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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의 마지막 메시지

‘시대의 지성’ 이어령 문화부 전 장관이 별세했다. 고인은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을 남겼다.

On March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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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지난 2월 26일 숙환인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의 유족은 “오늘 낮 12시 20분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큰 통증 없이 돌아가셨다. 유언은 따로 남기지 않으셨다”고 밝혔다.

암 선고를 받고도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았던 고 이어령 전 장관은 끝까지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윤재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사무국장에 따르면 고인은 별세 전날인 2월 25일 오전까지 다음 주 일정을 확인하고 아이디어 회의를 열 정도로 아이디어가 넘쳤다.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쯤엔 미국에 있는 2명의 손주에게 영상통화로 손을 낮게 들어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고인의 장남인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30분 전까지 가족을 향해 활짝 웃으시고 손을 흔들었다. 허공을 아주 또렷하게 30분 정도 응시하셨는데 호기심에 가득 차서 죽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끝까지 관찰하시는 듯했다”고 영면의 순간을 묘사했다. 고인은 생전에 항상 강조했던 ‘메멘토 모리(‘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를 최후의 순간까지 실천했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린 고인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시인, 소설가, 기호학자로 활동했으며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문화정책의 초석을 다졌다.  

문학평론가·언론인·교수… ‘부캐의 원조’

이어령 전 장관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문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전반을 아우른 지성의 필력을 휘두르면서 이름을 알렸다. 고인은 1956년 <한국일보>에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비평문 ‘우상의 파괴’를 발표해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72년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논설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인은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했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국립국어원을 세워 언어 순화의 기준을 제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해 문화 영재 양성에 기여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열어 문화 기획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축하 무대가 끝나고 10초간 정적이 흐른 운동장에 흰 반소매 티셔츠와 검정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등장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다다른 꼬마는 멈춰 서더니 굴렁쇠를 어깨에 메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화려함 대신 소박함으로, 채움 대신 비움으로 마무리된 개회식은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2000년 1월 1일 태어난 즈믄둥이 출생을 전 세계로 중계한 것 또한 이어령 전 장관이다. 새천년위원장이었던 고인은 한국의 정보기술(IT)을 이용해 새천년이 되는 순간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난 아기를 생중계하며 생명이 자본임을 세계에 알렸다. 사상 최대의 불꽃놀이를 하거나 세상에서 제일 큰 에어돔을 만든 나라도 있었지만 새천년의 순간을 생명 탄생으로 맞이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었다. 후에 이어령 전 장관은 이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았다.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2000년 1월 1일 0.1초에 ‘으앙’ 하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생명이 자본임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것은 생명 가치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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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지성’이 남긴 말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요즘은 유행처럼 스펙이라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언제부터 인간이 전자제품이 된 거예요?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스펙을 쌓는 사람을 봤어요? 다 보이기 위한 거예요. 어느새 사람들이 왜 사느냐고 묻지도 않아요. 예전에는 ‘그냥 웃지요’라는 대답을 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묻는 사람도 없어요.” -2013년 <우먼센스> 인터뷰

“탄생 속에 죽음이 있고, 가장 찬란한 대낮 속에 죽음의 어둠이 있어요.” -2020년 JTBC 다큐멘터리 <헤어지기 전 몰래 하고 싶었던 말-이어령의 백년 서재에서>

“내 삶은 내 것이고, 외롭거나 고통스럽더라도 남이 내 삶의 모델이 될 수 없어요. 내 인생에서 멘토를 구하지 않은 것은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도 또 다른 삶을 산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에요. 집에 가면 똑같은 아빠고, 남편이고, 그 관계도 온전하지 않은데 어떻게 남의 삶에 어드바이스를 합니까?” -2018년 <우먼센스> 인터뷰

“죽음에는 생물학적 죽음, 사회적 죽음 등 여러 형태가 있지만 이 세상에 죽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모델을 한번 보여주고 싶어요. (중략) 내 생각이 문화유전자처럼 퍼져가는 것, 그것이 나의 바람이에요.” -2019년 ‘이상의 집’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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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영결식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아내 강인숙  여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아내 강인숙 여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아내 강인숙 여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이어령 전 장관의 장례는 본래 가족장이었으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위원장이 되는 문체부장으로 변경됐다.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원 설립, 도서관 발전 정책 기반 마련 등을 통해 문화정책의 기틀을 세운 고인을 기리고 예우하기 위함이다.

지난 3월 2일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이어령 전 장관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황희 문체부 장관은 “고인은 불모지였던 문화의 땅에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문화정책의 기틀을 세워 문화의 새 시대를 열어주셨다. 그 뜻과 유산을 가슴 깊이 새기고, 두레박과 부지깽이가 되어 이 전 장관의 숨결을 이어나가겠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영결식에는 유족과 문체부 전 장관들을 비롯해 문화예술계 인사 2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인과 60년 지기인 시인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한 시대의 새벽을 깨운 빛의 붓,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밝히소서. 고 이어령 선생님 영전에 올린다”며 헌시를 공개했다.

