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살아남는 유려한 방식
<한중록> 혜경궁 홍씨 편
좋은 글을 쓰려면 일단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하나?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던가? 좋은 글 하나 써보겠다고 내 인생 내가 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더구나 경험 면에서 이런 작가와 어떻게 견줄 수 있단 말인가? 영조의 며느리이자 정조의 어머니, 그리고 순조의 할머니. 게다가 사도세자의 부인이라니.
혜경궁 홍씨는 엄밀히 말하면 ‘작가’는 아니겠지만 전무후무한 <한중록> 같은 글을 쓴 이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한중록>은 일종의 회고록이다. 혜경궁 홍씨는 세 차례에 걸쳐 이 책을 써 내려갔는데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손자인 순조의 생모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가순궁의 부탁으로, 마지막으로는 친정의 무죄를 항변하며 써 내려간 글이었다.
출판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다 보니 여러 필사본으로 전해져 내려오다 다양한 이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글이 지닌 핵심적인 힘은 훼손되지 않았다. 당시의 절절함이 여전히 살아 있다.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라나 9살에 세자빈이 되어 궁에 들어온 혜경궁 홍씨는 위풍당당한 시아버지 영조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사도세자 사이에서 숨죽이는 나날을 보냈다. 병증이 심해지다 못해 급기야 밥 먹듯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이기도 했다. 애첩인 빙애도 때려죽인 사람이다. 사도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눈을 다치는 일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다 급기야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려 하는 데까지 이른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한다. 조선 최대의 비극이라 할 만한 ‘임오화변’이다. 신하들의 만류와 사도세자의 패닉으로 자신의 명이 실행되지 않자 영조는 뒤주를 갖고 오게 해 그곳에 사도세자를 가두고 8일에 걸쳐 굶겨 죽인다.
이 끔찍한 사건은 제대로 된 기록도 남지 않았다. 정조는 즉위 직전에 영조에게 상소해 “승정원에 있는 그날의 기록을 없애”달라 청했고, 영조 역시 이 사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제 이익에 따라 이 말 저 말을 붙이기 시작했고 진실은 가려졌다. 혜경궁 홍씨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한중록>은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됐다.
“어머니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시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므로 궁중의 옛일부터 국가의 제도, 다른 집의 족보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 질문하였을 경우 역력히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그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는 정조의 평은 이 책의 신빙성에 한몫을 더한다.
그래서일까? 수십 년이 지난 후의 글인데도 마치 그 자리에 있는 듯 생생하다. 그날 아침에 홀연 나타나 경춘전을 에워싸고 울던 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글이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험일까, 기술일까? <한중록>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그 모든 것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찌 됐든 글을 ‘써야’ 한다는 걸.
글 박사(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