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는 한편, 상처만 주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와 잘 지내고,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을 유지하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유머를 키워 스스로를 즐겁게 하세요”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육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다가 이내 탈진해버리는 증상 ‘번아웃 증후군’(이하 ‘번아웃’). 더 이상 소진할 기력이 없어 일상에 지장을 안겨주는 형태로 증상이 악화된다. 주로 직장인에게서 발현된다고 알려졌으나, 취업 준비생, 주부, 노년층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번아웃 주의보’가 발령된 상황이다. 한국인의 80% 이상이 번아웃을 겪어봤다는 씁쓸한 통계 수치는 물론, 2022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국제질병분류체계에 기재해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위험한 증상임을 공표했다. 특정한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진 않았으나 증상을 방치하면 극심한 피로, 무력감, 좌절, 우울감, 불안감 등 기타 정신 질환으로 번질 수 있다.
직장인 3명 중 2명이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번아웃의 원인이 체력 고갈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신체와 정신이 연결돼 있다는 점에선 맞는 이야기지만, 진짜 번아웃은 마음이 지쳤을 때 찾아옵니다. 체력이 회복돼도 번아웃 증상은 계속되는 것이죠. ‘내가 이 일을 왜 하지?’, ‘지금 하는 일의 가치가 뭐였지?’라는 무기력함이 동반돼요. 성취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단지 돈벌이로 회사에 다니는 ‘조용한 퇴사자’도 번아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무기력함이 대표적인 증상인데, 무기력함과 게으름을 혼동하기 쉬운 거 같습니다.
무기력은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증상입니다. 번아웃에 동반되는 무기력은 어떤 일에 충분히 에너지를 쏟았고, 더 이상 쏟을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을 때를 말해요. 반면 게으름은 어떤 일을 시작조차 못 한 상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 가깝죠. 무기력만으로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 삶이 괴로워진다는 문제가 있죠. 무기력함을 느꼈다면 원인을 찾고, 이에 맞는 솔루션을 차근차근 실천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번아웃을 예방할 수 있을까요?
체력 관리를 통해 신체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겁니다. 보통 번아웃은 일을 하는 데 에너지를 전부 쏟았음에도 할 일이 많을 때 증상이 나타나요. 결국 하루하루 눈앞에 쌓인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지고, 삶의 의미라는 대의를 놓치게 되죠. 체력을 단련함으로써 스트레스 역치를 늘리고, 힘을 축적하면 쉽게 지쳐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내적으로는 잃어버리지 않을 삶의 가치와 목적 찾기가 있어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알아야 해요. 저도 번아웃에 시달렸던 적이 있어요. 환자의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곰곰이 떠올려봤어요.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 위로받기보다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마음을 파악한 뒤로는 매일 출근 시간보다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 숨 고르기를 해요. 오늘 만나는 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하죠.
몸과 마음 건강을 모두 지키는 게 핵심이군요.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망가져요. 반대로 마음이 망가지면 몸도 망가지죠. 사람을 만나고 운동을 하고 문화생활을 하면 뇌세포가 활성화돼요. 백해무익한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도 마음 건강에 도움이 되죠. 신체를 건강하게 만든 다음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어요. 세상의 현자라고 불리는 노인들이 말하길 배움의 기회, 운동의 기회를 거절하지 말라고 하시잖아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제때 치유하지 못한 상처가 트라우마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치유하지 못할 질병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지우개를 사용할 수 없어요. 이미 일어난 일을 지워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털어냄으로써 극복할 수 있어요. 일어난 일에 감정이 묻어나는 데 좋은 감정이 저장돼 있으면 추억이고, 반대로 나쁜 감정이 저장되면 트라우마로 남아요. 나쁜 감정이 일상을 지배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라고 부르죠. 기억 속에 담긴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일상이 흔들려도 걱정하지 마세요. 약물 치료, 심리 치료, 명상, 운동 등 감정을 다스리는 여러 방법으로 전두엽의 능력을 길러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치유할 수 있어요.
삶의 활력을 찾는 방법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세요. 알고 보면 살아가면서 내가 잘한 일이 많다는 걸 잊지 마세요. 자식을 키울 때 칭찬 잘하는 엄마가 최고라고 말해요. 아이들은 밥이 아니라 엄마의 감탄을 먹고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칭찬을 많이 들으면서 자란 아이는 무언가를 해냈을 때의 쾌감을 알고, 이를 원동력으로 도전을 거듭하면서 할 수 있는 게 많은 어른으로 성장하게 돼요. 성인이 된 이후에는 엄마 대신 셀프 칭찬을 해주는 게 인생에 활력을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어서 또 다른 팁이 있을까요?
그리고 일상에서 유머 감각을 키우면 좋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가 아닌, 나 자신을 웃기는 데 필요한 유머가 필요해요. 또 어느 누구에게도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칼날 같은 마음으로 주변을 찌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점점 멀어집니다. 인생에는 내 편이 필요해요. 삶에 온전한 지지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굉장히 커요. 하루하루 고달프기만 한 인생에서 “당신이 최고다”라는 말을 들으면 쓰러져 있고 싶다가도 일어나게 되는 게 사람입니다. 끝으로 일상에서 나만의 루틴을 지키는 것이 활력을 찾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매일 오전 6시 20분에 눈을 뜨고, 일과가 시작되기 1시간 30분 정도 먼저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글을 읽거나 써요. 하루 24시간 중에서 할애하는 1시간 30분이 저를 살게 해요. 스스로 인생의 재미를 만드는 겁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현대인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살아가면서 마음에 흔적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에 난 흔적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처가 된 흔적에 아파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죠. 당장은 왜 나만 힘들고 아픈가 비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스트레스받고, 타인에게 미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괜찮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마음이 다쳤다고 해서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주저앉을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아무런 고통과 슬픔이 없는 세상에선 행복할 수 없어요.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받은 상처에 아파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 털어내고 사세요.
한창수 교수는…
고려대학교에서 의학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 미국 듀크대학교 임상연구디자인 보건과학석사 과정을 거쳐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치매, 우울증, 기억력 장애, 스트레스 장애를 다룬다. KBS1 <명견만리 Q100> <생로병사의 비밀>,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등 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마음 건강에 대한 명강의로 이목을 끌었으며, 유튜브 채널 <한창수마음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 트라우마와 관련한 심리서 <무조건 당신 편>, 현대인의 질병인 우울증과 번아웃 심리서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을 집필하며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