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한편 쓰러져 가는 한옥의 벽을 뜯어내자 겹겹이 쌓인 벽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사테의 강동수 대표와 플랑드르 줄리아는 사라져 가는 한국의 고벽지를 발굴·복원해 21세기적 미감으로 재탄생시킨다.

‘한옥은 원래 알록달록했다.’ 한 강연의 제목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동안 봐 온 한옥 카페와 한옥 스테이는 온통 하얀 한지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말이다. 궁금증을 품고 찾아간 강연장에서 고사테의 강동수 대표를 처음 만났다. 귀 뒤로 넘긴 머리와 가지런한 콧수염, 독특한 무늬의 물나염 셔츠에 결연해 보이는 눈빛까지, 강 대표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예술가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날 강연 주제는 한국의 고벽지였다.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강 대표는 자신이 한옥에서 발굴한 고벽지를 자유롭게 둘러보라고 했다. 마름모 격자무늬 사이로 푸른 꽃송이가 피어난 19세기 벽지부터 전투기 프로펠러와 오각 별을 그려 넣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벽지, 촘촘한 체크무늬가 특징인 1960년대 굽도리지까지. 가장자리가 찢기고 문양마저 희미해진 벽지는 마치 고대 유물 같았다. 그는 어떻게 고벽지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까.
되살아난 한국의 고벽지
강동수 대표는 본래 철거 위기에 놓인 한옥을 리모델링해 왔다. 한옥의 구조와 형태에 집중하던 그가 벽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4년 전, 19세기 고택의 사랑방을 철거하던 때였다. 현장 작업을 돕던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아내 플랑드르 줄리아가 벽에 붙은 신문지를 걷어 내자 푸른빛이 도는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뒷면에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황을 다룬 <아사히 신문>이 초배지로 붙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별생각 없이 버렸을 테지만, 유독 선명한 파란색과 처음 보는 독특한 무늬가 시선을 끌었다. 강렬한 호기심을 느낀 두 사람은 벽지를 살리기로 했다. 이후 현장을 다니며 벽지를 수집했고, 기록과 연구를 거쳐 복원을 이어 갔다. 이러한 활동이 한국 근대 벽지 복원 브랜드 고사테를 탄생시켰다.
고사테(Gosaté)는 골목을 뜻하는 순우리말 ‘고샅’에서 따왔다. 강동수 대표가 처음 재개발로 쓰러져 가는 한옥을 만난 장소이자 지금도 한옥을 보수하기 위해 자주 찾는 일터가 바로 골목이기 때문이다. 고사테의 모든 작업은 골목에서 시작된다. 강 대표가 현장 발굴과 아카이빙을 맡고, 플랑드르가 패턴 복원과 디자인을 담당한다. 지금까지 고사테가 복원한 패턴은 총 53개. 색깔을 달리한 버전까지 합치면 95개에 이른다. 연구를 거듭하며 패턴의 제작 시기와 시대별 경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수집한 벽지를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일곱 개 시대로 나눠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디지털 스캔한 원본 이미지와 패턴의 기원, 질감, 인쇄 기술 등을 분석한 글은 고사테 공식 홈페이지(gosate.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생활 유산을 오늘의 공간으로
고사테가 복원한 벽지에는 사람의 이름이 붙는다. 작은 원 안에 ‘기쁠 희(喜)’와 ‘복 복(福)’ 자가 번갈아 반복되는 1930년대 벽지는 ‘병수’, 은분(은가루)을 입힌 메달리온 안에 작은 꽃다발이 담긴 1940년대 벽지는 ‘은분’, 눈송이를 확대해 놓은 듯한 문양의 1960년대 벽지는 ‘금옥’, 대나무 숲이 떠오르는 1970년대 벽지는 ‘기철’이다. 옛 벽지의 패턴은 시대와 국가를 넘나들며 변형을 거듭해 왔기에 무엇이 원본이고 누가 처음 디자인했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고사테는 이름 모를 디자이너의 노고를 소중히 여겨 각 시대별로 널리 쓰인 이름을 복원한 패턴에 붙여 주었다. 병수, 은분, 금옥, 기철로 부르니 벽지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고사테는 복원한 벽지를 고택과 카페, 레스토랑 등에 시공한다. 