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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⑩

도스토옙스키의 첫 결혼과 시베리아 탈출

On March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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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의 K다리에서 본 그리보예도프 운하(상트페테르부르크).

『죄와 벌』의 K다리에서 본 그리보예도프 운하(상트페테르부르크).

 

'신이 보내준 천사'라고 했던 첫 부인 마리야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와의 결혼 석 달 전인 1856년 11월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에서 마리야를 "나의 인생길에 신이 보내준 천사"라고 했다. 그만큼 마리야와의 결혼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마리야의 입장은 달랐다. 마리야가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독한 가난을 면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유형수 출신이긴 했으나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교사인 베르구노프보다는 조건과 배경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동안 마리야가 죽은 남편의 사후 보조금을 받도록 하기 위해 블랑겔 남작 등을 통해 노력했고, 아들을 사관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심지어 연적인 베르구노프를 좋은 자리로 보내주기 위해 힘쓰기까지 했으므로 돈도 배경도, 아무것도 없는 시베리아 출신 교사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무언가 더 능력이 있고 장래가 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리야는 베르구노프와의 관계를 쉽게 끝내지 못했다. 아버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글을 남긴 딸 류보피 도스토옙스카야는 마리야가 결혼 전날 밤까지 베르구노프를 만났다고 했다. 전기 작가들은 이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지만 마리야가 결혼 후에도 젊은 애인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고 있다. 결혼 후 2년도 더 지난 1859년 도스토옙스키 부부가 세미팔라친스크를 떠나 모스크바 인근 트베리로 갈 때 베르구노프가 마차를 타고 부부의 마차를 멀리서 뒤쫓아 갔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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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마을의 겨울 풍경.

시베리아 마을의 겨울 풍경.

 

신부를 놀라게 한 신랑의 간질 발작

결혼식은 1857년 2월 6일에 있었다. 그런데, 쿠즈네츠크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신혼여행을 마치고 세미팔라친스크로 돌아가는 길에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쿠즈네츠크와 세미팔라친스크의 중간쯤에 있는 바르나울에서였다. 마리야는 결혼 전까지는 도스토옙스키가 간질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신부는 신랑이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신음하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간질 환자와 결혼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해 3월 9일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바르나울에서 안면이 있는 어느 가정에 잠깐 묵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재앙을 만났습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간질 발작이 일어나 아내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것입니다. 우울증과 절망감이 엄습했습니다. 전에 나를 치료하던 의사들의 진단과는 달리, 이번 의사는 내가 진짜 간질 발작을 일으켰으며, 발작 중에 틀림없이 인후부의 경련으로 질식할 것이고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결혼 당시 나는 이런 증상은 생활 방식만 바뀌면 사라질 단순한 신경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를 확신시켰던 의사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진짜 간질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1』, 콘스탄틴 모츨스키, 김현택 옮김, 책세상, 2001)

도스토옙스키는 1858년, 4년간의 강제 군 복무 기간이 지났으므로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듬해인 1859년 봄, 그는 황제의 칙령에 의해 3월 18일 자로 제대하게 되었음을 형 미하일의 편지를 받고 알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로 가기를 희망했으나 이주지로 지정된 곳은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50km가량 떨어진 트베리였다. 트베리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잇는 철도가 지나는 소도시였다. 칙령이 세미팔라친스크에 도착한 것은 1859년 5월 초였다. 그는 마침내 7월 2일 마리야와 함께 세미팔라친스크를 떠났다. 가는 도중 페름과 카잔, 니즈니노브고로드의 교회와 수도원, 시장 등을 구경하면서 갔다. 옴스크의 학교에 가 있던 의붓아들 파벨은 후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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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상트페테르부르크). 우_ 끝을 뾰족하게 깎은 옴스크 요새의 나무 담장. 이 안에 유형수들의 수용소가 있었다.

좌_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상트페테르부르크). 우_ 끝을 뾰족하게 깎은 옴스크 요새의 나무 담장. 이 안에 유형수들의 수용소가 있었다.

