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위, 비상 걸린 삼성전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삼성그룹에서도 맏형 격이라는 삼성전자의 올해 분위기는 좋지 않다. 보신주의와 조직주의에 물들어 ‘혁신’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수익성’이 높지 않은 가전 분야부터 삼성전자의 핵심이자 미래인 반도체 모두 경쟁사에 밀리는 흐름이다. 삼성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 6조 6,000억원, 2분기 10조 4,000억원, 3분기 9조 1,000억원을 기록, 지난해보다는 개선된 흐름을 보였지만 반도체 부문의 부진이 뼈아프다.
삼성전자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패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줬고,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는 반도체 부문의 분기 영업이익은 4조원 선 밑으로 추락했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가 HBM 패권을 주도하며 분기 영업이익 7조원 시대를 연 것과 대비되는 성적표다.
삼성전자는 주요 분야 임원들을 대상으로 주6일 근무를 지시하는 등 비상 경영에 나섰다. 삼성전자가 느끼는 위기감이 드러났다는 평이 나온다. SK하이닉스와의 경쟁에서 뒤처진 상황에 비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반도체 분야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규모가 SK하이닉스의 2배”라며 “그런데 오히려 실적은 더 좋지 않은 상황에 비상이 걸린 것 아니겠냐”고 귀띔했다. 실제로 반도체만 생산하는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사업보고서 기준 직원 규모가 3만1,980명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부문만 남성 5만 3,372명, 여성 2만 671명으로 합치면 직원이 7만 4,043명이다.
하지만 SK하이닉스가 훨씬 더 효율적이다. 매출에서 영업이익이 차지하는 비율 역시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의 2~3배 이상 높다. 특히 인공 지능(AI)에 많이 활용되는 HBM 시장을 SK하이닉스 가 치고 나가면서 그만큼 삼성전자를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 사법 리스크 발목 잡힌 이재용이 문제?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 주역 중 한 명인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삼성전자의 위기를 2가지 이유로 분석했다. “이건희 선대회장 시절의 위기 극복 방법은 조직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을 중시했다”며 “이건희 선대회장이 쓰러진 후 삼성을 좌지우지한 것은 ‘기술자가 아닌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자연스레 주가도 흔들거린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소식과 함께 흘러내리던 주가는 계속 하락하고 있다. 10만 전자를 바라보던 주가는 5만 전자로 추락했다.
11월 27일 취임 2주년을 맞은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여전히 유효한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회장은 2015년 경영권 승계와 그룹 내 지배력 강화를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불법 개입한 혐의 등으로 2020년 9월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올해 1월 이 회장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이에 불복한 검찰이 항소했다. 이 회장 측은 항소심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합병에 문제가 없었던 만큼 1심의 무죄 판단이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전자가 재무·관리통 중심의 인사와 조직문화로 인해 기술자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며 “늘 기업은 위기라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데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이 부친인 이건희 선대회장만 못하다는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SK그룹은 SK하이닉스가 승승장구한 한 해였다. HBM 물량이 올해뿐 아니라 내년까지 대부분 완판됐다고 올해 초 이미 밝혔을 정도다. 2026년 양산을 예고했던HBM 6세대인 HBM4의 양산 시기를 2025년으로 1년 앞당긴 것이 주효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미국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와 손잡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HBM시장에서 업계 큰손이자 AI 반도체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실적을 견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올해 실적이 이를 보여준다. 지난 3분기 매출 17조 5,731억원, 영업이익 7조 300억원 등의 실적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93.9% 올랐고, 영업이익은 사상 최대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을 제친 것인데, 영업이익 면에서 만년 2등이 만년 1등을 제친 것은 처음이다. 이 같은 대약진은 고부가가치 메모리가 견인했다. HBM, eSSD(데이터 기억 장치) 등 AI에 활용되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판매가 증대됐다. 그 결과 D램과 낸드(저장장치용 메모리 반도체) 모두 평균 판매 단가가 전 분기 대비 10% 이상 상승했다.
내년도, 내후년도 전망이 좋다. 블룸버그 산하 연구 기관 서실리아 찬 블룸버그인텔리전스(BI) 애널리스트는 지난 11월 12일 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 생산 물량이 내년까지 완판돼 향후 12개월간 HBM 부문에서 우위를 점할 것”이라며 SK하이닉스의 HBM 부문 매출이 지난해 40억 달러(약 5조 6,000억원)에서 내년 250억 달러(약 35조원) 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영업이익도 올해 500% 이상 증가한 데 이어 내년에도 36%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을 정도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뚝심 투자’가 맺은 결과라는 평이 나온다. 최 회장은 인수 초기부터 SK하이닉스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고, HBM을 2013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후 수십조원을 투자하며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재계 2위, 실적 좋지만 웃을 수 없는 SK
# 노소영 관장과의 이혼소송이 관건
하지만 SK그룹은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혼소송 결과에 따라 최태원 회장의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 2심에서는 4조원에 달하는 최태원 회장의 재산 중 35%를 노소영 관장에게 ‘현금’으로 줘야 한다고 판단했는데, 이대로 대법원 판단이 확정되면 최태원 회장은 보유 주식 상당수를 처분해야 한다. 특히 현금으로 줘야하기 때문에 주식 처분 과정에서 발생하는 양도소득세까지 감안하면 최 회장의 재산 대부분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SK그룹 이미지 악화도 안고 가야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 SK그룹에 흘러 들어갔다는 내용도 이혼소송을 통해 알려졌고, 최 회장의 동거인 김희영 씨에게 지급된 수십억원 등이 알려지면서 기업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이 불가피하다. 한 재계 홍보팀 관계자는 “오너 리스크 중에서도 경영권을 둘러싼 부분이 가장 뼈아프고 예민한 데 SK는 사업 분야는 미래 산업에 맞춰 잘 배치돼 있지만 기업 오너 일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 신경이 쓰일 것”이라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