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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의 유산

On May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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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의 화려한 타이틀뿐만 아니라 그의 연기가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며 옛 영화를 틀었다.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에서 노승은 비구니 제자들에게 숙제를 내준다. 첫째 제자 ‘진성’(진영미 분)에게는 “달마 대사의 얼굴에 수염이 없는 이유”를 평생에 걸쳐 찾아보라고 한다. 카메라가 ‘달마도’를 비춘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수염이 있는데, 수염이 있느냐 없느냐도 아니고 아예 없다는 전제하에 이유를 알아내라니 불량 관객은 어리둥절하다.

노승이 둘째 제자 ‘순녀’(강수연 분)에게 내준 숙제는 더 기가 막힌다. 순녀는 어릴 때 아버지가 베트남전 트라우마를 씻는다며 출가한 탓에 부성을 그리며 외롭게 자랐다. 고등학생 때는 5·18민주화운동으로 연인을 잃고 술꾼이자 ‘역사 광인’이 된 남자 교사를 따라다니다가 오해를 사서 학교에서 학대당한다. 비구니가 돼서는 자살하려는 범죄자를 살려냈다가 그가 스토킹하는 바람에 역시나 지은 죄도 없이 절에서 쫓겨난다. 그를 쫓아내면서 노승이 내준 숙제는 이거다. “여기 남은 네 혼령과 세속을 떠도는 너의 몸 중 어느 것이 진짜 너인지 알아내라.” 순녀는 절을 나서자마자 스토커에게 낚여 강간을 당하고, ‘제자’는 얼렁뚱땅 그와 결혼한다. 그러다 남자가 죽자 순녀는 ‘내 한 몸 바쳐 저놈들 인간 만드는 게 나의 수행인가 보다’ 하면서 엇비슷하게 나이 먹은 밑바닥 남자들에게 헌신한다. 20세기 후반 한국 문예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제 몸 바쳐 남자를 각성시키는 창녀’ 서사에 거창한 종교적 의미까지 덧씌우려는 듯해 지금 보면 거북하다. 그런데 여기 강수연이 있다. 강수연은 이 영화에서 ‘달마도’의 수염 같은 존재다. 이 영화가 흔한 창녀 서사와 여성 학대 관음증을 그럴듯한 선문답과 오리엔탈리즘으로 포장한 공허한 작품인지, 곱씹을 만한 철학을 담은 걸작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강수연의 연기는 확실히 걸출하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이미 <씨받이>(1987)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강수연에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 ‘월드 스타’라는 타이틀에 쐐기를 박은 작품으로 당시 그의 삭발이 화제였다. 그때 강수연의 나이 23살. 그는 말간 얼굴로 노련한 연기를 하는 동시에 어떤 장면에서든 진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배우였다. 너무 일찍 거물이 되는 바람에 당대의 유행에서 비켜선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보면 즉각적으로 눈을 유혹하는 세련된 마스크를 가지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특유의 역동적인 이미지와 능청맞은 연기로, 부성이 그리워 아무 남자나 따라나서는 천진한 아이부터 얼핏 배운 불교 교리로 진리에 통달한 척하다가 노승에게 혼이 나는 천방지축 보살, 닥치는 대로 몸을 굴리면서 풍파에 닳아가는 탕아까지 제 옷처럼 소화해낸다. 그 인물을 살아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노승이 인정한 수행자는 진성이지만 영화를 이끄는 이는 순녀다. 속세를 떠나 수도하는 진성에게 슬며시 웃으며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어떻게 미망 속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할 때는 그의 기질과 운명에 걸맞은 방식이 따로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강수연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유튜브 <한국고전영화> 채널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위대한 배우 강수연은 56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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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이숙명(영화 칼럼니스트)
에디터
하은정
사진
각 영화 스틸컷
2022년 06월호
2022년 06월호
이숙명(영화 칼럼니스트)
에디터
하은정
사진
각 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