 

그래도 운 좋았던 귀환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유럽러시아로 귀환한 것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일단 유형수가 되면 형기를 마친 후에도 시베리아를 떠날 수 없었다. 농민으로 신분이 바뀌어 유형지에 그대로 머물러 살도록 되어 있었다. 1856년, 유형에 처해진 지 30년 만에 내려진 황제의 특사로 겨우 유럽러시아로 귀환할 수 있었던 귀족 혁명가 집단인 데카브리스트(12월 혁명 당원)들이 한 예다. 그들은 1825년 12월 혁명의 실패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후 강제 노동 형기를 마치고 나서도 특사 때까지 시베리아를 떠날 수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후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사면령을 내리는 등 정치범들에게 다소 관대해진 분위기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를 떠나 트베리로 가는 도중에도 두 번이나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트베리에서 지낸 시간은 4개월가량이었다. 트베리에서 그는 다시 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을 간절히 요청하는 탄원서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는 의붓아들 파벨을 페테르부르크의 한 교육 시설에 수업료 면제로 입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탄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황제를 칭송하는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다.

"… 황제 폐하. 폐하께서는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똑같이 우러러보는 태양과도 같은 존재이십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수백만 민중의 불행을 구원하셨습니다. 슬픈 고아와 그 어머니, 아직 파문에서 해방되지 못한 불행한 병자 위에 성은을 내려주시기를 오로지 탄원합니다. 저는 황제 폐하를 위해, 폐하의 국민을 위해 신명을 바칠 각오를 한시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도스토옙스키1』, 모츨스키)

여기에서 불행한 병자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병을 치료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반드시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수도로의 귀환은 탄원서가 접수되기도 전에 내려졌고 1859년 11월 25일 그에게 전달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마침내 12월 중순 족쇄를 차고 떠난 지 만 10년 만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역에는 형 미하일이 마중 나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용소에서 나온 후 세미팔라친스크에서의 처음 약 3년간 마리야에게 온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아무런 문학적 작업도 진전시키지 못했다.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쓰기 시작한 『죽음의 집의 기록』은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 1861년 <시대>지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시 정리되었고 1862년에 비로소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결혼 후 시베리아에서 나온 작품은 『아저씨의 꿈』과 『스쩨빤찌꼬보 마을 사람들』 정도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문학적으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시베리아 시절에 쓴 것은 아니지만 1870년에 나온 『영원한 남편』의 경우, 과거 시베리아에서 마리야에게 구혼했을 때 경쟁자들과의 삼각관계 속에서 겪은 갖가지 감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불행했던 첫 결혼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와 1857년부터 1864년까지 7년 동안 살았다. 그러나 후반에는 마리야의 병세가 깊어져 요양이 필요했으므로 거의 별거 상태에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스스로 이 결혼이 두 사람에게 모두 불행했다고 했다. 아내 사망 후 브랑겔 남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 불행의 윤곽만을 얼핏 밝혔을 뿐이다. 결혼 후에는 주변 사람들과의 편지 등에서도 아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첫 번째 결혼 생활에 대해 추측해볼 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아내가 사망한 후 브랑겔 남작에게 보낸 1865년 3월 31일 자 편지에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우리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 그녀와 나 두 사람 모두 불행했습니다(이것은 그녀의 정열적이고 불신에 가득 찬 그리고 병적일 정도로 변덕스러운 기질 탓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서로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이가 불행하면 할수록, 서로에게 그만큼 더 이끌렸습니다." (『도스토옙스키1』, 모츨스키)

