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요소를 덜어 내며 구축하는 이타미 준의 작업에서 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는 유이화의 작업이 시작된다. 풀을 더디 자라게 하는 줄 알았던 아버지의 그늘은 추위를 견디며 스스로 꽃을 피우는 법을 가르쳤다. 한때는 아버지의 중력을 벗어나 오롯이 하나의 별이 되고 싶었던 유이화. 아버지가 하늘의 별이 된 지금, 그는 하늘에 아버지의 별자리를 새기고 있다.

유이화의 건축에 대해 건축가이자 철학자인 장용순 홍익대학교 교수는 “이타미 준이 둔탁한 덩어리의 건축이라면, 유이화는 예리한 선의 건축을 구사한다”고 표현했다. 이타미 준은 정면을 대하면서 접근하는 방식을, 유이화는 벽과 길을 따라서 굽이치는 시퀀스를 통해 건물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2011년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는 유이화의 이름이 다시 건축계에 등장한 건 ‘아주 좋은 꿈터’가 2018년 iF 디자인 어워드 건축 부문 본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이후 유동룡미술관(2022), 한동대학교 기도실 ‘하늘소리’(2023), 칠곡 복합 문화 공간 시호재(2023), 한남동 커뮤니티 공간 페즈(2023)가 공개됐고, 평론가들은 유이화 건축가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반겼다. 유동룡미술관은 2023 한국건축가협회상과 2024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고, 시호재는 2024 한국건축가협회상과 2025 독일 디자인 어워드, 2025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실제로 최근 3~4년 사이 그가 발표한 작업은 어떤 틀을 깨고 나온 것처럼 이전 작업과 결이 다르다. 지금의 기량으로 아버지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 궁금해진다.

건축가 이타미 준의 딸,
유이화
이타미 준으로 알려진 건축가 유동룡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했다. 한국인 부모에게 태어나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해 온 그는 평생 귀화를 거부하고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이타미 준’은 당시 일본에서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려면 반드시 일본식 이름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만든 예명이다. 한국을 드나들 때 이용했던 ‘이타미 공항’과 친구 길옥윤의 일본 활동명 ‘요시다 준’에서 따왔다. 한국인 건축가로서 정체성을 지켜 온 그는 건축가로는 처음으로 2003년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 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슈발리에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일본 최고 권위의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 상,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김수근 건축상 등을 수상했다.
이타미 준은 한국의 제주도를 특별히 사랑했다.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방주교회, 두손미술관, 핀크스 골프 클럽하우스 등 작품에 버금가는 건축물을 제주도에 남겼다. 이타미 준을 모르더라도 제주에서 그가 남긴 건축물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건축가인지 알아차릴 것이다.
“건축은 지역의 고유한 문맥과 전통성 위에서만 현재의 리얼리티가 더해질 수 있다. 건축물은 무엇보다 주변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하던 건축가. 지역의 고유한 풍토에 천착해 돌, 바람, 흙 등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독창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한 이타미 준은 사후에 더 또렷하게 대중에게 각인되고 있다. 그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건축 철학을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딸 덕이다.


딸을 통해 새겨지는
이타미 준의 철학
일본에서 태어난 유이화 건축가는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덟 살 때 귀국해 외가에서 자랐다. 그리고 일본에서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말이 서툰 아버지의 통역사로서 현장을 따라다녔다. 성인이 된 후에는 건축가가 되는 걸 반대한 아버지를 피해 가출하듯 유학을 떠났다. 졸업 후 뉴욕 건축 사무소에서 일했고, 2001년 한국으로 돌아와 ITM건축사무소 한국지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열정을 배웠다면,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면서는 철학을 배웠다는 유이화 건축가. 최근 그는 아버지가 1973년부터 2005년 사이에 쓴 글을 엮어 <이타미 준 나의 건축>을 출간했다. 아버지를 더 알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건축가는 어떤 건축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읽힌다. 고독이 필요할 때 물처럼 스며들 아버지의 흔적을 또 하나 마련한 유이화 건축가를 만났다.