또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뇌공학과 교수는 페이스북에 “쉴 새 없이 생각과 지식을 쏟아내시던 이어령 선생님. 투병 생활을 하시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소중한 시간에, 제게 몇 차례 만남을 청해주셔서, 덕분에 저도 여러 성찰을 할 수 있었던 아주 각별한 경험이었다. 한 지식인의 마지막을 함께하면서, 저도 제 삶의 마지막을 떠올려보았다.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더없이 깊은 애도를 표한다”라고 애도했다.

고인은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메시지를 전했다. 영결식에서 공개된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에서 고인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돼라”는 당부를 남겼다. 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에 설치된 ‘공화벽화’에는 고인의 유족들이 직접 선정한 고인의 메시지가 추모 문구로 표출됐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산업화 대신 정보화 그리고 생명화

이 전 장관은 1990년대 초부터 정보화사회의 도래를 일찍 파악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표어를 제시했다. 정부가 정보를 쥐고 있으면 빅브라더가 되지만, 국민이 정보를 갖고 있으면 빅브라더를 감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표어다.

이 전 장관은 각종 디지털 기기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서재에 6대의 컴퓨터를 두고 자료 정리와 문서 작업을 했다.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88 서울올림픽 당시 극비로 선발한 성화 봉송 주자를 알리기 위해 워드프로세서로 보도 자료를 작성하면서 정보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글쓰기와 같은 작업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것을 생활화해 정보에 노출되는 사람을 늘려야 한다는 것. 그는 ‘아래아한글’을 개발한 이찬진에게 전화를 걸어 “누가 한글과컴퓨터라는 기업을 산다고 해도 절대 팔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 후 1997년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합심해 전 국민 정보화 캠페인을 벌이며 전국 학교에 컴퓨터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한국이 IT 강국, 인터넷 강국으로 급성장하는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고인은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문명 전환의 시기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장점을 융합한 ‘디지로그’란 신조어를 내놓으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통합을 역설했다. 단순히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화를 비즈니스와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어야 정보 문명이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전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정보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너와 나 사이, 통치자와 피지배자 사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등 벌어진 그 틈을 채우는 인터페이스 혁명이 필요하다. 그 틈을 ‘생명(生命)’이 지닌 가치가 메울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고인이 죽기 전 관심 가진 학문은 생명자본주의다.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저서를 통해 생명애, 장소애, 창조애라는 3가지 사랑을 키워드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산업·금융자본주의 모델의 대안을 탐색했다. 고인은 “생산이 아닌 살아 있는 번식을 모델로 한 경제, 생명과 사랑이 녹아 있는 경제, 돈이 자본이 되는 시대가 아니라 생명이 자본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예견하며 디지털 시대에 생명의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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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종교인’이 되다

이어령 전 장관에게 아픈 손가락은 아마도 장녀인 고 이민아 목사(1959∼2012)일 것이다. 고인과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영인문학관 관장) 사이의 1녀 2남 중 맏이로 태어난 이 목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수재였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이자 무명의 청년 작가였던 김한길(전 국회의원)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며 아들을 낳았던 이 목사는 김한길과 성격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5년만에 이혼했다. 그 뒤 검사, 변호사로 활동하다 미국인과 재혼해 두 명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

이 목사는 2007년 버클리 음대를 다니던 첫아들이 돌연사한 뒤, 2009년 종교에 귀의했다. 2011년 한 인터뷰에서 이 목사는 “지금도 내 아들이 죽은 원인을 모른다. 감기 걸린 것 같다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1년 동안 매일 울면서 신(神)을 원망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이후 미국,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하다 갑상선암과 망막분리증 등 중병을 앓은 끝에 2012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이 목사 역시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이 전 장관처럼 치료나 수술 없이 암을 받아들였다.

딸의 투병과 죽음으로 고인은 종교에 귀의한다. 딸이 투병 중 실명하게 되자 고인은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둬가지 않는다면 당신(하나님)을 위해 평생 봉사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7개월 만에 이 목사는 눈을 떴다. 이를 경험한 후 고인은 일흔의 나이로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 목사는 생전에 쓴 책 <땅끝의 아이들>(2011)에서 아버지 이어령 전 장관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냈다.

“자기 전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아버지가 글을 쓰고 있는 서재 문을 두드렸다. 오늘따라 특별히 예쁜 잠옷을 입었기에 아버지가 ‘굿나잇’ 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손을 흔들기만 했다. ‘오늘도 역시’ 하는 생각에 시무룩해져 돌아섰다.”

