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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런웨이에서 재연된 낭만 과거 스타일

우울한 시대에 낭만과 환상을 일깨워줄 패션 종착역은 또다시 과거다.

On October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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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봄과 여름을 마음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드디어 가을을 맞았다. 봄 꽃놀이의 미련도, 떠나지 못한 여름휴가의 아쉬움도 상쇄하고 남을 야심 찬 계획이 가득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대미문의 역대급 바이러스 창궐도 모자라 홍수와 산불과 태풍이 연이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각종 자연재해까지 더해지니 오히려 암울함만 깊어졌다.

현실이 고달플 때면 과거가 그리워지는 법. 일종의 회고 절정이라고 해야 할까? 설사 그 시절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을지라도 늘 아름답게 미화되는 과거의 추억으로부터 위로받고 치유받고 싶은 본능이 발동하는 것. 경기가 침체된 최근 몇 년 동안 복고 트렌드가 패션계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충격에 빠져 휘청거리고 있는 요즈음, 동시대의 디자이너들은 이번 시즌 역설적으로 찬란했던 패션 황금기에서 영감받은 룩으로 런웨이를 수놓으며 환상과 낭만이 가득했던 시대로 돌아가볼 것을 권했다. 과거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복식들을 눈 호강 삼아 우아하고 기품 있게 차려입고 집 밖을 나설 날을 고대하라고 말이다. 그 결과 다양한 시대의 패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레트로 룩이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위로하는 새로운 트렌드로 급부상했다.

디자이너들의 시선이 제일 먼저 머무른 시대는 단연 그 어느 때보다 호화롭고 풍요로운 19세기의 영국 빅토리아 시대! 잘록한 허리 라인과 풍만한 가슴 선을 표현하기 위에 몸에 꼭 끼는 코르셋을 갖춰 입고, 바닥에 끌리고도 남을 만큼 기다란 드레스 안에 크리놀린을 겹쳐 입어 스커트 라인을 잔뜩 부풀리거나 버슬로 힙 부분을 부풀려 극적인 곡선미를 강조하고 호화로운 자카드와 섬세한 레이스, 물결처럼 출렁이는 프릴과 러플, 과감한 리본 등으로 로맨틱한 매력을 극대화한 시절이었다.

2020 F/W 시즌, 구찌는 빅토리아 시대의 볼 가운을 복원한 듯 방대한 양의 패브릭을 아낌없이 사용한 풍성한 실루엣의 호사스러운 드레스로 트렌드의 정점에 섰다. 뒤를 이어 정교한 디테일과 티어드 디자인으로 로맨틱함의 정수를 보여준 안토니오 마라스, 압도적인 볼륨감의 풀 스커트로 고아한 매력을 담아낸 알렉산더 맥퀸 등은 시대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운 드레스의 향연으로 화답했다.

토리버치, 브록 컬렉션, 짐머만 같은 디자이너들은 풍부한 색감과 정교한 위빙 텍스처, 우아한 실루엣이 어우러진 플로럴 룩으로, J.W. 앤더슨과 카이슨, 셀린느 등은 동시대적인 필터링으로 모던하게 재해석된 빅토리안 무드의 룩으로 더욱 현실적인 빅토리안 룩을 제안하며 팬데믹에 빠진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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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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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을 겪은 1940년대 패션도 빼놓을 수 없다. 여성들은 긴박했던 전쟁의 긴장을 다채로운 의상을 통해 떨쳐내며 패션 황금기를 탄생시켰다. 전쟁 중 강인한 인상을 주기 위해 입기 시작한 각진 패드가 달린 팬츠 슈트, 허리를 꽉 조여 여성 특유의 관능적인 보디라인을 연출하는 아워글라스 실루엣의 원피스, 둥글고 볼륨 있는 어깨 라인의 피터팬 칼라 블라우스,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에 베일과 스카프, 챙이 넓은 해트나 베레 등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팔꿈치를 덮는 길이의 장갑으로 마무리한 우아하고 고혹적인 스타일이 유행했다.

이번 시즌 미우 미우, 에르뎀, 로다테 등 1940년대 패션을 재해석한 컬렉션을 무수하게 만나볼 수 있다. 미우 미우는 넓고 둥근 칼라의 맥시 드레스, 화려한 주얼 장식의 이브닝 가운 등에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구불구불한 웨이브 헤어로 1940년대 감성을 불어넣은 컬렉션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르뎀은 뾰족한 칼라와 퍼프 슬리브 디자인의 미디 원피스에 메탈릭한 글러브, 플랫폼 슈즈로 그 시절 여인의 모습을 재현했다. 로다테는 벨트로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도트 무늬의 새틴 드레스에 플라워 장식을 더한 베일과 레이스 장갑으로 완벽하게 치장한 벨라 하디드를 앞세워 당당하고 기품 넘치는 패션을 선보였다.

각진 어깨의 코트에 두건을 장식하거나 관능적인 드레스에 화려한 주얼리를 더하고 글러브로 우아하게 마무리한 마크 제이콥스, 둥글게 부풀린 어깨와 프릴 장식이 돋보이는 블라우스에 미디스커트로 고급스러운 레이디 라이크 룩을 연출한 펜디, 핑크 컬러로 여성스러움을 살린 셔츠 드레스에 플라워 프린트의 글러브를 매치한 지암바티스타 발리 등이 그 시대의 룩을 충실히 반영한 모범 답안이다.

그뿐만 아니라 구찌, 랑방, MSGM, 엘리 사브 등은 프릴과 리본, 퍼프 슬리브, 피터팬 칼라 등 1940년대에서 영감받은 디테일을 차용해 모던하게 재해석한 믹스매치 룩으로 시선을 끌었다. 특히 스캘럽 칼라 장식의 패턴 원피스에 체인벨트로 허리를 감싸고 앵클 스트랩 플랫폼 슈즈에 동전 지갑 모티프 클러치 백을 가볍게 쥔 셀린느의 룩은 올가을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언제쯤 마스크 없이 외출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고, 계속되는 경기 침체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사회에 더없이 고단하고 극단적으로 예민해진 요즘. 길어진 ‘집콕’으로 홈 웨어 외의 옷이나 패션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션은 언제나 환상과 낭만, 실험적 도전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창조적 수단으로 존재해왔다.

“패션은 구속이 아닌 현실 도피의 형태여야 한다”고 말한 알렉산더 맥퀸, “나는 옷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디자인한다”고 말한 랄프 로렌의 말처럼 패션이야말로 우울한 현실을 잠시 잊고, 황홀한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수단인 셈.

2020년 패션 디자이너들도 같은 마음으로 헛헛한 가슴을 채워주고 위안처를 제공하고 싶었을 테다. 비록 일상에선 풍선처럼 부풀린 볼륨 슬리브 블라우스 하나도 과분하게 느껴지겠지만,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황홀한 기분을 안겨주는 패션 판타지의 힘은 실로 대단하니까. 지금이야말로 주위의 이목에 아랑곳할 것 없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과거에 기대어 답답한 현실을 타파하고 우아하게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패션 테라피를 경험할 절호의 기회다.

CREDIT INFO
에디터
정소나
사진
쇼비트, 게티이미지뱅크
2020년 10월호
2020년 10월호
에디터
정소나
사진
쇼비트,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