후일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도스토옙스키 사후에 쓴 회고록을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죽은 첫 아내를 떠올리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으며 결혼 생활 중 제네바에서 딸 소냐가 죽은 후 비탄에 잠겨 있을 때 단 한 번 이야기한 것 외에는 마리야에 대해 이야기를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 그 한없이 비통한 날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비석 발치에 앉아 소냐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리고 자식을 가슴에 묻은 채 그곳을 떠났다. 그 아이의 마지막 안식처를 자꾸만 돌아보면서.
우리가 타야 했던 기선은 화물선이어서 승객이 적었다. 날은 따뜻했지만 우리의 마음처럼 음울했다. 소냐의 무덤을 떠나는 것 때문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의 이름)는 마음의 동요가 몹시 심한 상태였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자신을 괴롭혀온 전 생애와 자신의 운명을 그가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는 불평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자애롭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외톨이로 비참하게 보낸 젊은 시절을 회상했고, 처음에는 그의 재능을 인정했으나 나중에는 그에게 잔인한 상처를 주었던 문단 동료들의 조소를 떠올렸다. 유형지를 회상하면서 4년간 그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말해주기도 했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와 결혼하여 그토록 원하던 가정의 행복을 찾으려 했던 자신의 꿈도 얘기했다.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의심 많고 병적으로 변덕스러운 이상한 성격'은 그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다 '자식을 갖는 일은 위대하고도 유일한 인간적인 행복'이라는 생각이 그를 찾아왔고, 그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가혹한 운명은 그를 가엾게 여기지 않고 그에게서 그토록 소중한 존재를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 전에도, 그 후로도, 그가 살면서 멀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입은 쓰디쓴 상처에 대해 그렇게 세세한 일까지 다 들먹이며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를 위로하려 애썼고, 신이 우리에게 내리신 시험을 공손히 받아들이자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비애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신산을 다 겪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기라도 해야 그 비애를 덜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불행한 내 남편에게 가슴 가득 연민을 느꼈고 그토록 비극적인 그의 인생에 그와 함께 목 놓아 울었다. 우리가 함께 겪은 절절한 고통과 마음을 나눈 대화를 통해 나는 그의 병든 마음속 저 깊은 곳까지 헤아리게 되었고, 우리는 더욱 긴밀하게 결합된 것 같았다."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까야, 최호정 옮김, 그린비, 2003)

폐결핵에 걸린 마리야는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10년 만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형 미하일과 함께 야심차게 준비해 1861년부터 시작했던 잡지 <시대>는 1863년 폴란드인의 무장봉기를 다룬 비평가 스트라호프의 글이 당국에 의해 반국가적이라고 지목되면서 이해 5월 갑자기 강제 폐간이 되었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쳐왔다. 그러한 뒤죽박죽인 상황 속에서 도스토옙스키는 1863년 여름 20대 초반의 당돌한 젊은 여성과 유럽 여행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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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2 폴리나 수슬로바(1839~1918). 1860년대 사진. 3 정장을 한 도스토옙스키(1861).

1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2 폴리나 수슬로바(1839~1918). 1860년대 사진. 3 정장을 한 도스토옙스키(1861).

 

애인 수슬로바

도스토옙스키가 폴리나 수슬로바(아폴리나리야 프로코피예브나 수슬로바, 1839~1918)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시대>지에 단편을 기고하면서부터였다. 수슬로바는 작가를 지망하는 대학생이었는데 뛰어난 미모에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수슬로바와 도스토옙스키는 18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1863년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기로 할 정도로 깊어졌다. 마리야가 폐결핵으로 요양 중일 때다. 수슬로바가 파리로 먼저 떠났고 도스토옙스키가 뒤따라갔다. 도스토옙스키는 파리로 가는 도중 독일 비스바덴의 도박장에 들렀다가 운 좋게도 5천 프랑을 따는 행운을 만나기도 했는데 이게 그가 도박에 계속 빠지는 화근이 된다.

