러 색의 퍼즐 조각을 모아 놓은 듯하다.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테다. 보려고 하면 보이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궁궐의 사계절을 모두 경험한 이는 언제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할까. 꽃이 활짝 피어나는 봄이나 단풍이 화려한 가을일 거라 확신했으나, 김서울 작가는 뜻밖에도 여름과 겨울이라고 답한다. 무더위와 추위 덕에 잡념이 사라지기 때문이란다.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고요한 궁궐 안에서 그는 복잡한 머릿속을 비운다.
하루 동안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니 역사적인 내용은 질문과 답변의 핵심이 아니었다. 전시장에서 나누는 관람 후기와 비슷했다. 형태와 무늬를 눈으로 보고, 자재의 촉감을 손으로 느끼고, 작은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이 동하는 순간을 자유롭게 주고받았다. 입구에 놓인 안내판은 중요하지 않았다. 궁궐을 방문할 때면 꼭 읽고 지나갔는데도 나중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궁궐을 공부할 대상으로만 여긴 게 아닐까. 공간을 주체적으로 감상하기보다 안내자의 설명과 해설을 따라가기 급급했던 거다. 무엇을 볼지 정해야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정교하게 설계한 건축물이자 예술 작품인 궁궐은 나의 미적 감각을 깨우고 취향을 파악할 최고의 장소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 특히 유용한 통로다.
김서울 작가가 추천하는 궁궐 방문 순서
볼거리가 다양한 곳을 먼저 들르는 게 좋아요. 그래야 비교적 심심한 궁궐에서도 흥미로운 요소를 찾아내기 수월하죠.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창덕궁을 맨 처음에, 조선의 첫 번째 궁궐이자 법궁인 경복궁을 두 번째로 가세요.
이후 내부에 미술관이 있는 덕수궁, 산책하기 좋은 창경궁, 궁의 흔적만 남은 경희궁을 차례대로 방문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