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화언어법 제정으로 수어는 한국의 공용어가 됐다. 2월 3일 한국수어의 날을 맞아 수어의 개념부터 농문화를 담은 창작물까지 살펴본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한국수어를 단순한 손짓과 몸짓으로 간주했다. 소통을 돕는 수단 정도로 여겨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을 혼자서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했다. 그러다 해외에서 시작된 수어 연구가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영향을 주었고, 2002년 충남 천안의 나사렛대학교와 경기도에 위치한 한경국립대학교 평택캠퍼스(구 한국재활복지대학)에 관련 학과가 개설되면서 한국수어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
2016년 2월 3일, 한국수어의 역사에서 ‘한국수화언어법 제정’이라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법은 ‘수화’ 대신 ‘수어’라는 용어를 공식화한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수화언어’를 뜻하는 표현을 사용해 수어가 고유한 어휘와 문법 체계를 지닌 독립적 언어임을 인정한 것이다. 수어가 법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농인 사회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수어를 향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고, 농인 언어권 보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을 뿐 아니라 수어 통역 서비스 같은 실질적인 시스템이 도입됐다. 자연스레 수어의 위상 또한 높아졌다.
법 제정 이후 한국수어 사전을 개편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기존 수어 사전은 한국어 단어에 적합한 수어 표현을 일대일 대응하는 방식을 택해 한국수어의 고유한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국립국어원은 2015년부터 한국수어 말뭉치를 구축해 왔고, 이를 기반으로 새롭게 제작한 사전을 올해 한국수어의 날에 공개한다. 한국수어 말뭉치란 농인이 실제 사용하는 수어를 수집해 전산화한 대규모 자료를 가리킨다. 개편한 사전은 수어 단어의 본래 의미와 문맥을 체계적으로 담았기 때문에 농인과 청인 모두의 이해를 돕는다. 수어 사전을 활용해 농인은 자신의 언어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청인은 농인 시각에서 수어를 바라볼 수 있다.
수어에 한 걸음 다가갔다면 다음 목적지는 수어 문학이다. 이미 존재하는 한국 문학을 수어로 번역한 형태라 생각하기 쉽지만, 수어 문학은 농인 문화를 바탕으로 처음부터 수어로 창작한 작품이다. 수어 문학이 탄생하기 전에는 농인 문화와 청인 문화의 혼합물인 수화 노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수화 노래는 가사를 수어로 번역한 것에 불과해 시각적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농인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고 생생한 이야기가 부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화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2015년 수어 문학을 널리 알리는 단체, 수어민들레가 출범했다. 2018년에 중국 수어 문학 예술가 장펑을, 2019년에 이탈리아 수어 문학 예술가 주세페 주란나를 초청해 워크숍과 공연을 열었고, 지난해 8월에는 미국의 수어 문학 예술가 이안 산본과 함께 한국 농인들에게 수어 문학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농인과 청인이 문학을 매개로 소통하는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수어 시를 같이 공부하고 각자 개성을 살린 작품을 만들어 그 결과물을 전시했다. 전시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 가능해 수어 시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했다.
수어 시는 수어 문학 중 농인의 삶과 심상이 가장 정교하게 드러나는 장르다. 수어민들레의 대표작 손청의 ‘희망꽃’은 청인 엄마가 농인 아이를 낳으면서 겪는 내적 갈등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농인의 시각으로 담았다. 아이를 꽃에 비유해 희망의 상징이라 표현한 이 작품은 수어의 감각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깊이를 극대화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 다른 작품인 이미선의 ‘육상대회’는 한국·중국·일본 선수가 관객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를 펼치는 장면을 생동감 넘치게 풀어냈다. 이처럼 수어 문학은 수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강렬함을 지닌 예술 언어임을 일깨운다.
수어 문학이 뿌리내리려면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농인 창작자를 지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중에게 수어 문학을 알릴 플랫폼을 마련해야 농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동적 주체자로 설 수 있다. 수어 문학의 확장은 예술 장르의 폭을 키우고 더 나아가 농인의 삶을 이해하는 통로를 넓히는 작업이다.
수어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는 민들레처럼 농인의 삶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꽃을 피우며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 왔다. 수어가 바람을 타고 더 널리 퍼져 모두의 언어로 환영받길, 언젠가는 수어 문학이 한국 문학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