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변화를 맞이한 신세계
올해 가장 많이 언론의 관심을 받은 그룹 중 한 곳이 바로 자산 기준 재계 10위 신세계그룹이다. 이마트와 백화점의 계열 분리를 공식화하면서 정유경 신세계 총괄 사장이 회장으로 승진했다. 정용진·정유경 회장의 ‘한 지붕 두 회장’ 시대가 시작됐다. 재벌을 다루는 드라마에서처럼 ‘경영 능력 평가’가 시작된 셈이기도 하다.
예정된 수순이라고는 하지만, 본업 경쟁력 강화까지 다목적 포석이 깔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예상대로 향후 온전한 계열 분리까지 가게 된다면 신세계 그룹이 아들(정용진)과 딸(정유경)에게 각각 나뉘는 큰 변화가 올해 시작된 셈이다. 신세계그룹이 최근 단행한 ‘2025년도 정기 인사’의 핵심은 정유경 신세계 총괄 사장의 회장 승진이다. 2015년 총괄 사장 승진 후 9년 만이다. 후계 승계 구도가 치열해질 수있다는 평이 나온다. 그동안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주목을 받았다면, 정유경 (주)신세계 회장이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신세계그룹은 2011년부터 이마트를 신세계에서 인적 분할해 별도 법인을 설립하면서 남매의 사업 영역을 구분해왔다. 다만 이번에는 계열 분리를 하면서 각자의 책임 경영을 강화시켰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이마트를 필두로 신세계프라퍼티(스타필드), 이마트24, 조선호텔앤리조트, SCK컴퍼니(스타벅스),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 신세계L&B, SSG닷컴, G마켓 등 대형마트·편의점·식음료 등을 맡게 됐고, 정유경 (주)신세계 회장은 백화점과 신세계디에프(면세점), 신세계인터내셔날(패션·뷰티), 신세계센트럴시티, 신세계까사 등 백화점·면세점·패션·뷰티 등을 주요 사업으로 맡게 됐다.
# 오빠 정용진 앞에 놓인 과제는
이 중 골치가 더 아픈 쪽은 정용진 회장이 이끄는 사업군이다. 이마트는 다행히 올해 실적이 개선된 흐름이다. 올해 3분기 이마트 매출액은 7조 7,848억원, 영업이익 컨센서스(전망치 평균)는 1,157조원으로 예상된다.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전년 동기 대비 2~3% 오르고, 영업이익은 흑자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정용진 회장이 좋아하는 ‘야구 관람’도 줄여가면서 경영에 집중한 덕분이라는 평이다.
이마트는 올해 4월에 천안 펜타포트점, 5월에는 상봉점 영업을 종료했다. 지난해 성수점, 광명점, 이수점까지 합치면 2년 내 5개 점포를 철수한 것으로, 지난 3월에는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도 단행했다. 노후화된 조직에 칼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과제가 산적해 있다. 특히 편의점인 이마트24와 이커머스의 실적 개선이 우선 과제로 꼽힌다. 갈수록 온라인을 통한 판매 시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이커머스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마트24의 지난해 매출은 2조2,251억원으로 전년 대비 5.1% 증가했지만, 영업 손실 230억원으로 적자다. 2014년 이마트24가 출범한 이후 2022년을 제외하고 줄곧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경쟁사인 GS25와 CU가 승승장구하는 것과 대비된다.
이커머스 부문의 부진은 뼈아프다. SSG닷컴은 제대로 된 흑자를 낸 적이 없다. 지난 5년간 총 4,500억원이 넘는 손실을 기록해왔다. SSG닷컴은 출범 첫해 10억원가량의 영업 흑자를 냈지만, 이듬해 800억원대 영업 적자를 냈고, 2022년부터 1,000억원대 적자를 기록 중이다. 특히 온라인을 통해 쇼핑 트렌드가 본격화되는 흐름에서, 배송 경쟁을 벌이기 위해 물류센터 투자 등에 나서면서 손실 폭이 커졌다. 이를 보완하고자 인수한 G마켓도 신세계그룹에 인수된 이후 적자로 돌아섰다. 지난해부터 마케팅 비용을 대폭 삭감하는 등 비용을 700억원 줄였지만 올해 상반기 매출은 8,085억원으로, 전년 동기(8,483억원) 대비 4.7% 감소하며 오히려 매출 악화로 이어졌다.