옛 벽지의 패턴은 유지하되 공간의 특성과 분위기에 맞춰 색상과 크기를 조정한다. 아무리 큰 의미를 지녔더라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복원한 패턴을 타일과 패브릭 등 인테리어재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수십 년 전 누군가의 방을 채웠던 무늬가 10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 생활 곳곳에 다시 쓰인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강동수 대표는 열여덟 살 때부터 한옥 보수와 리모델링 일을 시작했다고요. 강동수 해외 자원봉사를 할 때 처음 유럽의 오래된 집을 수리했어요. 어린 시절 광주(현 전남광주) 동림동의 신축 아파트에서 살았던 저는 주변에서 오래된 건물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유럽에서는 수백 년 된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더라고요. 그때 문화 충격을 크게 받았어요. 광주로 돌아와 무작정 휴대폰을 들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오래된 건물을 찾아 사진을 찍었죠. 그때 수천 채의 한옥이 재개발로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했어요. 눈앞의 상황을 외면하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았죠. 지켜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현재 제가 운영하는 한옥 리모델링 업체 이름도 그때 생각했어요. ‘배를 짓는다’는 뜻의 순우리말 ‘배무이’가 번뜩 떠올랐죠. 한옥의 지붕 곡선이 승천하는 배 모양을 한 상여처럼 느껴졌거든요. 한옥을 일종의 생명체로 여기는 저는 만나는 모든 집을 되살릴 수는 없더라도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역사를 지닌 집인지 기억하고 싶었어요.
취미로 고벽지를 수집하다가 사업으로 발전시켰죠. 강동수 두 번의 계기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한 건축주의 제안이었어요. 충남 강경에서 골조 보수공사를 하던 중 벽지가 많이 나왔는데, 건축주에게 벽지에 담긴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더니 집에서 나온 벽지를 복원해 시공해 달라고 했어요. 제작 업체를 알아보면서 사업으로 발전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두 번째는 1945년에 지은 강화도 마니산방을 보수할 때였어요. 집에서 나온 벽지를 복원해 시공해 보자고 건축주에게 제안했더니 흔쾌히 허락했어요. 그 집에서 나온 벽지 다섯 종의 패턴을 복원해 시공했죠. 고사테가 처음으로 개발한 상품이자 실제 시공까지 이어진 첫 사례예요.
고사테가 광주를 거점으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강동수 일제강점기 광주는 신도시로 부유층이 자녀를 유학 보내던 곳이었어요. 게다가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오가는 만남의 장소였죠. 그 영향으로 광주에는 한식, 양식, 일식, 중식이 혼합된 가옥이 흔해요. 서양식 적벽돌과 일식 시멘트기와, 과거 청나라 기술자와의 교류를 통해 발전한 개량형 벽돌 굴뚝까지, 이 모든 건축 요소가 한 집에 뒤섞여 있죠. 벽지도 다양한 문화권의 상징이 혼합된 패턴이 많아요. 여러 문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건축 문화를 형성한 광주를 베이스캠프로 삼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여러 겹의 벽지가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나요? 강동수 방 전체를 종이로 도배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해요. 여기엔 한옥의 건축 방식과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온돌방 문화가 연관돼 있어요. 한옥은 나무로 골조를 세운 뒤 흙으로 미장해 벽을 만드는데, 시간이 흐르면 목재와 흙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균열이 생겨요. 이때 종이가 비틀림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해요. 종이의 섬유질이 벽을 짱짱하게 만들거든요. 한번 바른 종이를 떼어 내면 흙벽까지 함께 뜯겨 나가기 쉬워요. 그래서 벽지를 제거하는 대신 그 위에 새 벽지를 덧바른 거예요. 벽지를 여러 겹 바르면 흙벽의 내구성뿐 아니라 단열 성능도 좋아져 굳이 벽지를 뜯어 낼 필요도 없었고요.