그는 거액을 손에 넣자 득의만만해져 돈의 일부를 처제를 통해 앓고 있는 마리야에게 보냈다. 그리고 파리로 가서 수슬로바를 만났으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가 비스바덴의 도박장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 것도 이유였지만, 그를 기다리는 사이에 수슬로바가 한 스페인 남자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살바도르라는 이름의 이 사람은 의사이거나 의대생이었던 것 같다. 자신감이 충만한 젊은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쉽게 깊은 관계까지 갔지만 살바도르는 수슬로바에게 곧 싫증을 느끼고 그녀를 떠난다. 수슬로바가 남자에게 차인 것이다. 살바도르는 '그만 만나자'는 얘기도 수슬로바에게 직접 하지 않고 인편으로 알렸다. 친구를 시켜 그녀에게 자신이 티푸스에 걸렸다는 편지를 보내게 했다. 여자를 떼어버리기 위해 꾀를 낸 것이었다. 자존심 강한 수슬로바는 그를 쫓아가 총으로 쏘아 죽이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8월 14일 도스토옙스키가 나타났던 것이다. 파리에서 도스토옙스키를 기다리던 폴리나는 살바도르와 사귀게 되자 도스토옙스키에게 "파리에 오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그 편지를 받지 못한 채 파리에 도착했다. 역사가 E. H. 카가 후일 공개된 수슬로바의 일기를 인용해 그의 『도스토옙스키 평전』에 실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내가 말했다.
"무슨 편지를?"
"당신이 파리에 오지 말라고 쓴 것인데……."
"오지 말라니 무슨 말이오?"
"모든 게 너무 늦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만 되겠어. 어디든 나갑시다. 무슨 일인지 말해줘. 그러지 않으면 죽어버리고 말 거야."
(그들은 함께 마차를 타고 도스토옙스키의 숙소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나의 발밑에 쓰러져 무릎을 안고서 흐느끼며 말했다.
"당신을 잃게 되었군. 분명히."
기분을 가라앉힌 그는 누구 때문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아마도 젊고 잘생긴 남자겠지. 말도 잘할 테고……. 그러나 나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오랫동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람한테 모든 것을 다 바쳤소?"
"묻지 마세요.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나는 그 사람을 매우 사랑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행복하오?"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다니! 그럴 수가?"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는 절망한 듯 머리를 잡고 소리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노예처럼 사랑하고 있군! 말해봐. 알아야만 해! 당신은 세상 끝까지 그를 쫓아가겠지?"
"아니에요." 나는 대답했다. "귀국하고 싶어요." 나는 울어버렸다.

파리에서 만난 젊은 스페인 남자로부터 버림받아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을 때 나타난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녀는 귀국하고 싶다고 했다. 중간에 도박장에서 돈까지 따서 의기양양하게 파리까지 온 도스토옙스키는 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슬로바에게 "그 일을 큰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위로까지 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속맘이야 쓰리지 않았을 리 없지만 유부남인 그가 스무살 가까이 어린 여자에게 그 상황에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수슬로바의 돌변한 태도를 보고 일단은 여행 자체가 무산되는 상황은 피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결국 두 사람은 도스토옙스키의 제안으로 연인 사이가 아니라 남매 같은 관계로 여행을 하기로 합의한다. 이를테면 함께 다니기는 하지만 호텔 방은 따로 쓰는 그런 여행이었다. 배 안에서는 한방에서 자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기록과 전후 상황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이미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도스토옙스키의 그런 제안은 일단 수슬로바를 달래기 위한 임기응변책이었을 것이지만 이후 쭉 그런 상태로 여행을 한 것 같다.

E. H. 카는 『도스토옙스키 평전』에서 수슬로바의 파리 사건에 대해 "(스페인 남자에게 차인 것은) 수슬로바의 생애 중에서 그녀가 남자에 대해 싫증을 내기 전에 남자가 그녀에게 싫증을 낸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남자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그녀는 한참 연하의 남자와 결혼했다가 6년 만에 헤어졌는데, 그를 골탕 먹이기 위해 20년 동안이나 이혼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이기적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일단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기로 한 두 사람은 도중에 독일의 비스바덴을 경유해 간다. 도박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도스토옙스키 때문이었다. 파리로 가는 도중에 들렀을 때는 돈을 제법 따 러시아로 송금하기까지 했으나 이번에는 그만 갖고 있던 현금의 전부인 3천 프랑을 몽땅 잃고 말았다. 다급해진 그는 처음에 딴 돈의 일부를 보내주었던 처제에게 송금을 부탁해 그 돈으로 제네바까지 갔다. 거기서 또다시 돈이 떨어지자 자신의 시계는 물론 수슬로바의 반지까지 저당 잡히며 궁색한 여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이탈리아의 로마, 나폴리까지 구경했다.

