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한 역할만 맡아온 배우 송승헌이 ‘일탈’을 했다. 작품 속에서 파격 변신을 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시도가 재미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캐릭터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연기 폭이 넓어졌다”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과하지 않은 자신감과 여유가 묻어났다.
송승헌이 영화 <대폭격> 이후 6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영화 <히든페이스>는 실종된 약혼녀 ‘수연’(조여정 분)의 행방을 쫓던 ‘성진’(송승헌 분) 앞에 수연의 후배 ‘미주’(박지현 분)가 나타나고, 사라진 줄 알았던 수연이 혼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집 안 밀실에 갇힌 채 그들의 벗겨진 민낯을 지켜보며 벌어지는 밀실 스릴러다. 극 중 송승헌은 숨겨둔 욕망을 드러내는 지휘자 성진으로 분해 파격적인 열연을 펼친다.
<히든페이스>는 영화 <방자전> <인간중독>을 연출한 김대우 감독의 신작이기도 하다. <인간중독>에 출연하며 연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던 그는 10년 만에 다시 김대우 감독과 호흡을 맞춘 것이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영화 개봉까지 꽤 오랜 기간 기다려온 것으로 안다. 어떤 마음이었나?
영화에 따라 개봉 시기가 중요한 작품이 있지만 <히든페이스>는 사랑, 인간에 대한 욕망을 그린 작품이다. 이런 것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보편적인 정서라 개봉을 기다리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반 작업을 더 세밀하게 할 수 있어 기대가 됐다.
지휘자 역할이다. 연습은 어떻게 했나?
일대일 레슨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어렵더라. 사실 평소 클래식은 물론 대중가요조차 자주 듣는 편이 아니어선지 너무 어렵게 느껴지더라. 지휘라는 게, 지휘자가 손짓을 해야 음악이 시작되고,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음악이 느려지거나 빨라진다. 마치 승마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인간중독> 이후 10년 만에 조여정과 재회했다. 극 설정상 약혼자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다음엔 정상적인 관계로 만나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여정 씨는 아시다시피 연기를 너무 잘한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든든하게 리드해준다. 후배지만 본받고 싶은 배우다.
송승헌이라는 배우에 대해 김대우 감독이 말하길 <인간중독> 때는 멋있음을 놓지 못했다면, 지금은 달라졌다고 하더라.
나이를 먹다 보면 마음이 유해지지 않나. <인간중독> 이전에 나는 정의롭고 바른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 나에게 <인간중독>은 극 중 노출보다 불륜 연기를 한다는 게 도전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지 않나. 그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건 김대우 감독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님의 전작을 워낙 좋아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완성된 작품 역시 만족스러웠다. 그 이후 캐릭터를 선택하는 폭이 넓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중독>은 내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번 작품에서 베드신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현장 리허설 때 감독님과 조감독님이 시범을 보여주셨는데, 그걸 보는 게 어려웠지 연기에 대한 부담은 크지 않았다.(웃음) 사실 감독님과 조감독님 덕분에 웃으면서 촬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배우들이 감독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게 모든 콘티가 굉장히 디테일하고 정확하다. 노출이 있는 장면은 더 그렇다. 큐를 던져놓고 “알아서 해라”, “더 해봐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부담이 없다. 그런 점에서 신뢰가 간다.
베드신을 함께한 박지현 배우와 서로 대화를 나눴나?
따로 특별히 더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감독님이 원하는 연기만 하면 됐다. 모든 콘티가 디테일하게 짜여 있어 애초부터 작은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인간중독>의 임지연 씨나 <히든페이스>의 박지현 씨나 둘 다 나보다 더 대담하고 프로답다. 내색을 안 했지만 놀랐다. 긴장을 안 하는 모습을 보고 나보다 낫구나 싶더라.
전환점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불륜과 노출 연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정형화되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인간중독>이 시작이었다. 그동안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캐릭터만 했구나 싶더라. 성진이라는 캐릭터는 멋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연기하는 게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의외라고 하는 반응도 좋다. 이 작품을 통해 얻은 것이 바로 그거다. 새로운 시도 그 자체로 의미 있다.
“‘괜찮은 놈’ 딱 그정도의 사람”
1995년 의류 브랜드 스톰의 모델로 데뷔했으니 어느덧 데뷔 30주년이 된다.
시간이 빨라서 깜짝깜짝 놀란다. 20대 때 선배들이 내게 “좋을 때다” 하실 때마다 그 의미를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다. 나이가 들어 편안함과 여유가 생기긴 했다.
20대의 송송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둥글게 살아라”, “여유를 가져라”. 당시에는 못 즐기고 살았다. 20대 때 내게 ‘일’은 단지 ‘일’이었다. 연기라는 게 직장 생활처럼 느껴져 재미도 썩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30대 초반에 받은 팬레터가 직업관을 바꿔놓았다. “배우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직업이다. 그 직업에 대해 감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매 순간 진실되게 임하려고 노력했다.
‘로맨스의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줄곧 따라다녔다. 배우로서 한계를 느낀 적은 없나?
20~30대의 나라면 그런 고민을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이순재 선생님이 연세에 맞는 역할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물론 리처드 기어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멋진 로맨스를 하고 싶기도 하다.
멋지게 나이가 들어가는 건 무엇일까?
어렵다. 20대는 청춘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 더 중후하고 멋진 사람도 있지 않나. 내게도 그게 숙제다. 지금 당장은 “송승헌 어때?”라는 물음에 “괜찮은 놈이야” 정도의 말만 들어도 만족한다. 그렇게 살고 싶다.
여전히 탄탄한 몸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
운동을 좋아해 과하다 싶은 근육질 몸을 만드는 건 지금도 자신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감독님이 극 중 캐릭터가 자휘자인 만큼 근육질 몸이 안 어울린다고 해서 식단 관리를 했다. 샤프한데 멋진 몸을 만들라고 하시더라. 2~3주 견과류만 조금 먹고, 초콜릿을 간혹 먹는 정도로 식단 조절을 했다.
<히든페이스>는 욕망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인간 송승헌의 욕망은 무엇인가?
40대가 되면서부터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어느 날 문득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 오늘 하루 행복한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높다고 한다. 이제부터 사는 삶은 보너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해보진 못했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하고 싶다. 여전히 나는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린다.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도 첫사랑의 임팩트가 커서인 것 같다. 그때는 어렸고 순수하지 않았나. 적어도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근데 쉽지 않다.
데뷔 30주년을 앞두고 있다. 배우로서 책임감에 대해 듣고 싶다.
한국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한 시기에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부담도 되고 책임감도 느낀다. 한편으로는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게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물론 내가 가진 힘은 적지만 그럼에도 매사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