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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진의 세계

마흔 살이 됐다. 달라진 건 없다. 올해 두 편의 영화를 찍을 거고, 드라마에도 출연할 거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공효진이다.

On January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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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진'이라는 석 자가 주는 힘이 있다. 왠지 믿음이 가는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그녀만의 색깔이 묻어난다. 작품 외적인 부분은 또 어떤가. 절친한 배우 공유의 막무가내 설득 때문에 가수 마이큐와 듀엣을 하기도 했고(마이큐는 공유의 절친이다), 얼떨결에 하정우의 국토대장정에 동행하기도했다. 그런데 툴툴거린다거나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여튼 이 여자, 의리 하나는 끝내준다. 영화 <도어락> 개봉을 앞둔 이번에도 그녀다운 행보를 보였다. 뜬금없이 홈쇼핑에 출연해 영화 티켓을 팔았고, 여자대학교를 찾아가 직접 확성기를 들었다. 한번 했다 하면 어설프게 하는 법이 없는 그녀다.

"홈쇼핑에 출연한 걸로 말이 많아요. '너무 웃겼다'는 사람도 있었고, '내 눈을 의심했다'는 사람도 계셨죠. 전적으로 제 아이디어였어요. 제주도에서 귤 농장을 하는 가수 루시드폴 씨가 홈쇼핑에서 귤을 파는 걸 봤어요. 재미있어 보여서 하겠다고 했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폭발적이라서 놀랐어요.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도 출연하려고 했는데, 회사의 반대로 못 했어요. 회사 대표님 말로는 매니저가 매력이 없대요.(웃음)"

적당한 위트와 유머는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런데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금세 반전됐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도어락>은 스릴러예요. 스릴러라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하는 예상 가능한 장치들이 있어요. 그런 뻔한 게 싫어서 안 하려고 했는데…. 기자님은 어떻게 봤어요? 저는 생각보다 더 무서웠어요. 친한 동료 배우 손예진 씨도 무서워서 잠을 설쳤다고 하더라고요. 이 정도면 절반은 성공한 것 같아요.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강심장인 분들만 보시라는 거예요. 아니면 누군가와 같이 가서 보시든지요."

<도어락>은 혼자 사는 여자 '경민(공효진 분)'의 원룸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시작되는 현실 공포를 담은 스릴러다. 열려 있는 도어락 덮개, 지문으로 뒤덮인 키패드, 현관 앞 담배꽁초까지. 게다가 경민의 원룸에서 낯선 사람의 침입 흔적과 함께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자신도 안전하지 않음을 직감한 경민이 직접 사건의 실체를 쫓게 되면서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충무로에선 기대되는 스릴러로 꼽히긴 했지만 공효진이 출연을 고민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무섭다는 이유로 잘 보지도 않는 스릴러라는 장르가 싫었고, 수동적인 여자 캐릭터의 매력을 찾아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혼자 사는 여자의 고군분투기'는 저를 흥분시키지 못했어요. 관심 없는 작품 중 하나였죠.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스릴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설정되는 뻔한 장치가 싫었어요. 이를테면 '거길 왜 들어가!' 하는 것들요. 지금 위험에 처해 있는데 폐가엔 왜 들어가죠? 납득이 안 되는 부분 때문에 제작진과 의견 충돌이 있을 텐데…. 그냥 하지 않는게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이번에도 연기하면서 감독님에게 의견을 많이 냈어요. '아니, 대체 거길 혼자 왜 들어가는 거예요?'라고 되묻곤 했죠. 돌아오는 답은 '스릴러니까!'였어요. 스릴러니까 어쩔 수 없이 넣어야 한대요. 오케이! 어쩔 수 없다 치자고요. 그러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게끔 해달라고 했어요. 이를테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들어간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도어락>을 거절하려 했던 다른 이유는 단순했다. 쉬고 싶었다. 지난해 1월,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와 <싱글라이더>를 끝으로 1년간의 안식년을 갖고자 했던 그녀에게 <도어락>은 어쩌면 지나가는 작품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지난 2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진 저를 발견했어요. 연기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더라고요.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고. 다음 작품이 전에 했던 작품 같고. 작품을 앞두고 긴장된다거나 두근거린다거나 설렌다거나 하는 감정이 없이 편안한 상태였죠. 캐릭터를 연구하면서도 '이번엔 그냥 대충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고, 늘 하던 대로 하려고 했고, 제작진과의 타협도 쉬웠어요. 이러다간 정말 큰코다치겠다 싶어서 재정비할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몇 번의 고민 끝에 카메라 앞에 섰던 결정적 이유는 이권 감독에 대한 믿음이었고, 의리였다. 의아했다. 이권 감독은 2012년 영화 <닥치고 꽃미남 밴드>로 데뷔한 신인 감독에 속하기 때문이다. 데뷔 20년차 공효진과의 접점이 없어보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감독님은 저의 데뷔작인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슬레이트를 담당했었어요. 영화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 배우와 연출부 막내로 인연을 맺어 지난 20년간 오빠 동생으로 지냈죠. 어느 날 시나리오를 툭 주더니 '안 할거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쭈뼛거리면서 선뜻 결정을 못 하자 공항에까지 따라오셨어요. 결정적으로 하겠다고 한 건 전적으로 이권 감독님과의 의리 때문이었어요. 저는 데뷔작에 대한 애착이 크거든요.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다 잘됐으면 좋겠고,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돕고 싶어요. <도어락>도 그 연장선의 하나였죠. 또 감독님이 전작인 <미씽 : 사라진 여자>의 이언희 감독님의 남편이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의리가 큰 역할을 했죠."