그는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의 잡지 편집장 보보리킨에게, 잡지에 실을 소설을 쓸 테니 원고료를 선금으로 300루블만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돈을 받아 겨우 여행을 마치고 10월 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수슬로바는 10월 초순 그와 헤어져 파리로 갔다. 두 사람은 그 후 마리야 사망 이듬해인 1865년 비스바덴에서 다시 만났으나 감정은 회복되지 않았다. 보보리킨에게는 결국 소설을 보내지 못해 형 미하일이 동생이 빌린 돈을 갚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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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옴스크의 류바 여인 동상. 우_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썼던 모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소장.

좌_옴스크의 류바 여인 동상. 우_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썼던 모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소장.

 

수슬로바와의 사랑과 증오

도스토옙스키가 유형 생활을 한 옴스크와 군 생활을 한 세미팔라친스크. 세미팔라친스크는 현재 카자흐스탄 땅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유형 생활을 한 옴스크와 군 생활을 한 세미팔라친스크. 세미팔라친스크는 현재 카자흐스탄 땅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유형 생활을 한 옴스크와 군 생활을 한 세미팔라친스크. 세미팔라친스크는 현재 카자흐스탄 땅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슬로바에 대해 가슴에 불만을 가득 안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1865년 수슬로바의 여동생 나데지다 프로코피예브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슬로바에 대해 이렇게 불평한다.

"아폴리나리야는 상당한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녀의 이기심과 자존심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모든 것, 완전무결함을 요구했고 타인들의 장점을 생각함에 있어서 단 하나의 불완전함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내가 자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비난하고 불평하고 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1863년에는 "당신은 너무 늦게 왔어요……."라는 말로 나를 맞이한 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는 누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겁니다. 바로 2주일 전만 해도 나를 사랑한다고 정열적인 편지를 보냈던 그녀가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몹시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녀는 나의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녀는 항상 즉흥적인 경멸감으로 나를 대합니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에서 평등이란 개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글쎄요. 그녀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녀는 왜 지금도 내게 고통을 주고 있을까요? (『도스토옙스키1』, 모츨스키)

수슬로바 역시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좋은 감정이 아니다. 수슬로바의 일기를 보면, "나는 그저 그를 증오할 뿐이다……. 2년 전의 나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도스토옙스키를 증오하게 된다. 그는 나의 신념을 말살시킨 최초의 인물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2년 전이라는 것은 함께 유럽 여행을 했던 1863년을 말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그 여행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기는커녕 속으로는 상대에게 진저리를 낸 것 같다.

수슬로바와의 유럽 여행 3년 후, 소설 마감 시한에 쫓겨 두 번째 부인이 되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속기로 받아 쓴 『도박꾼』(『노름꾼』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에서는 수슬로바와 이름이 같은 폴리나가 여주인공이다. 이 소설에서는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강하고 이기적인 수슬로바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여성이다.

『도박꾼』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좋아하는 폴리나에게 이용당하면서도 무시당하는 주인공 알렉세이를 통해 폴리나에 대한 분한 감정을 그대로 토해낸다. 도스토옙스키가 수슬로바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그랬는지 모른다. (다음 호에서 계속)

<우먼센스>가 후원하고 바이칼BK투어(주)가 주관하는 '<시베리아 문학기행>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이 8월 24일부터 31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실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2018년 3월호 293쪽 참조.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투어]<시베리아 문학기행>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03월호
2018년 03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