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과시하라, 책 읽는 나를

2025년 05월 02일

  • writer 박사(북 칼럼니스트)
  • ILLUSTRATOR 조성흠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넘나들며 책 읽는 나를 과시한다. 텍스트힙이 불러온, 책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다.

밤이 되면 스마트폰의 충전 정도를 가늠한 뒤 거치대에 끼워 넣는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컴퓨터를 놓고 유튜브 화면을 켠다. 책상 위를 굳이 치우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예쁜 색의 차관과 컵을 올려 둔다. 소파에 앉아 무릎 담요를 두르고, 오늘 읽을 책의 표지가 잘 보이는지 스마트폰 카메라 화면으로 다시 점검한다. 라이브 스트리밍 버튼 클릭. ‘박사묵독’이라는 이름으로 책 읽는 모습을 유튜브 라이브로 송출한 지 반년쯤 됐다. 낭독은 인상적인 구절이 있을 때 가끔 하고, 대부분 혼자 눈으로 읽다가 틈틈이 웃고 수다를 떤다. 어쩌다 고양이가 무릎 위로 올라오면 실시간 채팅 창의 속도가 빨라진다. 그렇다. 나는 ‘과시용 독서’ 중이다. 그것을 요즘 유행하는 ‘텍스트힙’이라는 단어로 슬쩍 가려 본다.
텍스트힙(text hip)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힙(hip)하다(멋있다)’를 합성한 신조어다. 텍스트힙은 이전의 독서와는 사뭇 다르다. 독서는 혼자서 조용히 하는 취미로 여겼지만 텍스트힙은 공유를 기본으로 한다. ‘책 읽는 멋진 나’를 전시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다. 그러니 텍스트힙을 ‘과시용으로 책을 읽는다’ 하여 비난할 수는 없다. 비난의 목적으로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책 읽는 사람들은 일제히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X(구 트위터)에서는 출판사 공식 계정을 중심으로 과시용 독서 유행이 번졌다. 과시용으로 책을 읽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싶은 벽돌 같은 두께의 책들과 표지가 멋진 책들이 타임라인 위로 넘실거렸다. 평소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책장에서 과시용 독서를 위한 책들을 꺼내 자랑했다. 이때다 싶게 벌어지는 리트윗 이벤트에 동참해 나도 표지가 멋진 책 한 권을 얻었다. 그렇게 책들이 흘러 다녔다.
뜻하지 않은 책의 흥행에 사람들은 나름의 분석을 내놓는다. 하나는 쇼트폼으로 대표되는,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콘텐츠에 대한 ‘디지털 피로감’이라는 것이다. 좀 더 긴 호흡의 콘텐츠에 대한 갈망이 책으로 향했다는 것. 맞는 말이겠으나 독서의 결과물이 쇼트폼과 SNS 콘텐츠로 재탄생하는 것을 보면, 디지털이 싫어서 아날로그를 찾는다기보다는 디지털 콘텐츠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책이 재발견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북스타그램(#bookstargram)이라는 태그가 사용되었는데, 올라오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왓츠인마이책장 태그를 누르면 빽빽하게 책이 꽂힌 책장 사진이 쏟아진다. #오운완(오늘의 운동 완료의 줄임말)만큼이나 핫한 것이 오독완이다. ‘오늘의 독서 완료’ 상황을 보고하는 데에도 열심이라는 뜻. 틱톡에서는 1분 내외의 짧은 독서 후기를 올리는 #북톡(#booktok)이 유행이다.

무슨 책을 읽을지 고르기 위해 쇼츠와 릴스, 틱톡을 찾아보는 이도 많아졌다. 유튜브에서는 ‘사일런트 북 리뷰(silent book review)’라는 독특한 영상이 유행한다. 말없이 극적인 표정과 행동만으로 책의 후기를 보여 준다. 텍스트힙을 추구하는 이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넘나들며 책을 소비한다.
아이돌, 모델 등 인플루언서의 영향으로 불이 붙었다는 분석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독서 클럽을 운영하는 미국의 모델이자 배우 카이아 거버가 인터뷰에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라고 한 말이 텍스트힙의 시초라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뉴진스 멤버 민지가 ‘버블검’ 뮤직비디오에서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를 읽는 장면을 보여 준 뒤 책 판매량이 여덟 배로 뛰었다든가, 걸 그룹 아이브 멤버 장원영이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코이케 류노스케의 <초역 부처의 말>을 권한 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BTS 멤버 RM, 아이유 등 연예인이 요즘 무엇을 읽는지에 대한 관심은 책 판매량으로 증명되었다. 파파라치 컷의 단골 배경인 공항 사진에서 사람들은 이제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을 먼저 찾는다.
그러나 인플루언서의 영향보다 더 단단하고 힘 있는 것은 독자들이 서로 책을 권하는 문화다. 책 읽는 개인이 큐레이터 역할을 맡아 서로가 읽을 책을 골라 준다. 유명인이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역주행하는 책에는 수많은 ‘입’이 있다. 혼자 책장을 덮고 끝내는 것이 아닌 과시용 독서의 장점인 셈이다.
책은 새로운 놀이의 중심이 되었다. SNS를 통해 과시하는 것은 책 표지만이 아니다. 도서전, 낭독회, 북 콘서트, 독립 서점, 북 카페, 책 읽는 바 등 책과 관련한 다양한 공간과 그곳의 풍경을 SNS에 올린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북 카페는 역사가 유구한 반면,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북맥은 비교적 최근의 풍조다. 책을 읽으며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고, 독립 서점의 이벤트에 참여하면서 책을 매개로 한 공동체를 만든다. 책을 중심으로 하는 소개팅도 생겼다.
기발하고 예쁜 독서 관련 아이템도 눈에 띈다. 엄지손가락에 끼워 책장이 넘어가지 않게 하는 독서 링, 책을 잡아 주는 문진, 북 커버, 북 파우치, 책 표지 장식용 스티커, 책 전용 가방, 책 조명 등 상상력이 넘친다. 인터넷 서점 MD들은 각종 굿즈를 만들며 이러한 분위기에 동조하고, 작은 서점들도 재미있는 아이템을 궁리해 낸다. 한강 작가가 운영했던 ‘책방 오늘’의 ‘비밀의 책 꾸러미’나 정현주 작가의 ‘서점 리스본’에서 판매하는 ‘생일 책 세트’도 인기다. 고전적인 독서가라면 하지 않을 위험한 선택을 과감하게 하는 것이 젊은 텍스트힙 세대의 특징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에 더해 텍스트힙 세대는 꼭 말을 해야겠나 보다. ‘독파민’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 ‘독서’와 ‘도파민’의 합성어인 독파민은 책을 읽을 때 우리가 갖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해 준다. 그 즐거움을 널리 함께 나누는 이들을 보니, 책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닌가 싶다. 좁은 책장 사이에 앉아 혼자 책을 읽던 시절의 나보다 지금의 텍스트힙 세대가 훨씬 즐거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