여러 직함을 갖고 늘 바쁘게 사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 고인은 2015년 에세이집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통해 뒤늦게 딸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고인은 “나는 어리석게도 좋은 피아노를 사주고 널 좋은 승용차에 태워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빠의 행복이자 능력이라고 믿었다”며 하나뿐인 딸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며 편지를 남겼다.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고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 하고 외쳐라. 머뭇거리고 서 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벌려 너를 안을 것이다.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 굿나잇 민아야, 잘 자라 민아야. 그리고 정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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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유는 끝나지 않았다

이어령 전 장관은 지난 2021년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은 문인으로서 생애 60여 년 동안 30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수술을 받은 후에도 글쓰기는 계속됐다. 항암 치료 대신 마지막 저작 시리즈인 <한국인 이야기> 집필에 몰두했다. 지난 2021년 10월 출간된 인터뷰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통해선 사랑, 용서, 종교, 과학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죽음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고인은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그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라며 죽음이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령 전 장관의 지적 사유는 계속된다. 2020년 2월 첫 출간된 <한국인 이야기>의 두 번째 책이 오는 4월 출간될 예정이다. 가제는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로 젓가락 속에 담긴 한국인의 밈(문화 유전자)을 탐구하는 책이다. 또 일제강점기에 보낸 유년 시절 이야기와 이세돌 9단과 대결한 인공지능(AI) 알파고 이야기, 천·지·인, 의·식·주를 다루는 책이 나와 모두 10권으로 완성된다. 출판사 파람북 정해종 대표는 “<한국인 이야기>는 ‘너 어디에서 왔니’에서 ‘너 어디로 가니’까지 이어지는 시리즈”라고 전했다.

대담과 강연으로 남긴 사유를 주제별로 풀어내는 대화록, 강연록 시리즈도 준비 중이다. 대화록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가 4월 출간되고 생명 자본 등을 주제별로 나눈 대화록 20권, 강연록 20권이 선보일 예정이다. 시집도 출간된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의 10주기에 맞춰 출간을 준비한 4부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가 3월에 나온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김현정 열림원 주간에게 전화로 “네가 간 길을 내가 간다/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는 서문을 불러줬다고 전해졌다. <이어령 마지막 수업>에서 고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 절대로 안 죽는다. 언제나 네가 필요할 때 네 곁에서 글 쓰고 말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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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연보 

 이어령 전 장관의 팔순  잔치(2013년). 고인과 강인숙  여사가 나란히 서있다.

이어령 전 장관의 팔순 잔치(2013년). 고인과 강인숙 여사가 나란히 서있다.

이어령 전 장관의 팔순 잔치(2013년). 고인과 강인숙 여사가 나란히 서있다.

1934 1월 15일 충난 아산시 출생
1956 서울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 비평문 발표
1960 서울대 국문과 석사
1960~1972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
1967~1989 이화여대 문리대학 교수
1972 월간 <문학사상>, 출판사 문학사상사 설립
1972~1986 월간 <문학사상> 주간
1981~1987 단국대 문학박사
1990~1991 초대 문화부 장관
1994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5~2001 이화여대 국문과 석좌교수
1999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2009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2009~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2011 이화여대 명예교수
2021 금관문화훈장 수훈
2022 2월 26일 별세

이 전 장관이 남긴 명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고인이 김지수 <조선비즈> 기자와 인터뷰에서 죽음과 삶, 예술과 과학 등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고인은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항상 좌우로 흔들린다.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딸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편지 형식으로 남겼다. 고인은 개정판에서 “네가 떠난 지 어언 십 년이 되어가는구나. 지금 너의 눈물 자국마다 꽃들이 피어나고 너의 울음소리마다 꽃을 노래하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민아야. 이제 눈치 볼 것 없이 엉엉 울어도 된다. 만나서 기쁜 울음인 거다. 민아야 오래 못 본 내 딸아. 이제 마음껏 울어도 좋다”고 적었다.

메멘토 모리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인 메멘토 모리는 고인의 좌우명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1910~1987)이 세상을 떠나기 전 신부들과 이야기를 나눈 24가지 주제를 고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답한 책이다.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사유도 담겨 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오랜 세월 무신론자로 살았던 이 교수가 일본 교토에서 머물던 2004년부터 세례를 받은 직후인 2007년까지의 일기와 강연, 인터뷰, 신문 기사 등을 모아 정리한 기록이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 무신론자가 영성의 개신교로 넘어가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 이 교수는 “제가 처음 쓴 내면의 이야기입니다. 저의 약점, 슬픔을 고백한 일종의 일기장”이라고 밝혔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지은
사진
서울문화사 DB, 청와대 인스타그램
2022년 04월호
2022년 04월호
에디터
김지은
사진
서울문화사 DB, 청와대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