안식년엔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매니저에겐 아무 시나리오도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친구가 살고 있는 발리에서, 심장사상충에 감염된 시베리안 허스키를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작품을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연기하고 싶다.'

"<도어락> 출연을 미루고 미루다가 하겠다고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1년 동안 쉬었기 때문일 거예요. 다시 연기가 하고 싶더라고요. 대신 몇 가지 조건을 걸었죠. 캐릭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꿔줄 것, 엔딩을 다른 방향으로 그려줄 것. 다행히 감독님이 다 수용해주셨어요. <도어락> 촬영을 마치고 영화 <뺑반>이 쉴 틈 없이 진행되는데도 '오케이, 고' 했어요. 그리고 또 바로 다른 작품에 들어가요. <가장 보통의 연애>라는 가제의 영화인데 현실 로맨스예요. 지난 1년 동안 쉬었던 기억으로 당분간은 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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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연기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더라고요.
작품을 앞두고 긴장된다거나 두근거린다거나 설렌다거나 하는 감정이 없이 편안한 상태였죠.
이러다간 정말 큰코다치겠다 싶어서 재정비할 시간을 가졌어요.

공효진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좀 의외의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고맙습니다> <파스타> <최고의 사랑> <괜찮아, 사랑이야> <질투의 화신>처럼 드라마에선 '공블리' 그 자체였다면 영화 행보는 종잡을 수 없다. <577 프로젝트>처럼 577km를 하염없이 걷는 다큐멘터리를 찍는가 하면 <싱글라이더>처럼 분량이 적은 영화를 찍기도 한다. 심지어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선 배역 이름도 없다. '공블리'로 소비되는 드라마와는 달리 영화에서만큼은 특정 장르, 특정 캐릭터에 갇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동안 출연했던 드라마가 대부분 로맨틱 코미디였고, 또 그게 흥행을 했고, 사람들은 더욱 저를 '공블리'로 기억하죠. 그래서 영화만큼은 도전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용감한 캐릭터라면 분량을 따지지 않아요.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영화가 없는 이유도 그것이죠. <미씽: 사라진 여자> <싱글라이더> <고령화 가족> 그 위로 쭉 올라가보면 제가 원톱이 돼서 이끌었던 작품은 10년 전에 찍은 <미쓰 홍당무> 하나밖에 없어요. 그동안 했던 영화에서 로맨스는 <러브픽션> 하나죠. 그 외에는 다 장르물이었어요. 다양한 장르로 선보이고 싶다기보다 다른 걸 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냥 똑같은 걸 또 하고 싶지 않아요. 재미없잖아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다양한 시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공효진의 주특기가 로맨틱 코미디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점에 대해선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드라마를 하는 목적은 하나예요.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싶어서. 집에 계신 분 모두가 연령대에 상관없이 볼 수 있는 드라마에서 친숙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따뜻한 인물을 많이 맡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 나름대로 갈증은 있어요. 아직까지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하는 연애 이야기는 안 해본 것 같거든요.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로맨스가 그려지는 거였죠. 진한 사랑 이야기, 딥한 로맨스를 해보고 싶긴 해요."

