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으로 불리던 옛 시절, 서구의 눈은 스리랑카를 이렇게 형용한다. 신비로운, 황홀한, 성스러움으로 가득한 보물섬. 그 피상적인 인상을 뒤로하고 진짜 스리랑카를 찾아 나섰다.



스리랑카 바다의 새 주인
웰리가마와 갈레
스리랑카 남부의 해변 도시, 웰리가마를 상징하는 장면의 주인공은 바다 위, 가냘픈 장대에 곡예사처럼 앉아 물고기를 낚는 스틸트 피셔맨(stilt fisherman)이었다. 지금 스리랑카에서 이런 풍경을 만났다면 십중팔구는 관광객에게 팁을 받고 연출한 장면이다. 어부가 사라진 바다는 서퍼들이 채우고 있다. 구글 맵에 웰리가마 비치를 찍고 달리다 보면 해변에 즐비한 서핑 스쿨이 시야에 들어온다. 출발 전 가이드에게 “나 오늘 서퍼 꼭 만나야 해. 무조건! 갔는데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지?” 하고 수선을 떨었던 것이 무색하게, 온갖 나라에서 모여든 서퍼들과 무수한 서프 숍이 해변과 바다를 점령하고 있었다. 가이드와 대화를 마친 후 서너 곳의 서핑 스쿨 직원들이 “보드도, 슈트도, 샤워장도 다 있어. 서핑 한번 하고 가”라는 말로 던지는 유혹을 겨우 뿌리치고 그가 추천해 준 웰리가마 서퍼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스리랑카 서핑 챔피언이 운영하는 카페엔 그 주인공이 떡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락시타 마두산(Lakshitha Madusan)이라는 본명 대신 ‘럭키’로 불리는 그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 살. 열한 살 때 삼촌을 따라 처음 서핑을 시작했고, 내셔널 서핑 대회에서 우승해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 그의 서가에서 발견한 <더 서퍼스 가이드>에 따르면 이 나라에 처음 ‘서핑 트립’을 온 사람은 미국의 서프 챔피언 러스티 밀러이며, 이는 무려 1964년에 일어난 일이다. 1973년 호주의 서퍼 데이브 피셔와 브루스 웰러가 히카두와에서 환상적인 파도에 반해 정착한 이후 스리랑카 남부 해안은 질 좋은 파도와 한적한 바다를 갈구하는 유럽과 호주 서퍼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부상했다. 로컬들의 서핑 시대는 1993년 히카두와 첫 서핑 대회가 개최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웰리가마, 히카두와, 카발라나 같은 해변을 중심으로 ‘스리랑카 서핑 신’이라고 부를 만한 문화가 생겨났다. 국내 서퍼들도 발리의 바글대는 해변, 비용과 거리가 부담스러운 하와이나 호주를 피해 웰리가마를 새로운 서핑 여행지로 주목하고 있다.
서핑이 취미가 아닌 이들은 돌고래를 찾아 나서는 배에 오르거나 아름다운 산호로 유명한 우나와투나 해변에서 해수욕과 다이빙을 즐길 수 있다. 바다에서 실컷 시간을 보낸 후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 도시, 갈레의 호화로운 리조트에 짐을 푼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식민지였던 흔적이 건축과 유적으로 고스란히 남은 갈레 포트(Galle Fort) 지구는 시간을 잊고 배회하기 좋은 동네다. ‘트로피컬 모더니즘’이라는 건축 사조의 대가 제프리 바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제트윙 라이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세련된 부티크와 레스토랑이 늘어선 페들러 스트리트를 산책하다가 동행에게 뜬금없이 다짐을 말했다. “다음엔 웰리가마에 한 달 정도 지낼 집을 얻을 거야. 그리고 주말마다 갈레에 놀러 와야지.”



스리랑카 대자연의 야성
얄라 국립공원
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생물 다양성이 높은 나라. 인간의 손길이 덜 닿은 스리랑카 대자연의 야성을 만나러 얄라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얄라 국립공원 입장 시각은 오전 6시부터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4시에는 출발해야 야생동물이 땡볕을 피해 죄다 숨어들기 전에 공원에 도달할 수 있다. 승합차에서 오프로드용 지프로 옮겨 타는 순간엔 야생 표범과 그 유명한 스리랑카코끼리를 곧 보게 되리라는 생각에 심장이 배꼽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소와 사슴과 야생 멧돼지, 그리고 당최 이름을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새들만 보다 보니 기대감이 조금 식은 게 사실이다. 물론 스리랑카는 (과장을 조금 섞자면) 코끼리가 길고양이만큼 빈번히 출현하는 나라이므로 나무보다 키가 큰 수컷 코끼리 한 마리를 멀찍이, 그리고 사파리 투어 지프들이 긴 줄을 이루든가 말든가 초연하게 제 갈 길 가던 아기 코끼리 한 마리를 가까이에서 만나긴 했다. “수십 마리가 무리를 이룬 채 드넓은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라는 문장을 내 경험으로 만들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한국에 돌아와 “거기 어땠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답했다. “정말 평화롭더라. 스리랑카에서 사파리는 명상이나 마찬가지더라고.” 그리고 며칠 전, 이 나라의 야생을 얕잡아 본 나의 교만을 깊이 후회했다.
2023년 12월 14일, BBC가 보도한 한 영상에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코끼리가 미식축구 선수의 기세로 지프에 돌진하는 장면, 창문을 가뿐히 깨고 그 굵고 긴 코를 쑤셔 넣어 차 안을 거칠게 헤집던 모습, 필사적으로 내쫓아도 다시 끈질기게 따라붙는 근성을 봤다. 이를 보도하던 앵커가 “습격을 받은 호주 출신의 카순 바스나야케가 기지를 발휘해 먹다 남은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을 창문 바깥으로 던진 덕에 현장을 빠져나왔으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말한 대목에선 등골이 서늘했다. 그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이 담긴 도시락은 보통 전날 머문 호텔에서 사파리 투어를 하러 새벽에 일찍 나서는 투숙객에게 제공하는 거고, 그게 나한테도 있었기 때문이다. 야생은 역시 야생이다.
얄라 국립공원 공식 홈페이지엔 이런 소개 글이 걸려 있다. “1900년에 야생동물 보호구역, 193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얄라에는 44종의 포유류와 215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표범, 코끼리, 나무늘보, 곰, 삼바, 자칼, 점박이여우, 공작새, 악어 등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스리랑카표범은 얄라 국립공원의 상징과도 같은 동물이다. 사파리 투어 중간쯤 하늘에서 현금 다발이라도 떨어진 양 사방에서 달려오는 차들 사이에 끼여 있었는데 필드 가이드가 “저 숲에서 누가 표범을 봤다더라”고 한 말을 들은 것도 표범과의 만남에 끼워 넣을 수 있을까? 크고 사나운 짐승과의 조우는 불발됐지만 나의 감흥을 자극한 건 예상 밖의 것들이다. 난생처음 맡아보는 이름 모를 짐승 냄새, 코끼리가 갓 싼 똥에서 피어오르는 뜨끈한 김, 새벽부터 부지런히 반신욕하는 물소와 나무 그늘 아래서 꾸벅꾸벅 조는 사슴의 게으른 자태. 야생의 지극히 사소한 일상 앞에서 심박은 조용했지만 마음은 호수처럼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