이타미 준에 대해 말할 때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평생 외로웠을 거라 여겼는데, <이타미 준 나의 건축>을 보니 고독할지언정 따뜻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많은 글과 메모의 내용이 궁금한데, 일본어가 서툴어 읽을 수가 없었어요. 한자가 80~90퍼센트를 차지하거든요. 그러다 출판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찾은 거죠. 20여 년 전에 출간한 <돌과 바람의 소리>를 번역해 주신 김난주 선생님께 연락드렸어요. 새로운 원고를 더해 다시 책을 출판하고 싶으니 추가 번역을 부탁드린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야 한다고 했어요. 20년 동안 자신도 성장했으니 성장한 번역가의 눈으로 아버지의 원고를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런 멋있는 태도에 감동받았고요.
‘건축 재단을 만들라, 건축상을 제정하라, 자료관을 세우라’는 아버지의 유언은 얼마나 지켜졌나요?
2018년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을 설립했고 2022년 말에 유동룡미술관을 개관했어요. 이타미 준을 박제하듯 우상화하기보다 동시대 작가 및 관객과 호흡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며 기념관이 아닌 미술관으로 등록했죠. 2024년에는 이타미준건축상을 제정하고 제1회 행사를 개최했어요. 만 45세 이하의 젊은 건축가를 대상으로 한 건축상에 김영배 건축가가 선정됐고, 유동룡미술관 파빌리온에서 전시했어요. 유언이라고 하니 무게가 실리지만 강제성은 없어요. 저도 재단 설립만큼은 피하고 싶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에 100여 점의 자료를 기증해 ‘이타미 준 아카이브’를 만들고 끝내려고 했죠. 그런데 아버지의 업적을 정리하고 철학을 전하는 일을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건축가 유이화가 건축가 이타미 준을 존경하는 마음이 훨씬 커졌고요.
건축 금수저의 삶에도 고충이 있군요.
예전에는 금수저라는 말이 정말 듣기 싫었어요. 나의 노력은 아랑곳 않고 아버지 잘 만나 건축가가 됐다는 말처럼 들려 굉장히 모욕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금수저 맞다고 말하고 다녀요. 정신적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으니까요. 아버지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였어요. 그런데 세계적인 건축가 중 부를 누린 이는 극히 드물어요. 공장처럼 사무소를 돌리지 않는 이상 부자가 될 수 없어요. 아버지는 검소한 분이셨어요. 어렸을 때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아버지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셨어요.
아버지는 소문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어요.
돈이 생기면 아버지는 땅이나 집을 사는 대신 고미술품이나 고가구, 이름 없는 화가의 민화를 수집하셨어요. 인사동에 가서 미술품을 구매하는 게 아버지에게는 큰 행복이었죠. 한국말이 서툰 아버지는 통역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어렸을 때부터 저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셨는데, 미술품을 구매하실 때도 함께였어요. 저에게 좋은 걸 보여 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곤욕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좋은 안목을 갖도록 이끌어 주신 것 같아요. 제가 설계 외에도 현대식 소반이나 사방탁자를 디자인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컬렉팅한 가구나 그릇을 사용하게 해 준 덕분이거든요. 조상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은 모셔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용하면서 좋은 점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수집한 접시에 안주를 담고, 막사발에 술을 나눠 마셨던 일상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안목을 높이고 취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셨군요. 아버지께 건축적으로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일까요?
건축과 삶을 대하는 태도죠. 아버지는 건축과 예술을 신성시하셨어요. 모든 일에 혼을 담았고, 건성으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또 건축가의 최고 파트너는 건축주가 되어야 한다면서 건축주의 이야기를 경청하셨어요. 미감과 관련해 이견이 있을 때는 충분히 시간을 두고 설득했고, 공간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는 건축주의 말을 최대한 반영했죠. 또한 아버지는 늘 긴장을 늦추지 않으셨어요. 나태한 순간이 없었죠. 항상 꼿꼿하게 앉아 바른 자세로 신문을 읽고 작업을 하셨어요. 그리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투자라면서 산책과 사색을 즐기셨어요. 창작물에는 창작자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드러나니 좋은 건축가가 되려면 아름답게 살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운동선수가 몸을 관리하듯 건축가도 아름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으니, 아름다운 사람들과 좋은 벗을 곁에 두고 좋은 책을 읽으며 좋은 것을 나누라는 의미예요. 아름다운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투자인 거죠.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나만의 건축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타미 준과 다른 유이화의 색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요즘은 아버지와 제가 산 시대가 다르니 다른 걸 보여 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요. 건축은 시대성을 담는 그릇이니까요. 사람들이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건축이란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저는 ‘호흡’이라고 답해요. 아버지의 건축에 ‘온기’가 있다면 제 건축에서는 ‘호흡’이 중요해요. 아무리 멋진 공간도 사용자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호흡이 맞지 않는 거예요. 좋은 건축이란 사용자와 호흡이 맞아야 하고, 주변 환경과도 잘 호흡해야 해요. 호흡이 맞지 않는 공간은 폭력이 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한남동 페즈는 굉장히 성공적인 케이스예요.
페즈 클라이언트는 건축을 의뢰하며 지역 커뮤니티 센터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한남동의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건물을 마주했을 때 ‘어!’ 하는 느낌표를 만들고 싶었어요. 전면을 보이드 구조로 비워 두고, 많은 이들이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공간을 구상했는데 생각대로 이뤄져 짜릿했어요. 페즈는 광고 회사예요. 문화 기획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매개체가 될 공간이 필요했기에 목적성이 분명했고, 사용자 마인드를 갖고 있어 대화도 잘 통했어요.
시호재처럼 좋은 건축물이 마을을 바꾸기도 해요.
건축주는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공간을 만들었어요. 마을의 폐교를 구입해 오랫동안 복합 문화 공간을 운영했는데, 부부가 수집한 미술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면서 자녀들이 찾아왔을 때 묵을 게스트 하우스를 지어 달라고 했어요. 대지는 산세에 둘러싸인 분지 같았는데, 팔공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흐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어요. 오래된 정원과 산자락이 보이도록 두 개의 건물로 담을 쳐 중앙을 비우고, 안으로 들어오면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끼도록 설계했어요. 시호재를 통해 건축이 콘텐츠가 되는 세상이 도래했음을 새삼 깨달았어요. 예전이라면 왜 이런 산속에 건물을 지었냐며 불만을 표했을 이들이 이제는 ‘아름다운 산세를 즐기기 위해 이곳에 터를 잡았구나’ 하고 동의해 주세요. 그만큼 대중의 안목이 높아졌으니 건축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제주도 하도리에 MJ 채플을 짓고 있어요. 바람이 많은 곳이라 바람을 디자인 요소로 삼았어요. 콘크리트 건축물은 바람을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에 건축물 주변에 갈대를 심을 생각이에요.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의 기도를 실은 배(건축물)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듯한 동적인 느낌을 주려고 천장도 배의 밑부분을 형상화해 완성했어요. 조경이 마무리되는 내년 봄 즈음 공개할 것 같아요. 그리고 한남동 페즈에서 12월 5일(예정)부터 ‘이타미 준에서 유이화까지’를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시간을 역순으로 배치해 저에게서 시작해 아버지로 이어지는 전시가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