고벽지의 패턴을 복원하거나 상품으로 만들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플랑드르 원본을 처음 봤을 때 느낀 인상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먼저 무늬가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어떤 단위로 반복되는지 살펴봐요. 패턴의 구조를 파악한 뒤 크기와 색을 조정하고 무늬를 다시 그리죠. 이때 손으로 그리는 과정이 중요해요. 원본에서 느껴지는 작은 흔들림을 그대로 남기기 위해서죠. 저희가 발견하는 벽지는 인쇄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아요. 무늬가 조금 어긋나거나 선과 색에 미세한 차이가 있죠. 그런 불규칙함도 벽지의 중요한 특징이에요. 모든 선과 색을 반듯하게 정리하면 원본에서 느낀 깊이와 표정이 사라질 수 있거든요. 오히려 그런 작은 차이가 마음을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옛 벽지가 오늘날에도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도록 변주를 주기도 해요. 색이 너무 강하면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무늬의 매력이 잘 드러나도록 색을 살리기도 하죠. 제작 공정에 맞춰 패턴 크기를 조절하기도 하고요.
10월에 출시한 신제품은 조금 특별하다고요. 플랑드르 벽지 원본을 최대한 충실히 재현한 ‘복원본’ 라인을 출시했어요. 종이의 질감과 두께, 규격과 인쇄 방식까지 옛 벽지의 특징을 살리려고 노력했죠. 평량은 60그램/제곱미터 정도로 A4용지보다 더 얇고, 한지처럼 장섬유가 섞인 질긴 미색 종이를 사용했어요. 당시 사용한 잉크 컬러를 조색해 평판인쇄로 찍었고요. 인쇄 과정에서 생기는 마진도 잘라 내지 않고 그대로 남겨 뒀어요.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종이의 규격인 장(sheet) 단위로 판매하는 것도 특징이에요. 예전에는 도배하고 남은 벽지로 지함을 만들거나 가구 표면에 바르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했어요. 이번 신제품 역시 선물 포장지나 아트지 등으로 활용할 수 있어요. 추후에는 옛 벽지의 감성은 유지하면서 평량을 160그램/제곱미터 정도로 높여 벽지 시공이 가능하도록 코팅한 제품도 제작하려고 해요.
고벽지를 발굴·복원하면서 생각의 변화가 있었나요? 강동수 벽지를 발굴하다 보면 건물의 무의식을 탐색하게 돼요. 도배를 하려면 초배지를 발라야 하는데, 물자가 귀했던 시절엔 일기장이나 찢긴 교과서, 붓글씨를 연습하던 한지 등을 대신 쓰기도 했어요.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게 된 거죠. 처음부터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건 아니기에 무의식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한 건축물로 여기던 한옥이 벽지를 탐구하게 된 후로 여러 사람의 삶과 기억이 쌓인 복합적인 존재로 다가왔어요. 플랑드르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어떻게 꾸미고 싶어 하는지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베이지나 회색을 활용해 차분하게 꾸민 공간이 많았다면, 요즘은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더 적극적으로 담아내려는 사람이 늘었거든요. 이런 변화를 보면 앞으로 벽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패턴 작업이 누군가의 공간을 장식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낀다면 더 기쁘고요.
오늘날 고벽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강동수 고벽지는 한국 문화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생활 유산이에요. 역동적인 한국 문화가 벽지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흥미로워요.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독립,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등을 거치며 사회가 크게 변했잖아요.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유행이 벽지에도 녹아들어 있어요. 벽지가 질리면 취향에 맞는 새 벽지로 바꾸는 일도 자연스러웠고요. 빠르게 소비하고 버린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패스트 문화와 닮은 면도 있죠. 고벽지를 들여다보면 당시 사람들의 취향과 미적 감각은 물론 경제 상황까지 읽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고벽지는 과거의 문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게 해 주는 문화 자산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