공효진을 힘들게 했던, 괴롭게 했던 작품은 <미쓰 홍당무>였다. 그녀 말에 따르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연기했다. 작품을 이끌어가야 하는 역할인 데다 전무후무한 독특한 캐릭터도 스트레스였다.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집에 가면 긴장을 내려놔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죠. 각성이 안 풀어지더라고요. 어떤 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조렇게,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 하죠. 저는 그걸 표현해야 하고요. 기상천외한 역할을 하고 싶다가도, 그런 캐릭터를 만나면 막막하고 괴로워요. 이게 배우의 딜레마죠."

그녀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뭘까. 언뜻 보기엔 특별한 기준이 없어 보이지만 그녀만의 고집이 있다. 확고하다.

"웬만큼 괜찮다 해서는 잘 결정하지 않아요. 드라마도 영화도 아무것도 안 하니만 못한 작품이 있거든요. 연기를 하면서도 힘들고, 보는 사람도 힘든 건 배우에게 최악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떳떳하지 못한데 좋게 봐달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이젠 작품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작품을 결정할 땐 항상 영화를 다 찍고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내가 당당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요. 다행인 건 아직까지 최악의 순간은 없었다는 거예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이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공효진은 올해 마흔 살이 됐다. 그녀 스스로도 놀란 눈치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그녀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정작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고 한탄했다. 이럴다 할 대표작도 없는 것 같고, 남들은 다 하는 결혼도 아직이다. 뒤처지는 것 같아 속상하지만 어쩌겠나. 그 또한 공효진인 것을.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도 압박감이 있어요. 친구들과 모이면 어쩔 수 없이 나이 이야기를 하게 되죠. 1~2년 전쯤 한 공식 석상에서 만난 백지연 앵커가 제게 이것저것 물으시길래 답을 하다가 세상 다 산 것처럼 이야기했어요. 그런 제게 백지연 앵커는 '내 나이가 되면 지금 효진 씨 나이는 너무 애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저도 그때는 너무 늦었어, 한발 늦었어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너무 후회스러워요'라고 하더군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내가 왜 이 아까운 시간을 '늦었어'라고 한탄만 하면서 살고 있나 싶었죠. 내 스스로 내 시간, 내 나이를 폄하하는 게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다짐했다. 5년 후, 10년 후의 나에게 미안할 일을 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들만 만나면 '이미 너무 늦었어'라고 투덜거리게 된다. 그녀도 나이 앞에선 겁나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겁나요. 초조하죠. 우리 엄마조차 '결혼? 안 해도 되는데~'라고 말해요. 엄마가 저를 위로하려고 맘에 없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죠. 마흔이라는 숫자가 주는 압박감이 있어요. 작품 앞에서도 더 진지해지죠. 이제는 쌓여가는 필모그래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허투루 할 수가 없어요. 사실 배우 입장에서 적당한 책임감은 기분 좋아요. 제게 사활을 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힘이 나거든요. 뭔가 운명 공동체 같은 거라고 할까요."

스스로 나이에 압박을 느낀다고 하지만 목소리와 말투, 행동에선 여유가 느껴진다. 내공이다. 짜인 삶보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을 더 즐긴다는 그녀. 공효진이 사랑받는 이유다.

CREDIT INFO
에디터
이예지
사진제공
메가박스 플러스엠
2019년 01월호
2019년 01월호
에디터
이예지
사진제공
메가박스 플러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