# ‘온라인’ 없는 정유경도 과제 산적
백화점과 면세점, 뷰티까지, 총괄 사장 승진9년 만에 신세계 회장에 오른 정유경 회장 앞에 놓인 과제도 적지 않다. 핵심 사업인 백화점 부문을 비롯해 전반적인 사업이 ‘미래’가 어둡다. 당장의 실적은 있지만, 변화하는 시장에 대비해야 한다.
올 상반기 기준 신세계의 총매출액은 연결 기준 3조 2091억원으로 전년 동기(3조1,393억원)보다 2.2% 소폭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2,804억원으로 7.1% 하락했다.
주축 사업인 백화점 수익 악화가 크다. 백화점 매출은 신세계 매출의 40%가량을 차지하는데, 매출은 늘지만 영업이익은 역성장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2,773억원으로 지난해(2,945억원)보다 6% 줄었다. 신세계를 지탱하는 또 다른 사업인 면세점의 상황은 더 좋지 않다. 올 상반기 신세계면세점의 총매출액은 9,512억원, 영업이익은 377억원으로 작년 상반기와 비교해 각각 3%, 67% 감소했다. 구조적인 상황이 문제라는 평이 나온다. 두 사업 모두 ‘오프라인’ 매출이 주를 이루는데,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명품은 최근 온라인에서도 판매가 늘고 있고, 면세점은 업황 자체가 구조적 불황이라는 평이다. 면세점에서 주로 지갑을 여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 유커가 줄어들고, 소액만 구매하는 개별 관광객 이 증가하면서 고객 1인당 단가가 많이 줄었다. 실제로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지난 9월 국내 면세점 이용객은 전년 동기 대비 19% 증가했지만, 매출은 1조 1,940억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10% 줄었다.
그나마 희망은 ‘뷰티’ 사업이다. 정유경 회장은 최근 뷰티전략TF와 비주얼전략TF를 신설하고 비주얼전략TF를 이끄는 임원으로 백지원 상무보를 임명했다. 백 상무보는 1981년생으로 2025년도 신세계그룹 정기 인사에서 승진한 임원 중 유일한 1980년대생이다. 이 밖에도 정유경 회장은 직속으로 뷰티 편집숍 ‘시코르(CHICOR)’ 총괄 조직을 신설했다.
# ‘이명희처럼 되겠다’ 꿈 이룰 수 있을까
재계는 정용진 회장보다 덜 주목받았던 정유경 회장의 경영 능력을 주목하고 있다. 정유경 회장은 늘 “어머니가 롤 모델”이라고 강조해왔는데,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대학 전공을 미술로 선택했다. 조선호텔 상무보로 경영 수업을 시작한 20대 때부터 짙은 눈 화장과 빨간 립스틱을 선호하고, 치마 정장보다 바지 정장을 즐겨 입고 사자머리를 하는 등 이명희 총괄 회장을 많이 따라했다. 공식 석상이나 SNS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대신 전문 경영인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 경영 스타일도 닮았다는 평을 받는다.
한 재계 관계자는 “총괄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두 자녀(정용진, 정유경)에게 회장 직함을 준 것은 ‘사실상 마음대로 해봐라’라는 의미가 있다”며 “그동안 오프라인 시장이 견고하게 지켰던 명품 구매가 서서히 온라인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마트도 신세계도 모두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시기이고, 그런 상황에서 두 자녀 모두 제대로 된 시험대에 오른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