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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코드는 블랙입니다

지난 1월 열린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여배우들은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할리우드의 흥행 귀재들은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On February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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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나 여자가 만든 영화가 작품상을 탔고, 공로상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는 대통령 후보감으로 급부상했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나 여자가 만든 영화가 작품상을 탔고, 공로상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는 대통령 후보감으로 급부상했다.


시상식 드레스는 여배우들에게 중요한 홍보 도구다. 하지만 뛰어난 배우들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만 보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다. 남배우는 세탁소에서 빌린 턱시도를 입고 수염을 기른 채 레드카펫에 올라도 상관없지만 여배우는 카메라 세례에 대비해 몇 주 동안 다이어트를 하고 드레스를 고르며 헤어, 메이크업, 네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 등짝에 군살이라도 붙어 있으면 적어도 몇 달은 놀림거리가 되고 작품 섭외도 뚝 끊길 테니까. 이번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참가한 여배우들은 그런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보았다. 몇 달 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미투 캠페인(#MeToo Campaign,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성적 강요 경험을 고백하고 성 평등을 요구하는 해시태그 운동)의 일환으로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시상식에 참가한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 캠페인은 미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고, ‘타임즈 업(Time’s Up!)’이라는 지속 가능한 사회 안전망의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고 여성의 사회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타임즈 업 기금’에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거금을 쾌척하거나 이름을 내주었다. 그들은 이번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타임즈 업’ 홍보 이벤트로 삼았다. 여배우들은 드레스 코드를 철저히 지켰을 뿐 아니라, 레드카펫에 여성 운동가를 동반하라는 미션도 수행했다. 메릴 스트립은 미국 가사노동자협회 대표를, 미셸 윌리엄스는 미투 캠페인 설립자를 파트너로 택했다.

여성 파워는 시상식 내내 이어졌다. 공로상인 ‘세실 B. 데밀상’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는 “남성들의 권력에 맞서 용감히 진실을 이야기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너무 오랜 시간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간은 끝났다. 새로운 날이 지평선에 있다”라고 말해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즉각 윈프리를 2020년 미국 대선 후보로 밀자는 소리가 나왔다. 여성 언론인 이야기 <더 포스트>로 골든 글로브 후보에 오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메릴 스트립은 그의 출마를 공개 지지했다.

시상 내용 역시 변화의 물결을 반영했다. 영화 작품상 중 드라마 부문은 무능한 경찰 대신 직접 딸의 살해범을 찾으려는 어머니 이야기, <쓰리 빌보드>에 돌아갔다.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흥행도 안 되고 주목도 덜 받는다는 불문율을 깬 것이다. 같은 부문 후보에 오른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더 포스트> 등도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있는 작품들이다. 뮤지컬·코미디 부문에선 배우 출신 여성 감독 그레타 거윅의 데뷔작 <레이디 버드>가 작품상을 받았다. 골든 글로브는 3월에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초전으로 불린다. 그래서 작품상, 감독상이 아니라 ‘남성 작품상’ ‘남성 감독상’이라 불러야 한다는 비아냥을 받아온 남자 영화 일색의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변화가 있을지 기대된다.

전반적으로 이번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할리우드가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 행사였다. 시의적절한 기획, 드라마틱한 연출, 매력적인 출연진, 견고한 팀워크로 중대한 사회 이슈를 한 편의 엔터테인먼트 쇼로 바꾸어놓고, 그 주목도를 과시하며 변화의 주도권을 쟁취하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왜 할리우드인가? 그들은 어떻게 전 세계의 재능과 돈을 빨아들이는 꿈의 공장이 되었으며, 그들은 왜 항상 새롭고 파워풀한가? 그 답이 이 한 편의 쇼에 다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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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성범죄를 다룬 드라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정려원이 시상식에서 성폭력 문제를 언급하자 유명 남성 앵커가 “(수상 소감) 연기가 어색하다”라고 빈정대서 물의를 빚었다. 사회와 뚝 떨어져 둥글둥글 착한 말만 하며 살려는 한국 배우들 사이에서 드물게 멋진 시도를 한 배우를 격려는 못 할망정 이렇게 초를 칠 수 있나.

어디 한국만 문제랴. 프랑스 문화 예술계 인사 100명은 <르몽드>에 공개서한을 보내 미투 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들은 “성폭력은 분명 범죄지만 유혹이나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행동은 범죄가 아니다. 최근 남성들에게 증오를 표출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을 배격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글은 즉각 전 세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용기 내서 불의에 맞선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고로 몰아가는 전형적인 ‘여혐’이고, 타인에게 강요당할 일이 거의 없는 상류층 백인 여성들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미성년자 성 매수 전력이 있는 이탈리아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가 옳다구나 하고 <르몽드> 공개서한을 지지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안타깝게도 공개서한을 보낸 100명의 문화 예술인 중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가장 유명한 탓에, 비난은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 메릴 스트립과 그를 비교하며 할리우드의 아이콘은 시대와 호흡하고 있는데 프랑스 영화의 아이콘은 성범죄자들이나 옹호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게 예술가의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직업 수명을 늘리고 돈을 버는 데는 필요한 요소다. 할리우드는 그 사실을 안다. 그들이 읽은 대세는 페미니즘이다.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그것을 증명하는 쇼였다. 한국과 유럽은? 한숨이 나지만 어쩌겠나. 전 세계 영화인들이 모두 그렇게 똑똑하다면 할리우드가 엔터테인먼트의 메카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이숙명(영화 전문 칼럼니스트)
사진
게티이미지
2018년 02월호
2018년 02월호
에디터
하은정
이숙명(영화 전문 칼럼니스트)
사진
게티이미지