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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안주, 멸치와 황태

고소하게, 알싸하게, 소박하게.

On December 1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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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생활이 유독 고달프던 시절에는 점심시간에 술 한잔을 곁들이곤 했다. 맥주 한 잔 또는 막걸리 한 잔과 함께 하는 점심은 더 달고 힘이 났다. 약간의 술기운을 빌려 나는 조금 더 말하고, 조금 더 웃을 수 있었고 덕분에 오전에 상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 오후의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와 뒷담화가 그땐 술을 부르는 최고의 안주였던 것 같다.

반주와 낮술이 주는 위안을 알게 됐을 무렵, 나는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어릴 적, 아빠의 밥상에 소주 한 병 놓이던 날들을 기억한다. 아빠는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면 가끔 혼자 밑반찬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는데, 평소 말이 없고 무뚝뚝한 아빠가 그때만큼은 가장 잘 웃고 다정해서 집안에 온기가 돌았다. 그 모습이 싫지 않아서인지 엄마는 아빠에게 핀잔을 주는 듯하다가도 냉장고 문을 열어 안줏거리를 찾아보곤 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며, 냉장고에서 멸치와 고추를 꺼내 고추장에 찍어 드셨다. “나는 이게 제일 맛있어” 하시면서. 멸치와 고추의 맛은 알지만 아빠의 잔에 채워지는 맑은 술의 맛은 모르기에 그 조합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빠, 근데 이건 맛있어요?” 아빠는 마셔보고 싶으면 마셔보라고 항상 장난을 쳤고, 소주 냄새를 맡아본 내가 고개를 저으면 웃어 보이셨다.

어른이 된 후, 나는 가끔 아빠의 거짓말을 확인한다. 갑자기 술이 당기는데 집에 안주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서 멸치를 꺼내 맛없게 먹는다.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 하면서. 만약 아빠와 집에서 술 한잔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냉장고에서 멸치 대신 황태를 꺼낼 거다. 북엇국용으로 항상 구비해두는 황태채는 나의 최애 안줏거리다. 멸치의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과 고추의 알싸한 맛을 좋아하는 아빠라면 분명히 좋아하실 거다. 저지방·고단백 자연식이니 몸에 주는 부담도 적다. 늦은 시간, 누군가의 잠을 방해할 만큼 만들기 번잡하지 않고, 누군가 만들어준다고 해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간편하고 착한 메뉴다.

먼저 황태채를 물에 조금 담갔다가 씻어낸 뒤 물기를 꼭 짠다. 그다음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15분 정도 돌리면 끝. 인기 맛집에서 파는 안주 못지않은 바삭하고 고소한 황태채구이가 완성된다. 어울리는 소스를 만드는 것도 쉽다. 마요네즈에 간장 조금 넣고, 청양고추를 넣으면 된다. 마요네즈에 고추냉이를 넣은 ‘고추냉이마요소스’에 찍어 먹어도 정말 맛있다. 그냥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으니 이쯤 되면 웬만한 소스는 다 어울리는 음식인 것 같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얼고 녹기를 스무 번 이상 반복해 말린다는 황태. 그 맛의 진가를 나는 이제야 발견한 것 같다.

술의 맛을 알 리 없는 어린 딸을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이던 아빠는 아실까? 딸은 이제 술의 맛도 알고, 멸치를 찾던 아빠 마음도 알 것 같고, 멸치보다 맛있는 안주도 안다는 걸. 이제 내 앞에는 아빠가 아니라 한입만 먹겠다면서 황태채구이를 다 먹어버리는 한 남자가 있다. 내 인생의 술친구와 또 맛있게 먹어야겠다, 황태채구이.

CREDIT INFO
에디터
김진이(프리랜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2022년 12월호
2022년 12월호
에디터
김진이(프리랜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